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000 {{{+2 샤를 보들레르}}} }}}''' [br] '''{{{#000 Charles Baudelaire }}}''' || ||<-3>{{{#!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샤를 보들레르.jpg|width=100%]]}}} || || {{{#000 '''본명'''}}} ||<-2>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Charles Pierre Baudelaire || ||<|2> {{{#000 '''출생'''}}} ||<-2>[[1821년]] [[4월 9일]] || ||<-2>[[부르봉 왕정복고|프랑스 왕국]] [[프랑스 파리|파리]] || ||<|2> {{{#000 '''사망'''}}} ||<-2>[[1867년]] [[8월 31일]] (향년 46세) || ||<-2>[[프랑스 제2제국|프랑스 제국]] 파리 || || {{{#000 '''국적'''}}} ||<-2>[include(틀:국기, 국명=프랑스)] || || {{{#000 '''직업'''}}} ||<-2>[[시인(문학)|시인]], [[비평가]], [[철학자]] || || {{{#000 '''서명'''}}} ||<-2>{{{#!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샤를 보들레르 서명.png|width=150]]}}} || ||<-3>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000000 '''묘소'''}}} ||<-2>몽파르나스 묘지 || || {{{#000 '''활동 기간'''}}} ||<-2>[[1844년|1844년 - ]][[1866년]] || || {{{#000 '''학력'''}}} ||<-2>Lycée Louis-le-Grand || || {{{#000 '''사조'''}}} ||<-2>[[상징주의]], [[모더니즘]], 퇴폐주의 || ||<|2> {{{#000 '''부모'''}}} ||<-2>^^'''아버지'''^^ 조제프 프랑수아 보들레르 {{{-2 (1759~1827)}}} || ||<-2>^^'''어머니'''^^ 카롤린 보들레르 {{{-2 (1793~1871)}}} || }}}}}}}}}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 출신의 [[시인(문학)|시인]], [[비평가]]. == 생애 == === 탄생과 유년 시절 === 1821년 프랑스 [[파리(프랑스)|파리]]에서, 조제프 프랑수아 보들레르와 카롤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제프는 본래 [[가톨릭]] [[사제]]였다가 [[환속]]하여 1797년 잔(Jeanne)이라는 여인과 결혼, 1805년 아들 클로드 알퐁스 보들레르(Claude Alphonse Baudelaire)를 낳았다. 그러나 잔은 1814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고, 조제프는 1819년에 60세의 나이로 26세의 [[고아]] 출신 처녀 카롤린을 후처로 맞이하여 2년 후 샤를을 낳았다. 조제프는 아마추어 [[화가]]로도 활동할 만큼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늦둥이]] 아들 샤를이 고작 6살일 때 사망했지만 샤를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제프가 사망한 후, 카롤린은 자크 오픽(Jacques Aupick) 육군중장과 재혼했다. 하지만 샤를은 의붓아버지 자크와 그리 친하지 못했다. 샤를은 리옹 왕립기숙학교를 거쳐 루이 루그랑 학교에 입학했으나, 사창가를 드나드는 등 방종한 품행으로 인해 퇴학당했다. 21살이 되어 물려받은[* 어머니 카롤린은 재혼으로 인해 상속권을 잃게 되었다. 샤를은 상속권이 있었으나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샤를 몫의 유산은 샤를이 성인이 될 때까지 보들레르 가의 친족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친아버지 조제프의 유산도 다 탕진하고 말았다. === 작품 · 비평 활동 === 『[[악의 꽃]]』을 출간하기 전, 미술비평 『1845년의 살롱』을 통해 비평가로 먼저 데뷔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보들레르는 포를 재조명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이다. 1848년에는 [[프랑스 2월 혁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1857년 『악의 꽃』 초판을 출간하였으나 외설성을 이유로 수록된 시 101편 중에 6편이 삭제되고, 보들레르는 벌금형을 받았다. 1861년 40여 편을 추가하여 2판을 냈다. === 말년 === 1866년부터 [[뇌졸중|우반신 마비]]와 [[실어증]]이 오기 시작했으며, [[요절|1867년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매독]]으로 인한 것이라고도 하고 [[고혈압]]에 의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내일이 없이 오늘만 사는 삶을 산 그의 라이프스타일로 볼 때에 46세까지 산 것만으로도 장한 일이다. 시신은 [[프랑스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다만 그의 시 한 구절은 [[보이저(탐사선)|보이저]]에 실린 [[골든 레코드]]에 낭송되어 지금도 [[우주]]를 여행 중이다. === 영향 === 그의 작품은 후대 [[상징주의]], [[유미주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 대표작품 == * 평론 『1845년의 살롱(Salon de 1845)』(1845) * 단편소설 『라 팡파를로(La Fanfarlo)』(1847) * 시집 『[[악의 꽃]](Les Fleurs du mal)』(1857) * 학술서 『인공낙원(Les [[낙원/기독교|Paradis]] artificiels)』(1860)[* [[마약]]을 통해 겪는 현상을 정리한 서적이다.] * 산문시 『파리의 우울(Le Spleen de Paris)』(1869) == 여담 == * 2차대전 시기 프랑스의 졸장 [[모리스 가믈랭]]의 별명이 "보들레르" 였는데, 이는 가믈랭 장군이 지휘나 명령을 할때마다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시적인 표현을 즐겨 써서 부하들을 곤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만큼 보들레르가 프랑스 내에서 대중적인 시인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뜻도 되겠다. * 영화 [[타짜 1|타짜]]에서 보들레르의 '''인생의 매력은 도박에 있다.''' 는 말이 사용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프랑스 2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 [[분류:프랑스의 시인]][[분류:프랑스의 평론가]][[분류:1821년 출생]][[분류:1867년 사망]][[분류:파리 출신 인물]] == 저서 == 《리하르트 바그너》(이충훈 역, 포노, 2019). 한국어판. 《Richard Wagner et Tannhäuser à Paris》(1861)를 한국어로 번역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