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師宜官 [[간체]]: 师宜官 [[병음]]: Shī yi guān (시이구안) 생몰년도 미상 [목차] == 개요 == [[후한]] 말의 서예가로 형주 남양군 사람. == 생애 == 미서(微書)[* 붓으로 특별히 작거나 크게 쓴 문자다.]를 사용한 최초의 미서가이며, 팔분[* 서체의 일종이다.]을 미서로 쓰는 것이 가장 뛰어났는데, [[영제(후한)|영제]]가 글씨를 좋아해 천하에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모두 홍도문으로 모이게 하면서 악송, 강람, 임지, 가포, 극검, [[양곡#s-2]] 등과 함께 있었다. 그 중에서 사의관의 글씨가 가장 좋았는데, 큰 것은 한 글자의 지름이 한 길, 작은 것은 1촌에 천 글자를 쓸 수 있었다. 큰 글자의 지름은 8자나 되고 가는 글씨는 터럭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이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어지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때때로 한 푼도 없이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다가 한바탕 글씨를 쓰면 사람들이 와서 그를 위해 술값을 지불했다고 하며, 술을 다 마시고 배불리 먹으면 그 글씨들을 모두 깎아내어 지우면서 나무 토막을 불태웠다. 동 시대의 서예가인 [[양곡#s-2]]보다 뛰어나 양곡이 그의 글씨를 배우고자 했지만 사의관은 성격이 오만했는데, 사의관이 술집에서 있는 것을 보고 벽에 나무판을 걸어뒀다가 그대로 술에 취해 나무판에 글씨를 쓰자 그대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후 [[원술]]의 장령이 되어 거록에 경구비를 세울 때 비문을 적었는데, 솜씨가 재치있고 교묘했다고 한다. 서위원예라는 것에서 그의 팔분서는 궁전의 화려함에 견줄만큼 빛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가 쓴 미서는 송나라 때 크게 발전했다. [각주] [[분류:후한의 인물]][[분류:중국의 서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