[include(틀:관련 문서, top1=아나톨리 비쇼베츠)] [include(틀: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include(틀: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9891_19466.html|[[파일:비쇼베츠 - MBC.jpg|align=center&width=100%]]]]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1969760_19466.html|[[파일:비쇼베츠 - MBC2.jpg|align=center&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9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D313A 0%, #CD313A 30%, #CD313A 70%, #CD313A)" {{{#ffffff '''대한민국 U-23 대표팀 감독'''}}}}}}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 A대표팀과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겸직한 [[아나톨리 비쇼베츠]]의 한국 지도자 경력 및 국가대표팀 행적을 정리한 문서. == 선임 과정 == 한국 A대표팀은 1993년에 열린 [[1994 FIFA 월드컵 미국]]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숙적 일본에게 0:1로 패배한 후, [[도하의 기적]]으로 간신히 1994 미국 월드컵 24강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 당시 완전히 한 수 아래라고 생각했던 일본이 네덜란드 출신의 [[한스 오프트]] 전 감독을 영입해 한국을 이기고 1994 미국 월드컵 24강 본선 진출에 거의 성공할 '''뻔'''한 것에 자극을 받아, 축구 선진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다시 한 번 국내에 형성된다. 당시 [[구소련]] 공산권이 붕괴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동유럽권 축구 지도자 영입이 가능했던 점도 작용했다. 지금까지도 축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발레리 니폼니시]] 전 감독이 유공 코끼리에 부임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니포 전 감독도 역시 러시아 출신이다. 그런 배경속에, [[1988 서울 올림픽]] 축구 종목에서 소련이 우승할 당시 감독으로서 한국과도 이미 인연이 있었던 아나톨리 비쇼베츠가, 1994년 2월에 일단은 한국 월드컵 축구 대표팀 기술고문으로 선임되어서 한국 땅을 밟게 된다. 이후 6월에 1994 미국 월드컵이 종료된 후 김호 전 감독이 사퇴하고, 7월부터 올림픽 팀 및 A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 활동 == ===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 [include(틀: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아시안 게임)] 1994년 7월, 대표팀의 기술고문이었던 비쇼베츠가 김호 전 감독을 이을 차기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9월 11일과 13일, 두 차례 국내에서 치러진 당시 신생국 [[우크라이나 축구 국가대표팀|우크라이나]]와의 평가전을 통해 대표팀 감독으로써 첫 데뷔를 하게 된다. 비쇼베츠호는 1차전에서 홍명보의 결승골로 1:0, 2차전에선 지금도 회자되는 원더골인 [[김도훈]]의 바이시클킥 골을 포함해 2:0 완승을 거두고 산뜻하게 출범했다. 한국 A대표팀 감독 공식 대회 데뷔는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이뤄졌다. 당시에는 연령 제한이 없어서, A대표팀 최정예 멤버가 출전했는데 8강전에서 홈팀이자 숙적인 일본을 3:2로 격파하고 4강에 진출하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4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우즈베키스탄]]에 0:1로 덜미를 잡히면서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경기 내용은 일방적인 한국의 우세였는데, 아쉽게도 골키퍼 [[차상광]]이 볼을 어이없이 놓치는 바람에... 뒤이은 동메달 결정전에서도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쿠웨이트]]에 패해 동메달 획득에도 실패했다. ==== 18강[* 당시 18개국이었다.] 조별리그 C조 ==== ===== vs [[네팔]] (1차전) - 11:0 승 ===== ===== vs [[오만]] (2차전) - 2:1 승 ===== ===== vs [[쿠웨이트]] (3차전) - 0:1 패 ===== ==== 토너먼트 ==== ===== vs [[일본]] (8강) - 3:2 승 ===== ===== vs [[우즈베키스탄]] (4강) - 0:1 패 ===== ===== vs [[쿠웨이트]] (3·4위전) - 1:2 패 ===== === [[1996 애틀랜타 올림픽]] === [include(틀: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올림픽 축구)] 그리고 그는 23세 이하 올림픽 대표팀을 맡는다. 2년 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첫 경기에서 [[윤정환]]의 페널티킥 결승골로 1-0으로 [[가나 축구 국가대표팀|가나]]를 잡고 [[1948 런던 올림픽]]에서 멕시코를 5-3으로 꺾은 이후 48년만에 올림픽 축구에서 첫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2차전에서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멕시코]]와 0-0 무재배를 한 데 이어 최종전에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에 1-2로 패하면서 사상 첫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2패로 탈락 확정이었고, 한국은 비기기만 하면 토너먼트에 올라갈 수 있었으나, 종료 직전 한골을 먹는 바람[* 상대팀에게 허용한 2골은 모두 베테랑 선수였던 브랑카에게 허용했다. 와일드카드로 선발한 황선홍과 이임생이 모두 부상을 당해 3차전에 결장했고 급히 한국에서 건너온 이경춘은 경기에서 실수를 연발했다.]에 대회 11위로 8강 진출이 실패했다. 올림픽축구 11위로 탈락한 후 한국으로 오지 않고, 미국 현지에서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래도 계약 기간은 다 채웠기에 [[움베르투 코엘류|코엘류]]나 [[조 본프레레|본프레레]], [[핌 베어벡|베어벡]], [[울리 슈틸리케|슈틸리케]]처럼 중간에 잘린 감독은 아니다. ==== 16강 조별리그 C조 ==== ===== vs [[가나]] (1차전) - 1:0 승 ===== ||<-3> [[1996 애틀랜타 올림픽|[[파일:1996 애틀랜타 올림픽 로고.svg|height=80]]]][br]'''{{{#1e629f 남자축구[* 1996년 올림픽부터 여자축구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조별리그 C조 1차전[br]1996. 07. 21.(일) 12:00(UTC-4)}}}''' || ||<-3> '''[[RFK 스타디움|{{{#cca164 RFK 스타디움[* 당시 [[DC 유나이티드]] 홈 구장]}}}]] {{{#cca164 (워싱턴 D.C.)}}}''' ||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50%]] ||<|2> {{{+5 {{{#fff '''1''' : 0}}}}}} || [[파일:가나 국기.svg|width=50%]] || ||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000 대한민국}}}]]''' || '''[[가나 U-23 축구 국가대표팀|{{{#000 가나}}}]]''' || || '''[[윤정환|{{{#000 윤정환}}}]] (PK 41')'''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 || ===== vs [[멕시코]] (2차전) 0:0 무 ===== ||<-3> [[1996 애틀랜타 올림픽|[[파일:1996 애틀랜타 올림픽 로고.svg|height=80]]]][br]'''{{{#1e629f 남자축구 조별리그 C조 2차전[br]1996. 07. 23.(화) 12:00(UTC-6)}}}''' || ||<-3> '''[[리전 필드|{{{#cca164 리전 필드}}}]] {{{#cca164 (앨라배마주, 버밍햄시)}}}''' || || [[파일:멕시코 국기.svg|width=50%]] ||<|2> {{{+5 {{{#fff 0 : 0}}}}}}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50%]] || || '''[[멕시코 U-23 축구 국가대표팀|{{{#000 멕시코}}}]]''' ||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000 대한민국}}}]]''' || || -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 || ===== vs [[이탈리아]] (3차전) 1:2 패 ===== ||<-3> [[1996 애틀랜타 올림픽|[[파일:1996 애틀랜타 올림픽 로고.svg|height=80]]]][br]'''{{{#1e629f 남자축구 조별리그 C조 2차전[br]1996. 07. 25.(목) 12:00(UTC-6)}}}''' || ||<-3> '''[[리전 필드|{{{#cca164 리전 필드}}}]] {{{#cca164 (앨라배마주, 버밍햄시)}}}''' || || [[파일:이탈리아 국기.svg|width=50%]] ||<|2> {{{+5 {{{#fff '''2''' : 1}}}}}}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50%]] || || '''[[이탈리아 U-23 축구 국가대표팀|{{{#000 이탈리아}}}]]''' ||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000 대한민국}}}]]''' || || '''[[마르코 브랑카|{{{#000 브랑카}}}]] (24', 82')''' || [[파일:득점 아이콘.svg|height=20]] || '''[[이기형|{{{#000 이기형}}}]] (62')''' || == 퇴임 및 평가 == 겨우 2년간 한국 대표팀을 맡았지만, 축구팬들 사이에서 평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폐쇄적이던 한국 축구 지도자들은 첫 외국인 대표팀 감독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는데, 대표적으로 [[박종환]]은 비쇼베츠를 두고 "[[동유럽]]은 축구 선진국이 아니다"라면서 대놓고 디스했다. 1991년에 독일 출신의 명장 [[데트마어 크라머]]가 23세이하 대표팀 기술고문을 맡아서 올림픽 본선 진출을 이끌었지만, 국내 지도자들의 냉대 속에 정작 본선은 지휘하지 못하고 1년 만에 퇴임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서 2001년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부임했을 때도 국내 지도자들은 히딩크를 퇴물 사기꾼 취급하면서 하루빨리 짤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흑역사가 있다.[* 한국에 오기 전 레알 마드리드에서 1년만에 불명예스럽게 경질당했던 걸 문제삼았다. 불과 몇 년 전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이끌며 월드컵 4위를 기록하고 32강 조별리그에서 만난 한국에 [[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네덜란드전|마르세유의 참사]]를 선사한 감독이었음에도 그 누구도 이를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덤.] 이때도 [[박종환]], [[차경복]], [[허정무]] 등등 차범근을 제외한 국내지도자들 대다수가 저랬다. 선수단 장악 문제로 일부 선수들과 충돌하기도 했으며, 한국 축구의 전설 [[홍명보]]도 당시 비쇼베츠의 교체 선수 출전을 거부하는 항명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축구협회 간부로 동행한 [[조중연]]이 [[홍명보]]를 두고 '''선수가 저러면 안된다'''는 충고를 공개적으로 했을 정도. 다만 이와는 별개로 홍명보를 원래 포지션이었던 [[미드필더]]로 다시 끌어올려 45분 동안 전술 운용을 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으며, 후반전 홍명보의 체력 문제가 대두되자 다시 수비수 위치로 끌어내린 적이 있다. 하지만 "(홍명보는)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다"라 찬사를 보냈을만큼 미드필더 홍명보의 모습을 곧잘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 2006년 이후, 홍명보의 플레이 스타일을 가지면서 미드필더가 가능한 [[기성용]]이 등장했는데 그의 활약을 보면 비쇼베츠는 기성용처럼 써먹어 보려 했던 듯하다.] 그외에도 [[영어]]를 못 하는데[* 소련은 영국, 미국이 적성국이여서 스파이나 고위층을 제외하면 영어는 그냥 잘 못하거나 기초밖에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러시아어]] 통역은 한국말을 잘 몰라 선수 지도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냉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절이라, [[서울대학교]] 같은 명문대에도 러시아어를 책으로 배웠을 뿐 러시아 현지에서 러시아어를 써 본 교수가 한동안 없었을 정도로 러시아어 통역 공급이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특수외국어 전문 통/번역가들은 대개 인건비 문제 탓에 계약 성사가 힘들어서 현지 교민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잦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외국어는 당연히 유창하게 잘 하긴 하지만 우리말로 원활하게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직업적인 통역은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훈련을 요한다.]. 이 때문에 축구협회는 이후부터 외국인 감독 선임에 영어 구사를 중요한 조건으로 내세웠다. [[거스 히딩크]]를 비롯해 [[네덜란드]] 출신 감독을 많이 썼던 것도 네덜란드어와 영어가 계통이 가깝고 비슷해서 네덜란드인들은 대부분 영어도 잘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언어가 외국인 감독을 정하는 데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서, 약 30여년 후 선임한 [[파울루 벤투]] 감독은 거의 모국어 [[포르투갈어]]만 사용하고 영어 회화는 약한 편이라 비쇼베츠 감독과 비슷한 편이다.[* 다만 30년동안 국내의 외국어 통역 관련 공급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발전하긴 했다. 또 벤투 감독이 스페인어, 영어 등 외국어를 포르투갈 억양이 세지만 자신의 의견을 무리없이 말하는 수준이기도 했다.] 이런 저런 문제들 때문에 축협과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한국 생활에 그다지 애착을 보이지 않아 재계약에도 관심이 없었고, 올림픽 결과에 상관없이 임기가 종료되면 떠나겠다고 협회측에 미리 밝혔다. 또한 기자들의 적(?)이기도 했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76&aid=0000000637|#]] 그러나 선수 개개인에 대한 특징을 잘 파악하고, 공정하게 선수를 선발하는 모습은 상당히 호평을 받았다. 특히 선수들을 지도할 때나 관전하면서 항상 메모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렇게 데이터나 기록을 중시하는 모습은 한국의 그 어떤 지도자에게서도 볼 수 없었다. 사실 아나톨리 비쇼베츠는 데이터 축구를 창시했던 소련의 명감독 [[발레리 로바노브스키]]의 동료선수이자 제자였으며,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 축구에 유럽식 전술을 제대로 심으려고 노력했던 것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거스 히딩크처럼 피지컬을 중시하긴 했지만, 거스 히딩크와 달리 [[윤정환]]을 총애했다. 또한 [[유상철]]을 발탁하여 전방위로 사용하여 이후 한국 국가대표팀의 포메이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앙 미드필더진은 윤정환의 보디가드로 피지컬 좋은 선수들로 꾸렸다.[* 그래서 단신 선수들은 외면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진호(축구)|조진호]] 정작 자신은 조진호가 욕심이 많아서 버렸다고 말했다.] 이 전술은 후에 윤정환이 감독이 되었을 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 여담 == * 이후 국대 감독으로 선임된 [[차범근]] 전 감독이 지도법이 비쇼베츠와 유사하다고 해서 배추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역대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a=김삼락호/U-23, b=김삼락호, c=비쇼베츠호, d=허정무호/U-23, e=허정무호)]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아나톨리 비쇼베츠, version=158)] [[분류:대한민국 감독별 축구 국가대표팀]][[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아시안 게임]][[분류: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분류: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올림픽 축구]][[분류:1996 애틀랜타 올림픽/축구]][[분류:한러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