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가톨릭 국가]][[분류:사르데냐 주]][[분류:이탈리아의 역사]][[분류:유럽의 왕국]][[분류:19세기 멸망]][[분류:사보이아 가문]][[분류:사르데냐 국왕]][[분류:사보이아 공작]] [include(틀:이탈리아의 역사)] ---- ||<-3> {{{#fff {{{+1 '''사르데냐 왕국'''}}}[br]'''Regno di Sardegna'''}}} || ||<-2> [[파일:사르데냐 왕국 국기.svg|width=100%]] || [[파일:사르데냐 왕국 국장(1848).svg|width=80%]] || ||<-2> {{{#fff '''국기'''}}} || {{{#fff '''국장'''}}} || ||<-3> '''[[F.E.R.T.]]'''[* 사르데냐 왕국의 왕가인 사보이아 가문의 표어이다. [[https://en.m.wikipedia.org/wiki/FERT|여러가지 의미]]가 있으나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 ||<-3> '''{{{#fff 상징}}}''' || || '''{{{#fff 국가}}}''' ||<-2>[[사르데냐의 노래]][br](S'hymnu sardu nationale) || ||<-3> {{{#fff '''위치'''}}}[* [[이탈리아 왕국]] 수립 직전의 판도로, 제 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롬바르디아]]를 병합한 이후의 영토이다. 한편 국토 남부 해안지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리구리아]] 지방(구 [[제노바 공화국]]영토)은 1815년에 [[빈 회의]]를 통해 획득하였다.] || ||<-3>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사르데냐 왕국(1815).svg|width=100%]]}}} || ||<-3> [[1720년|{{{#fff '''1720년'''}}}]] [[8월 8일|{{{#fff '''8월 8일'''}}}]] {{{#fff '''~'''}}} [[1861년|{{{#fff '''1861년'''}}}]] [[3월 17일|{{{#fff '''3월 17일'''}}}]] || ||<-3> {{{#fff '''역사'''}}} || ||<-2> {{{#fff '''성립 이전'''}}} || {{{#fff '''이탈리아 통일 이후'''}}} || ||<-2> [[사보이아 공국|{{{#fff '''사보이아 공국'''}}}]] || [[이탈리아 왕국|'''{{{#fff 이탈리아 왕국}}}''']] || ||<-3> '''지리''' || || '''위치''' ||<-2>[[이탈리아]] 북서부 || || '''수도''' ||<-2>[[토리노]](1720~1798, 1814~1861)[br][[칼리아리]](1798~1814) || || '''면적''' ||<-2>약73,000km² (1859년) || ||<-3> '''인문환경''' || || '''인구''' ||<-2>약 7,200,000명 (1859년) || || '''언어''' ||<-2>[[이탈리아어]],[* [[피에몬테어]], [[리구리아어]], [[롬바르드어]], [[사르데냐어]] 등의 방언도 사용되었다.] [[프랑스어]][* 주로 [[프랑코프로방스어]]라는 방언이 사용되었다.] || || '''종교''' ||<-2>[[로마 가톨릭]]|| || '''민족''' ||<-2>[[이탈리아인]][* 피에몬테인, 리구리아인, 사르데냐인 등.] || ||<-3> '''정치''' || || '''정치체제''' ||<-2>[[전제군주제]](1720~1849)[br][[입헌군주제]](1849~1861) || || '''국가원수''' ||<-2>[[국왕]] || || '''국성''' ||<-2>[[사보이아 가문]] || || '''주요 국왕''' ||<-2>[[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1720~1730)[br][[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1730~1773)[br][[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1802~1821)[br][[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1849~1861) || ||<-3> '''경제''' || || '''통화''' ||<-2>[[이탈리아 리라|사르데냐 리라]] || || '''{{{#fff 언어별 명칭}}}''' || ||<:><^|1>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이탈리아어]] ||Regno di Sardegna[* 1815년 이후로는 Piemonte-Sardegna로 표기하기도 한다.] || || [[피에몬테어]] ||Regn ëd Sardëgna || || [[사르데냐어]] ||Rennu de Sardigna || || [[코르시카어]] ||Regnu di Sardegna || || [[프랑코프로방스어]] ||Reyômo de Sardègne || || [[프랑스어]] ||Royaume de Sardaigne || || [[독일어]] ||Königreich Sardinien || || [[스페인어]] ||Reino de Cerdeña || || [[영어]] ||Kingdom of Sardinia || || [[에스페란토]] ||Reĝlando Sardio || || [[중국어]] ||薩丁尼亞王國 || || [[일본어]] ||サルデーニャ王国 ||}}}}}}}}} || [목차] [clearfix] == 개요 == 사르데냐 왕국 또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1720년부터[* 원래의 사르데냐 왕국은 14세기 [[아라곤 왕국]]의 지배 이후 계속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으나, 1720년 [[사보이아 공국]]이 이 지역을 합병한 이후 [[사보이아 가문]]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사르데냐 왕국을 선포하였다. [[프로이센 왕국|사보이아 공국이 중심이 된 합병이었음에도 사르데냐 왕국이라는 이름을 쓴 이유는]] [[역합병|왕국인 사르데냐 왕국이 합병의 주체였던 사보이아 공국보다 격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1861년까지 [[토리노]]를 수도로 하여 존재했던 [[이탈리아/역사|이탈리아]]의 왕국이다.[* 사르데냐 자체의 수도는 [[칼리아리]]인데 어차피 스페인 국왕이 사르데냐 왕위도 함께 보유한 터라 실제로 여기를 수도 삼아 통치한 일은 없었다. 다만 사르데냐가 [[사보이아 공국]]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나폴레옹 전쟁]]중에 본거지인 [[사보이아]]와 [[피에몬테]]를 뺏기는 바람에 잠시 이곳으로 천도를 한 적이 있다.]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이 되는 국가이다. == 역사 == 사르데냐 왕국의 존재는 14세기로 거슬러가지만, [[교황]]이 [[사르데냐]]에 간섭하기 위해 만든 괴뢰왕국이라 [[아라곤 왕국]]이 교황의 허락을 받고 사르데냐를 정복한 이래로 사르데냐 왕은 아라곤 왕, 나중에는 [[스페인 국왕]]이 겸하는 작위에 불과했다.[* 사르데냐를 상실한 지 300여년이 지난 현재도, 스페인 국왕은 명목상의 사르데냐 국왕 칭호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스페인 왕실은 과거에 보유했던 작위를 현재 상태와 무관하게 칭호로 계속 사용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대동맹 측에 가담한 사보이아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1714년, [[위트레흐트 조약]]의 결과 [[스페인]]이 지배하던 [[시칠리아]]를 얻는 데 성공하였으나 1718년, 이탈리아 영토를 탈환하려한 스페인에게 시칠리아를 빼앗겼다. 이로 인해 [[사국 동맹 전쟁]]이 발발하였고 결국 오스트리아의 도움으로 시칠리아를 되찾았으나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사르데냐를 다스리기 어려워한 [[카를 6세]]의 제안[* 제안이라고 하지만 국력차를 앞세운 반협박에 가까웠다.]으로 1720년, 시칠리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였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자신의 대표 작위를 새로 획득한 사르데냐 국왕으로 바꾸면서 사르데냐 왕국은 주권국이 되었으나, 실제 왕국의 중심지는 사보이아 가문이 머무르는 [[피에몬테]]였다.[* 사보이아 가문은 사르데냐에 관심이 없었고 국왕의 방문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탈리아어]]가 사르데냐의 공식어로 지정된 것도 1760년이 되어서였다.] 이후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는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교묘한 중립 정책을 펼쳐 영토를 점진적으로 넓혀갔다. 1733년에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 편을, 1740년에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참전하였고 1748년, [[아헨|엑스라샤펠]] 강화조약으로 [[밀라노]] 코앞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사르데냐 왕국을 오스트리아, 스페인과 함께 이탈리아를 3등분해서 세력을 나눠 갖는 국가로까지 발전시켰다. 1792년,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자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는 1차 대불동맹에 참여했지만, 1796년에 [[나폴레옹]]의 침입을 받아 주요 항구 도시 [[니스|니차]]와 왕실의 본관인 [[사보이아]]를 빼앗기고 말았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1799년,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는 왕국의 중심지였던 [[피에몬테]]까지 빼앗겼고 왕실은 사르데냐로 몽진했다. 다만 사르데냐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 함락되지 않았고, 형의 퇴위로 즉위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가 제5차 대불동맹, 제6차 대불동맹에 참가하여 나폴레옹에 계속 저항한 끝에 1814년, 제1차 [[파리 조약]]으로 잃었던 영토를 모두 되찾았다. 이듬해 개최된 [[빈 회의]]에서 옛 [[제노바 공화국]]의 영토였던 [[리구리아]] 지방을 얻어냈으며, 왕국의 이름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Regno di Sardegna-Piemonte)으로 개칭하였다. 1847년,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는 연합법(Fusione perfetta del 1847)을 통해 사르데냐 왕국, 사보이아 공국, 피에몬테 영주국, [[발레다오스타|아오스타 공국]], 니차 백국, 몬페라토 공국, 제노바 공국[* 나폴레옹 전쟁 이후 획득] 등 명목상 별개였던[* 1815년 [[빈 체제|빈 조약]]에서 이 영토들은 '''샤르데나 국왕의 영토'''라 칭해졌다. 근대적 국민국가와 국왕 개인의 재산으로서의 중세적 국가관이 아직 병립했음을 보여준다.]사보이아 왕가의 영토를 통합하여 행정구역을 재편하였으며, 이듬해 [[1848년 혁명]]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자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새 헌법인 알베르토 헌법(Statuto Albertino)을 채택하였다. 새 헌법은 군대 지휘권과 행정 최종 결정은 왕에게, [[입법권]]은 상,하원 의회에 부여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규정하였으며, 이 때를 기점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의 역학관계를 이용한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국익을 극대화 했다.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당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적극적인 지원을 끌어냈고, 이후 나폴레옹 3세의 변덕으로 적대관계에 놓일 상황에 처했지만, 중요 항구도시 니차와 왕실의 본관 사보이아를 내어주는 조건을 제시하여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공국]], [[파르마 공국]], [[교황령]] 중부의 [[볼로냐]], [[라벤나]] 등 중부 이탈리아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을 지원하여 [[베네토]] 지방까지 확보하였다. 이후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주축이 되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과 [[카밀로 카보우르]], [[주세페 가리발디]] 등의 활약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국명을 [[이탈리아 왕국]]으로 바꾸었다. 자세한 내막은 [[이탈리아 통일]]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통일 이후에도 사르데냐 왕국의 영향력은 남아 있었다. 사르데냐 왕국의 십자가 문장은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문장이 되었으며, 2002년 [[유로화]] 도입 전까지 이탈리아의 법정 화폐였던 [[이탈리아 리라]]도 사르데냐 왕국의 통화였던 사르데냐 리라(Sardinian lira)에서 이어진 것이다. == 역대 지도자 == === 역대 국왕 === [include(틀:역대 사르데냐 국왕)] *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1720년 ~ 1730년) *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1730년 ~ 1773년) *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1773년 ~ 1796년) *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 (1796년 ~ 1802년)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 (1802년 ~ 1821년) * [[카를로 펠리체]] (1821년 ~ 1831년) * [[카를로 알베르토]] (1831년 ~ 1849년)[* 여기에서 직계가 단절되고 분파인 사보이아-카리냐노 가문이 계승했다. 이 가문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 준 왕족 대접을 받았고 유럽 여러 왕실과 결혼해도 [[귀천상혼]]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참고로 [[사보이아 가문]]은 [[살리카법]]을 채택하여 13촌 친척 관계로 왕위를 계승했다.]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1849년 ~ 1861년) === 역대 총리 === * 체사레 발보 (1848년) * 가브리오 카사티 (1848년) * 체사레 알피에리 디 소스테뇨 (1848년) * 에토레 페로네 디 산 마르티노 (1848년) * [[빈첸초 조베르티]] (1848년~1849년) * 아고스티노 키오도 (1849년) * 클라우디오 가브리엘레 디 라우나이 (1849년) * 마시모 다첼리오 (1849년~1852년) * [[카밀로 카보우르]] (1852년~1859년) * 알폰소 페레로 라 마르모라 (1859년~1860년)[* 훗날 [[이탈리아 왕국]] 제6대 [[이탈리아 총리|총리]]를 역임했다.] * [[카밀로 카보우르]] (1860년~1861년)[* 마지막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총리이자 이탈리아 왕국 초대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