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신라 왕후)]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신라 진흥왕의 제1비[br]{{{+1 사도부인 | 思道夫人}}}'''}}} || ||<|2> '''출생[br]{{{-3 (음력)}}}''' ||530년대[* 손자인 진평왕의 탄생년도등을 볼 때 540년대에 태어났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아무리 적어도 530년대 태어난 게 되는데 진흥왕보다 몇살이 더 많았을 수도 있다.] || ||[[신라]] || ||<|2> '''사망[br]{{{-3 (음력)}}}''' ||[[614년]]^^([[진평왕]] 36년)^^ || ||[[신라]] 영흥사(永興寺) || ||<|2> '''재위기간''' ||'''{{{#fbe673 신라 왕비}}}''' || ||[[540년]] [[7월]] ~ ?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경주 박씨(慶州 朴氏) || || '''휘''' ||사도(思道) || || '''법명''' ||묘법(妙法) || || '''부모''' ||부 - 박영실 || || '''부군''' ||[[진흥왕]] || || '''자녀''' ||{{{#!folding 슬하 3남 [ 펼치기 · 접기 ] 장남 - [[동륜태자]] 차남 - [[진지왕]] 3남 - [[김구륜]](金仇輪)}}} || || '''시호''' ||'''사도부인(思道夫人)''', 백융부인(白𪀚夫人)[* 삼국유사가 인용한 이제가기(현재는 실전)에만 등장한다.] || || '''이칭''' ||사도태후(思道太后) ||}}}}}}}}} || [목차] == 개요 == [[신라]] [[진흥왕]]의 왕비. 삼국유사 '제3권 흥법 제3'의 '원종흥법 염촉멸신'에서는 모량리(牟梁里) [[각간]] 박영실의 딸로 식도부인(息道夫人/息途夫人) 혹은 색도부인(色刀夫人)이라고도 한다. 진흥왕과 결혼해 [[김동륜]]([[진평왕]]의 부친)와 [[진지왕]]([[김사륜]]), [[김구륜]](金仇輪)을 낳았다.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진지왕의 어머니이자 진흥왕의 어머니도 될 수 있다고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후자는 오기로 본다. 진흥왕 사후 [[출가]]해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서 지내다 사망했다. 몇 년에 태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손자인 진평왕이 즉위하고 36년이 지나서 사망했으므로 상당히 장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옥진의 딸로 [[미실]]의 이모이며, 자신의 둘째 아들이기도 한 [[진지왕]]의 폐위를 주도했다고 나온다. 참고로 화랑세기의 영향으로 사도부인을 사도태후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정사에서 그녀는 태후라고 불린 적이 없어서 태후가 되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이는 진흥왕 사후에 출가해서 절에 있었기 때문인 듯. == 창작물 == [[대왕의 꿈]]에선 [[정재순]]이 연기했다. [[선덕여왕(드라마)|선덕여왕]]에도 나올법 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이 드라마에서 채택한 [[화랑세기]] 기록대로 하자면 미실은 중간보스 느낌으로 사도태후는 '''진 최종보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텐데 아쉬운 부분. 다만 등장한다면 주인공인 [[덕만공주(선덕여왕)|덕만공주]]는 자기 증조할머니랑 권력 투쟁을 벌이는 셈이다. [각주] [[분류:614년 사망]][[분류:신라의 왕비]][[분류:신라의 승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