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명사)] ||<-2>
'''{{{+1 서광계}}}[br]徐光啓'''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서광계.png|width=100%]]}}} || || '''이름''' ||서광계(徐光啓) || || '''자''' ||자선(子先) || || '''호''' ||현호(玄扈) || ||<|2> '''출생''' ||[[1562년]] [[4월 24일]]|| ||[[명나라|대명]] [[안후이성|남직]][[장쑤성|예성]] [[쑹장구|송강부]] [[상하이|상해현]] || ||<|2> '''사망''' ||[[1633년]] [[11월 8일]](향년 71세) || ||[[명나라|대명]] [[베이징|북경 순천부]] || || '''국적''' ||[[파일:명나라 보.svg|width=22]] [[명나라|대명]]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attachment/서광계~1.jpg]] 흔히 알려진 사진[* 보면 알겠지만 배우 [[신구]]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관리. 자는 자선(子先). 세례명은 바오로. == 생애 == 군사/문화/종교/서양학 모두에서 활약한 다재다능한 인물로 [[16세기]] 말~[[17세기]] 초 당대 명나라의 엘리트 중에선 거의 먼치킨급이었던 [[이지조]] 및 양정균과 콤비를 이루었다. [[1600년]] [[마테오 리치]]로부터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 천문학 등 각종 서적을 번역했다. 《기하원본》, 《측량법의》, 《측량이동》, 《구고의》 등을 번역하고 역법을 배웠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중국 별자리 체계에 남반구 별자리 23개를 새로 추가하기도 했다. 또한, geometry를 지허(機何)로 음차해 '기하'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이 바로 서광계였다.] 천주교 사상을 통해 중국 유학을 보충하고, 불교를 바꿀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상을 전개해나갔다. [[1616년]] [[남경교안]] 당시 이를 막기 위해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나 결국 교안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연기를 시키고 천주교의 맥을 잇는 데는 성공하게 된다. 또한 [[홍이포]]의 위력을 알아본 후, [[네덜란드]]로부터 홍이포를 수입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서광계는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과의 인맥을 이용하여 [[마카오]]를 통해 30문의 홍이포를 수입했다. 그 중 11문은 천하의 요충지인 [[산해관]]에 설치했고, 나머지는 수도인 [[북경]]성에 설치했다. [[원숭환]]은 이후 [[영원성 전투]]에서 이 홍이포를 이용하여 후금의 대군을 박살냈다. 앞서 [[1619년]]에 일어난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은 작전 미스, 기후 불안 등의 2중 3중의 악재가 겹쳐 철저히 참패했다. 이를 계기로 서광계는 국방 체계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희종 [[천계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환관 [[위충현]]이 까는 바람에 관직을 집어치웠다. 그런데 영원성에서 단 11문의 홍이포가 맹활약하며 승리하자 홍이포의 위력이 명과 후금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숭정제]]가 즉위하고 나서 명나라는 홍이포의 대량 생산에 들어갔는데 서광계가 그 담당자를 맡았다. 이렇게 아담 샬의 도움을 받아 서광계가 첫 해에만 찍어낸 홍이포의 숫자가 '''무려 400문이었다.'''[* 비슷한 시기 지방 정부에서도 홍이포를 생산했는데 양광총독부에서만 무려 500문을 생산했다고 한다.] 서광계는 2차로 150문을 더 제작하여 성에 배치하고, 함선에도 배치했다. 그 외에도 상하이에 각종 복지 시설을 만들었다. 그리고 서광계는 이렇게 화포를 만들고, 복지 시설을 건립하다가 [[1633년]]에 71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당시 명나라는 1627년에 바로 이자성의 난(초기 시점)이 시작되었고 이 당시 기후적인 문제로 기근과 흉작이 계속 지속되었고 이것은 전 중국으로 휩쓴다. 또한 명청전쟁으로 급증한 군사비 재원을 충당하기위해 3향과 같은 부가세들을 더욱 걷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또 후금은 내몽골을 통해 우회하여 중국 북부지역에 주기적으로 침공해서 엄청난 약탈을 감행했었다. 서광계가 선종할 당시 망국의 조짐들이 곳곳에서 본격적으로 터지고 있을 때였다.] == 여담 == [[아담 샬]]을 명나라 조정에 천거해 흠천감 관직을 맡겼다. 후일 아담 샬은 청나라 때에도 계속 활동한다. 상하이 시의 한 구역 쉬자후이(徐家匯)는 그의 집안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쉬후이 구(徐匯區)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본인도 천주교인으로 유명했지만, 그의 손녀 캔디다도 유명했는데, 남편을 신자로 만든건 물론 전국 선교사마다 금 200냥씩을 나누어주고, 교당 수십여채를 지으며 130여권의 종교서적을 인쇄하는데 돈을 대기도 하며 수주등지에서 부유한 상인들과 공동으로 아동입양사업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먼 후손 중에서도 과거에 낙방하자 천주교당에 서기로 취업하여 한문에 서투른 서양 출신 선교사들의 조정 상주문 등 공문서 작성을 돕는 예가 있었을 정도로 아예 서광계 혼자만이 아닌 가문 전체가 천주교에 입교하고 천주교 신앙이 가풍처럼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는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선조가 배교를 선언했음에도 후손들이 몰래몰래 신앙을 이어가며 원복했을 정도이며, [[김해 김씨]]에서는 아예 복자 김진후 비오를 시조로 하는 천주교성인공파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 1607년 명대 과학자 서광계와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기하학 원론> 1~6권을 함께 번역하여 <기하원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서광계는 <기하원본>을 극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네 가지가 불필요하다. 첫째 의심, 둘째 추측, 셋째 검증, 넷째 수정이다. >또한 이 책은 네 가지가 불가능하다. 첫째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고, 둘째 반박할 수 도 없으며, 셋째 줄일 수도 없고, 넷째 앞뒤에 덧붙일 수도 없다. 서광계는 <기하학원론>을 완역하고자 했지만 마테오 리치가 1610년에 선종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언제 누가 대업을 이어갈 수 있을지 기다릴 뿐이라며 탄식했으나, 미완에 그친 기하원본은 [[사고전서]]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분류:1562년 출생]][[분류:1633년 사망]][[분류:명나라의 인물]][[분류:상하이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