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라이베리아 대통령]][[분류:아프리카의 독재자]][[분류:1951년 출생]][[분류:1990년 사망]][[분류:그랜드게데 주 출신 인물]][[분류:총살형된 인물]][[분류:라이베리아의 군인]][[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무궁화대훈장 수훈자]][[분류:화폐의 인물]][[분류:군정]] [include(틀:역대 라이베리아 대통령)] ---- [include(틀:무궁화대훈장)]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17px-Samuel_Kanyon_Doe.jpg|width=100%]]}}}|| [목차] [clearfix] == 개요 == 새뮤얼 케니언 도(Samuel Kanyon Doe, 1951년 5월 6일 ~ 1990년 9월 9일) 라이베리아의 [[독재자]]이자, 수십만 명의 라이베리아인이 살해되고 수많은 라이베리아인들을 [[난민]]으로 만든 [[라이베리아]] 내전의 원인이 된 인물이다. 그리고 동시에 '''역사상 가장 잔인한 최후를 맞은 독재자''' 중 하나로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사람 앞에선 차우세스쿠도 온건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도 역시 행적상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으므로 자업자득이며, 실제로 그를 추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생애 == [[라이베리아]]의 21대 대통령으로 1980년 4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전임 대통령 [[윌리엄 톨버트]]를 [[사형]]시키고 라이베리아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통령에 올랐던 인물이다.[* 새뮤얼 도 이전까지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은 모두 미국계 라이베리아인이었다.] 쿠데타 당시 계급은 육군 '''[[상사(계급)|상사]]'''였으며, 그의 나이는 고작 '''만 28세'''였다.[* 다만 [[케냐]]에서는 도의 쿠데타 2년 뒤인 1982년에는 일등병이 [[1982년 케냐 쿠데타|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2000년에는 [[피지]]에서 무려 군 경력도 없는 일반인이 [[용병]]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둘 다 실패로 끝났다.][* 도보다 더 젊은 나이에 권력을 잡은 지도자는 [[북한]]의 [[김정은]](만 27세)와 [[아이티]]의 [[장클로드 뒤발리에]](만 '''19세''')도 있지만, 이들은 아버지([[김정일]]/[[프랑수아 뒤발리에]])의 권력을 세습받은 거라 자력으로 집권한 지도자 중에서는 사상 최연소 국가원수인 셈이다.] [[윌리엄 톨버트]]와 갈등이 많았던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격해서 대통령인 톨버트와 그의 지지자 26명을 처형하고, 뒤이어 10일 뒤인 1980년 4월 22일에는 이미 처형당한 전임 대통령 윌리엄 톨버트의 형이자 상원의장인 '프랭크 톨버트(Frank E. Tolbert)', 하원의장 '리차드 아브롬 헨리즈(Richard Abrom Henries)', 외무부 장관 '찰스 세실 데니스(Charles Cecil Dennis)' 등 톨버트 행정부 각료 13명을 공개적으로 사형시켰다.[* 처형된 톨버트 행정부 각료들은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나체로 벗겨진 채 모욕당하며 수도 몬로비아를 행진해야 했으며, 행진이 끝난 후 해변에서 공개 총살됐다고 한다.] 이와 함께 새뮤얼 도는 '민족구제위원회(People's Redemption Council)'라는 군부 통치기구를 세우고 헌법을 정지시켰으며,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딱 5년 간만 군사 통치를 한 뒤 1985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기로 발표하면서 라이베리아의 지도자로 올랐다.[* 라이베리아의 헌법이 정지된 상태이기에, 대통령직으로 지도자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민족구제위원회 의장(Chairman of the People's Redemption Council)' 자격으로 지도자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후 [[친미]] [[반공]] 정책을 펴면서 미국의 지지를 얻으면서 원조를 받아냈고 이를 바탕으로 어찌저찌 나라를 이끌고 갔으나, 정작 새뮤얼 도의 라이베리아 국내 권력 기반은 취약했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4년간 총 7차례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며, 그는 이 시도들을 모두 진압하기는 했으나 갈수록 의심이 많아지면서 억압 통치를 펼쳤으며 이에 동반하여 국내 경제 역시 악화되면서 민심을 잃어갔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민심을 잃은 계기가 바로 1985년 10월 15일에 실시한 대통령 선거였는데, 새뮤얼 도 본인이 약속했던 선거였으나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던 그는 대규모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하지만 부정선거를 행했음에도 50.9%라는 겨우 과반을 넘는 득표를 해서, 가까스로 대통령직에 당선됐다. 부정선거를 통해서 어떻게든 권력 유지에는 성공했으나 새뮤얼 도의 권력 기반은 여전히 불안했는데, 1985년 11월 12일에는 기오(Gio)족 출신으로 1980년 도의 쿠데타에 가담했던 '토머스 키옹파(Thomas Quiwonkpa)' 장군이 이끄는 기오족과 마노(Mano)족의 병사들이 도 정권에 반발하여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쿠데타는 실패하여 키옹파 및 사무엘 도 정권에 반기를 든 기오족과 마노족의 일원들은 11월 15일 처형되었다.[* 토머스 키옹파 장군은 처형 당시 고작 만 30살이었다.] 이제 믿을 사람이 없어진 새뮤얼 도는 1986년 1월 6일 대통령직에 취임한 이후 더더욱 강경한 강압 정책을 폈는데, 자신을 지지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부족들을 잔인하게 공격하고 탄압함과 함께 본인 부족 출신 사람들만 요직에 앉히면서 대내적으로는 전반적인 민심을 잃었다. 이를테면 도는 대통령직에 취임한 직후, 자신의 출신부족인 크란(Krahn)족만으로 구성된 [[라이베리아군]](AFL, Armed Forces of Liberia)을 기오족과 마노족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파병하여 쿠데타에 대한 보복으로 기오족과 마노족을 학살했는데 그 희생자만 약 3,000명 가량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탈냉전]]의 기조가 확대되면서 미국은 친미 반공을 내세우면서 막장 독재 정치를 펴는 새뮤얼 도에게 굳이 지지를 보낼 필요가 없어지게 됐기에 지지를 철회하고 라이베리아로의 원조를 줄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대외적인 새뮤얼 도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1989년 12월 24일 [[찰스 테일러(정치인)|찰스 테일러]]를 중심으로 규합한 반군 세력에 의해 [[내전]]이 발발하자 이미 민심을 잃은 상태였던 새뮤얼 도의 정권은 점점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고, 이에 정부군은 1990년 7월 29일에 발생한 '몬로비아 교회 학살 사건(Monrovia Church massacre)' 등을 일으키면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이후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이 사실상 새뮤얼 도를 포기해버렸고, 새뮤얼 도는 수도인 몬로비아를 포위한 반군에 맞서 대통령 관저에서 농성했지만 답이 없었다. 절망한 그는 주라이베리아 미국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한다. 1990년 8월 5일부터 [[미해병대]]에 의해 '샤프 엣지 작전'이 실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이미 라이베리아에 와 있던 상황이었는데,[* '샤프 엣지 작전(Operation Sharp Edge)'은 라이베리아 내전에 휘말린 미국 시민을 보호하고 대피시키기 위해 행해진 작전이었다.] 새뮤얼 도는 미군이 자신의 안전보장만 해주면 곧바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미대사관에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미 새뮤얼 도와 그의 정권을 버렸기에 그의 안전보장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정치적 부담을 떠안을 의사는 더욱 없었기에 그의 요청은 거절당한다. 한편 갈수록 상황이 막장으로 치닫자, 이에 1990년 8월,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는 라이베리아에 국제합동군인 '''ECOMOG'''[*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 모니터링 그룹, 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 Monitoring Group]을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이 파병 결정에는 몬로비아 교회 학살 사건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내전으로 인해 무너진 라이베리아 국내 질서를 회복시키고, 반군과 정부군 간의 휴전을 중재하며, 새뮤얼 도의 사임을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운명의 1990년 9월 9일, 수도 몬로비아에 ECOMOG가 세운 기지에 새뮤얼 도가 방문했다.[* 새뮤얼 도가 어째서 이날 ECOMOG의 기지를 방문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ECOMOG는 일종의 국제평화유지군인지라 수개 국가의 군대가 모였고, 군사 업무도 각국 군대가 교대로 행했는데 경비가 교대하는 동안의 혼잡한 틈을 타 자신의 부하였던 [[프린스 존슨]]이 설립한 '''INPEL'''[* 라이베리아 독립 애국 전선, Independent 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이 난입하여 새뮤얼 도의 경호병력과 ECOMOG를 제압하고 새뮤얼 도를 체포하여 INPEL의 진지로 압송했다.[* 이 제압 과정에서 새뮤얼 도의 경호병력 약 80명이 살해됐으나, ECOMOG의 인원은 INPEL의 지시에 잘 따랐기 때문에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고 전한다.] 프린스 존슨이 기다리던 INPEL의 진지로 연행된 새뮤얼 도는 심각한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도는 존슨에게 필사적으로 대화하고 싶다고 애원했지만, 존슨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부하에게 명령하여 '''12시간 동안 그의 귀와 발가락, 손가락을 잘라내는 가혹한 고문을 가했으며 그 후에 [[총살형]]에 처했다'''. 그리고 이 과정을 모조리 녹화해 전세계에 공개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yaLSzjfyUiA|영상(성인인증 필요)]] 남은 시체는 머리가 [[삭발]]되고 담뱃불로 화상을 입은 채로 먼로비아 거리에 [[나체]]로 전시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라이베리아]] 문서 참고. == 기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새뮤얼 케니언 도의 방한 당시 우표.jpg|width=100%]]}}} || || 그가 방문했을 당시 발행된 우표 || 1982년 5월 9일부터 13일까지 5일간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했다. 이때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를 수여하기도 했는데, 도는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다고 하며[* 새뮤얼 도는 정규교육을 고등학교까지만 받았다.] 이 이후 스스로를 '도 박사(Dr. Doe)'로 자칭했다고 한다. 당시 방한했을 때 [[유창순]] [[국무총리]]와 만난 자리는 [[http://ehistory.go.kr/page/pop/photo_pop.jsp?photo_PhotoID=3600&photo_PhotoSrcGBN=PT#n|여기]]를 참고하고, 내한 및 국립묘지 참배는 [[http://ehistory.go.kr/page/pop/photo_pop.jsp?photo_PhotoID=3590&photo_PhotoSrcGBN=PT#n|여기]]를 참고하길 바란다. [[파일:L$50.jpg]] [[라이베리아 달러|라이베리아 50달러]] 지폐의 인물이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라이베리아, version=627, paragraph=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