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ece5b6 '''{{{+1 남송의 권신[br]{{{+1 史嵩之 | 사숭지}}}}}}'''}}} || || '''[[시호|{{{#fff 시호}}}]]''' ||--장숙(莊肅)-- || || '''[[작위|{{{#fff 작호}}}]]''' ||노국공(魯國公) || || '''{{{#fff 최종직위}}}''' ||중서령(中書令)^^추증^^ || || '''{{{#fff 성}}}''' ||사(史) || || '''{{{#fff 이름}}}''' ||숭지(嵩之) || || '''{{{#fff 자}}}''' ||자유(子由) / 자신(子申) || || '''{{{#fff 부친}}}''' ||사미충(史彌忠) || || '''{{{#fff 조부}}}''' ||[[사호(남송)|사호]](史浩) || || '''{{{#fff 생몰}}}''' ||1189년 ~ 1257년 || || '''[[주군|{{{#fff 주군}}}]]''' ||[[영종(남송)|송영종]][br][[이종(송)|송이종]] || || '''[[국적|{{{#fff 국적}}}]]''' ||남송(南宋) || || '''{{{#fff 출신}}}''' ||남송 경원부(慶元府) 은현(鄞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史嵩之, 미상 ~ 1257년 송나라 명주(明州) 은현(鄞縣) 사람. 자는 자유(子由) 또는 자신(子申)으로, 사미충(史彌忠)의 아들이자, [[사미원]]의 조카. 시호는 충간(忠簡)이었다가 장숙(莊肅)으로 고쳤으나, 공제(恭帝) 덕우(德祐) 초에 시호를 삭탈당한다. == 생애 == === 초기 === 혁혁한 가문의 출신이었다.[* 할아버지 [[사호(남송)|사호]]는 송효종(宋孝宗)의 스승으로 효종(孝宗) 때 한때 우승상(右僧相)을 지냈으며, 숙부 [[사미원]]은 [[개희북벌]](開熙北伐) 때 외척 한탁주(韓胄主)를 주살한 이래 송영종(宋寧宗)·이종(理宗) 때 권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사미충(史彌忠)은 벼슬이 제거복건염다사(提擧福建鹽茶事)에 이르러 위정(爲政)에 재능이 있었고, 사미원(史彌遠)에 빌붙지 않았으며, 제자(諸子)가 현귀한 뒤에도 여전히 소박하였다.] 어린 시절 풍류(風流)로 동전호(東錢湖) 이화산(梨花山)에서 공부하였으며, 육학과 여학(呂學)에서 사공학을 받았다. 사숭지의 행동은 단호했고, 사공의 학문을 좋아하고, 주희의 느린 행동은 싫어하는 것 같았다. 한 번은 처남과 함께 산사에서 강의했는데, 산사의 스님이 그를 싫어하자 사숭지는 화가 나서 그날 밤 그 여자를 불태우고 갔다. 가정(嘉定) 13년(1220년에 진사로 급제하여 광화군(光化軍) 사호참군(司戶參軍)으로 임명되었다. 얼마 후 사미원은 사숭지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새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 어디로 가고 싶으냐? 사숭지는 거의 생각 없이 양(陽)한(水) 일대[* 양양, 번성 일대. 양양은 한수 중류 남안에 위치하여 북안의 번성과 상응하여 장강을 지키는 장벽으로 남송으로서는 요충지였다. 남송과 금이 대치하고 있을 때 남송의 군사각에서 형양 상류의 중요성은 양회(兩淮)를 능가했다. 형양은 금과의 대적에 있어 방벽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남송뿐만이 아닌 강남 지역에 있는 국가에 있어 요충지였다.]에서 벼슬을 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사미원이 이를 듣고, 매우 기쁘게 대답하였다. 사숭지는 양양호조(襄陽戶曹)로 관직을 시작한다. === 양양 경영 === 사숭지는 양양 지역이 남송 정권에 있어 요충지라는 것을 인지하고, 양양 지역을 중요시하였다.[* [[남송]]을 비롯한 남방에 위치한 정권이 북쪽으로 나아가거나 북방의 진격을 막아내려면 양양의 경영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양양이 위치한 남양분지는 동서로 뻗어 남북이 만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동서 싸움이나 남북 싸움이나 남양 분지는 병가가 반드시 다투는 곳이다. 양양은 남양 분지의 남부에 위치하여, 호북에 의지하여, 한수와 장강을 통과하고, 동쪽으로 오회와 접하며, 서쪽으로 파촉에 통한다. 또한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고, 관중에 서쪽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한중을 거쳐 농서쪽으로 연락할 수 있다. 남북대항 당시 남측의 군사방어선은 동서로 3,4천 리에 걸쳐 있었고, 양양은 이 긴 전선의 동남쪽 끝과 서북쪽 끝의 연결 지점에 있었다.따라서 양양은 일방의 요충지로서 양양의 위상은 전역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송과 금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금은 동북쪽에서 왔고, 전쟁책의 근원은 요동이었다. 관롱, 형양에서 동남으로 이어지는 이 서북-동남 방향의 사선과 금병 타격 방향인 동북-서남 방향의 사선이 수직으로 뻗어 있고, 게다가 산과 강의 험지로 남송 왕조의 일시적인 확보가 가능하다. 이 사선은 수천 리에 걸쳐 뻗어 있는데, 연결고리는 장강과 한수, 장강 동쪽으로 오회, 서쪽으로 파촉, 형양거와 연결되어 있다.한수는 한구에서 거슬러 올라가 감숙의 남동쪽 가장자리에 이르며 관롱과 동남쪽을 연결하는 지름길이다. 양양은 이 연결선의 연결부위에 위치한다. 이처럼 남송 국방라인에서 양양은 중요한 지역이었다. 순희 연간인 송효종 시기 진량도 양양 지역의 방어를 중시했다. 그리고, 손오 최후의 명장이었던 [[육항]]도 형주의 방어를 중시하였는데, 나중에 [[몽송전쟁]] 시기 [[맹공]]이 육항의 어구를 인용해 양번 지역의 방어를 중시하였다. 또한, 나중에 [[여문덕]]의 무시와 암해로 인해 투항하는 [[유정(원나라)|유정]]도, 남송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양양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223년부터 1233년까지 양양 지역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였다.[* 일설에는 양양의 지리와 주요 상황을 [[사미원]](史彌遠)에게 암암리에 보고하였다고 한다.] 그는 양양을 열심히 경영하여, 둔전을 전개함으로써 양양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기 위한 양초와 병마가 충분하게 하였다. === 연몽멸금 === 1233년, 몽골의 [[오고타이 칸]]이 사신을 보내 경호제치사 사숭지에게 몽골군의 양초를 지원하는 일을 의논하고, 몽골군과 연합해 금을 멸한 후 하남 지역을 남송의 소유로 할 것을 약속하기로 했다. 사숭지는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정강의 변]]과 같은 꼴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많았으나, 결국 10월 사미원의 결정으로 연몽멸금을 결정하고 경호제치사 사숭지에게 출병을 명했다. 이에 강해(江海)와 강만재(江萬載)의 숙질인 [[맹공]][* 이때 사숭지는 맹공의 상관이었다.] 등을 거느리고 군사를 2만 석, 식량 30만 섬을 운반하여 채주(蔡州)로 이동시켰다. 단평 원년(1234년) 정월에 이르러 채주가 함락되자, 금 애종은 스스로 목을 매고 죽고, 맹공이 이를 휴대하였다. 금 애종의 시신 절반과 금나라 황제의 의장기구와 옥새 등 보물을 가지고 돌아가면서 금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 단평입락 ===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 송 이종은 포로를 태묘에 바쳤지만 몽골은 하남 지방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후 남송의 조정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논하였지만, 사숭지를 비롯한 대부분이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정 분위기는 하남의 땅을 무력으로 되찾아야 한다는 분위기였고, 이종과 정청지는 이를 그대로 진행하였다. 단평 원년(1234년) 6월, 전자재의 선봉 부대가 개봉(開封)에 들어간 뒤 [[조규]]가 회동군의 주력군을 이끌고 변경으로 달려갔고, 급료가 없는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먼 길을 달려온 대오를 강제로 편제한 뒤에는 서민자(徐敏子)·양의(楊義)가 지휘하였고, 양초가 부족하자 조규는 각 군에게 5일분만을 가지고 출발하도록 강요하였다. 서민자가 군대를 통폐합해 낙양에 입성한 다음 날, 앞서 가지고 있던 5일 군량을 지난 8일 동안 다 먹자 송군은 "삿대 따고 밀가루로 떡을 만들어 먹는다"라고 했다. 이날 밤 양의 휘하 1만5000여 명이 용문까지 행군하다가 몽골군의 용장 유형안의 매복 공격을 받아 전멸했다. 용문 전투에서 서민자 부대는 일촉즉멸했고, 몽골군에게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사숭지와 사천제치사(四川制置使) 조언납이 누차 조정의 촉곡 명령을 무시하여 급료가 부족하자 송군은 낙양을 버리고 퇴각하였다. 그러자 송군이 3만 명 가까이 손실을 입었고, 삼경은 다시 빼앗겼고, 이후 해임당하였다. === 입조배상 === 단평 2년(1235년), 오고타이는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각각 강회(江淮)·형양(荊襄)·사천(四川)으로부터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다. 송 조정은 형양전구를 항전중점으로 하여 중병을 배치하고 당, 등 일대에 둔전비변(屯田備邊) 외에 맹공을 양양도통제로 삼아 정예병을 훈련시켜 번성, 신야(新野)와 당(唐), 등(鄧) 사이에 두었다. 몽골군은 송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좀처럼 국면을 타개하지 못했다. 단평 3년(1236년) 3월, 양양 주장(主將)인 왕민(王敏)은 양양(襄陽)을 몽골에 바치고 투항함으로써, 형양 내지 송정 전체에 지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정청지가 자리를 비웠고, 조정에서는 교행간을 재상으로 삼았다. 이때 이종은 화의를 성사시키려고 사숭지를 회서제치사로 임명해 전선에서 독전하게 하고, 사숭지는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악주에 도독부를 두어 전략적 요충지인 회서를 포기하고 화의를 주장하나, 다른 신하들에게 비난을 들었다. 이때 맹공은 임안 추밀원에 가서 아뢰자마자 몽고에서 장군 테무판을 보내 강릉을 침공하였고, 사숭지가 황주에 있자 사람을 보내 맹공에게 강릉 증원을 명령하였다. 맹공은 강릉으로 가서 몽고군 24진을 연파하고 포로로 잡힌 인구 2만 명을 탈환하여 강릉의 포위망을 풀었다. 사숭지는 가희 원년(1237년)에 화문각 학사로 승진했다. 가희 2년(1238년), 몽골 동로군이 광주(지금의 하남 황천)에서 복주(지금의 후베이 면양)로 내려왔다가 황주·치주·안경부를 공격하여 각지의 무장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사숭지가 맹공으로 강릉을 증원하게 하였고, 구온불화를 격퇴시켰다. 맹공은 용감하게 싸워 연승하여 양양 지역에서 남송의 불리한 형세를 반전시켜, 한때 여야가 흥분하였다. 맹공은 양번 지역의 방어를 중시하였다. >양번은 조정의 근본이니 방비를 강화해야 합니다. 그는 천자를 모집하고 군대를 확대 편성해 번성·신야·당·등 으로에 파병했다. 맹공을 경호제치사(京湖制置使)로 삼고, 그에게 영주(營州)·형문(荊門)을 부활시켜 강릉의 북면(北面) 장벽을 공고히 할 것을 명하였다. 가희 3년(1239년), 맹공이 출병해 3전 3승을 거두고 신양·번성·광화·양양을 차례로 탈환했다. 사숭지(史崇之)는 이종(理宗)에 의해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발탁되어 경호(京湖)와 강서군마(江西軍馬)를 독시하고 어주(漁州)를 개부(開府)하여 맹공이 연이어 이겼지만, 사숭지는 화의로 몽골군을 달래고자 하였다. 이 해 9월에는 화의(和議)를 이루지 못하고 몽골군이 수주와 사주(泗州) 등지를 공격하다가 진주에서 송군에게 밀렸다. 이윽고 팔십만이라 불리는 대군을 동원해 여주를 포위 공격해 강남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두고]]와 [[여개(남송)|여개]], [[오잠]]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실패했다. 이로써 또 한 번 이종의 영예를 얻었다. 몽고군은 물러가고 사신을 보내 남송의 항복을 유도했다. 이종은 또 금에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몽골에 화의를 요청하려 했고, 사숭지도 이에 맞장구를 쳤으나, 신료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이종은 사숭지의 견해와 일치하여 통호사를 파견하여 몽골군과 화해하였다. 가희 4년(1240년) 3월, 이종에 의해 임안으로 소환되어 우승상에 배향되고 추밀사(樞密使)와 도독(都督) 양회(兩淮) 사천경서호(四川京西湖) 북군마(北軍馬)를 겸하여 봉화군공(奉化郡公)에 진봉하여 다년간 사씨(史氏)의 진흥을 이루었다. 그는 전초강방(前草江防)을 계획하기 위해 강제로 어선을 모집하였다. 강식이 이를 반대했으나, 강릉주관으로 좌천당한다. 가희행정은 결국 교행간, 이종과 사숭지의 삼두마차 구도로 이어졌다. 교실지범(交失之範), 이실지협(李失之協), 사실지전(史失之專)이라는 평가가 나올 때였다. 순우 원년(1241년), 오고타이 칸이 병사하고 몽골의 송에 대한 화의가 멈추면서 전쟁도 일단락되었다. 사숭지는 교행간을 밀어내고 홀로 나라를 다스렸다. === 부친상을 당하다 === 순우 4년인 1243년, 사숭지의 부친 사미충이 죽었으나 사숭지는 관직에 물러났고 복직하려 했다. 이에 태학생들의 반발을 샀다. 이처럼 태학생들과 신료들은 사미원, 사숭지를 비롯한 사씨 일족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대해 불만이 있었지만, 사숭지는 [[맹공]]과 [[여개(남송)|여개]]가 항몽전선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종은 신하들의 반발을 못이겨 사숭지의 복직을 취소한다. === 죽음 === 사숭지는 어쩔 수 없이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주거지에 부제를 건설하고 인근에 운수벽(雲樹壁)·낚시대(魚臺)·삼계교(三溪橋)를 세워 한가로이 살았다. 이종(理宗)은 그동안 세 차례 사숭지의 복직을 원했으나[* 한 번은 순우(淳祐) 6년, 한 번은 순우(淳祐) 10년, 정청지(鄭淸之)는 얼마 남지 않았고, 다른 한 번은 보우(寶祐) 4년, 만년(晩年)에 촉(蜀)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때마다 거센 반발에 부딪혀 결실을 맺지 못해 사숭지는 13년을 유휴(遊休)하고 말았다. 보우 4년(1256년) 봄 관문전대학사(觀文殿大學士)에 서임되어 읍을 가봉하였다. 보우 5년 8월 27일(1257년 10월 6일), 예순아홉 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조정에서는 그를 소사(少師)·안덕군절도사(安德軍節度使)로 추증하고 노국공(魯國公)에 진봉하여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고, 가휘(家徽)로 '장숙(莊肅)'이라 고쳤다. 덕우(德祐, 1275년~1276년) 초년에 우정언(右正言) 서직방(徐直方)의 진언으로 인해 시호를 박탈당한다. == 주요 성과 == 사숭지의 제2차 경호방무 당시 모집한 사람이 32명이었는데, 동괴, 오잠은 후에 모두 현상으로 불렸다. 이들이 재상으로 오른 뒤 이후 경호 방어는 맹공, 사천 지역은 여개[* 사천 지역에 산성을 쌓음으로써 몽골군을 방어하고자 하였다. 그는 염진, 염박 형제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어성을 수축하는데, 이 조어성은 여개의 수하였던 왕견에 의해 수비가 더욱 강화되고, 1259년 몽케의 침공을 막아내며, 남송 멸망 2달 전 왕립이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가 담당하는데, 두 사람은 몽골 남침을 방어하는 전쟁에서 모두 공적이 컸다. == 평가 == >이종은 재위 40년 동안 대체로 초기에는 [[사미원]], 중기에는 [[정청지]], [[사숭지]], 후기에는 [[가사도]]에게 정권을 맡겼다. >---- >임서한 [[분류:1189년 출생]][[분류:1257년 사망]][[분류:송나라/인물]][[분류:닝보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