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757년 출생]][[분류:1824년 사망]][[분류:대구 서씨]][[분류:조선의 문관]][[분류:영의정]][[분류:좌의정]][[분류:우의정]][[분류:이조판서]] [include(틀:역대 조선 영의정(순조-고종))] || '''{{{#f0ad73 서용보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순조-고종))] ---- [include(틀:노론)]}}}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0420, #b82642 20%, #b82642 80%, #960420)" '''[[영의정|{{{#fff 조선 영의정}}}]][br]익헌공(翼獻公)[br]{{{+1 서용보}}}[br]徐龍輔'''}}} || || '''출생''' ||[[1757년]]([[영조]] 33)|| || '''사망''' ||[[1824년]]([[순조]] 24)|| ||<|2> '''재임기간''' ||제220대 영의정|| ||[[1819년]] [[2월 19일]] - [[1820년]] [[7월 24일]][br]{{{-2 (음력 [[순조]] 19년 1월 25일 - 순조 20년 6월 15일)}}}|| || '''[[시호|{{{#fff 시호}}}]]''' ||익헌(翼獻)|| || '''[[본관|{{{#fff 본관}}}]]''' ||[[대구 서씨]][* 전첨공(典籤公) 경수(景需)파 22세 보(輔) 항렬]|| || '''[[자(이름)|{{{#fff 자}}}]]''' ||여중(汝中)|| || '''[[아호|{{{#fff 호}}}]]''' ||심재(心齋)|| || '''[[붕당|{{{#fff 붕당}}}]]''' ||[[노론]] (청명당, [[벽파]])|| || '''부모''' ||부친 - 서유령(徐有寧)[br]모친 - [[송(성씨)|진천 송씨]] 송의손(宋宜孫)의 딸|| || '''부인''' ||[[반남 박씨]] 박지원(朴志源)의 딸|| || '''자녀''' ||(양자) - 서대순(徐戴淳)[* 동생 서응보(徐應輔)의 아들]||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후기의 [[문신]]. [[고조#s-1.2|고조부]]가 [[정성왕후]]의 아버지인 달성부원군 [[서종제]]이다. == 생애 == [[영조]] 말기 1774년에 [[과거 제도#문과|문과]]에 급제해서[* 당시 한국나이로 18에 [[과거 시험]]에서 [[http://sillok.history.go.kr/id/kua_15011025_002|소과와 대과를 1년만에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조선)|정조]], [[순조]]시대에 주로 활동했다. 대사헌, 전라도관찰사, 경기도관찰사,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했다. 1819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1년 만에 병으로 사직하고 4년 뒤에 사망하였다. 최연소 우의정이었던 [[이덕형]]에는 못 미치지만 이쪽도 승진이 빨라서 44세에 우의정에 올랐다. 다만 후술하는 아버지 문제로 고향에 칩거해 있다가 영의정을 한참 늦게 달았고 이것 때문에 공백기간이 길어서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사임하였다. == 여담 == * 정조 초기에 [[정약용]]과 같이 일했는데, 1794년 경기도 관찰사 시절에 정약용이 암행어사로 가서 서용보의 비리를 고발하는 바람에 파직되어 사이가 틀어졌다는 썰이 있다. 실제로 1794년에 관찰사에서 물러난건 사실인데 실록에는 왜 물러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803028_001|업무 보고가 늦어서 문책 받은 기록은 남아있는데]] 시점상 정약용이 암행어사로 파견되기 몇달 전 이야기다. * [[일성록]]에는 좀 더 정확하게 나오는데, [[https://db.itkc.or.kr/dir/item?itemId=IT#/dir/node?dataId=ITKC_IT_V0_A18_11A_16A|정조 18년(1794년) 11월 16일 내용을 보면]] 이 시기에 경기도에 암행어사를 여러명을 풀었는데,[* 암행어사 중에 정약용이 끼어 있다.] 아래 수령들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 여담으로 경기도 관찰사에서 물러난 다음 관직이 정조의 화성행차 관련 업무를 맡던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812010_006|정리사(整理使)]]였다. * 경기도 관찰사 시절에 정조의 명으로 시흥로(현 [[경수대로]]의 전신)를 추진한 적이 있다. 본래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 참배를 위해서는 [[남태령]]으로 가야 하는데 남태령이 많이 험해서 우회로를 만든 것이 지금의 서울-안양-수원 루트의 길이다. 하지만 본인 재임 중에는 완성을 못했는데, 위의 정약용 건과 관련하여 [[이석우(1948)|이석우 전 남양주 시장]]이 [[https://www.fnnews.com/news/201802181042305307|잡설을 푼적이 있다.]] * 대중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서용보는 순조 초기에 우의정으로 고속승진을 했으나 졸기에 따르면 [[http://sillok.history.go.kr/id/kwa_12408021_001|우의정에서 영의정까지의 공백기간이 14년이나 된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서용보의 아버지인 서유녕이 [[정순왕후 김씨(조선)|정순왕후 김씨]]의 오빠인 [[김귀주]]를 [[http://sillok.history.go.kr/id/kwa_10609022_004|모함해서 귀양보냈다는 의혹]]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서용보 입장에선 매우 억울한게 김귀주 숙청의 배후는 다름아닌 [[정조(조선)|정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순왕후도 "배후가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 겁먹지 말고 복직하라"는 전교를 계속 내렸다. * 훗날 [[갑신정변]]에 가담한 [[서광범]]의 증조부이다.[* 정확히 따지면 서용보의 양아들이자 서응보의 친아들인 서대순의 손자가 서광범이므로, 서응보가 친증조부이겠지만 어쨌든 족보상으론 서용보가 증조부이다] *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39회에서 [[http://enews.imbc.com/News/RetrieveNewsInfo/284001|정약용의 라이벌로 조명되었다.]] 사실 라이벌이라고 해준 것도 아주 좋게 보인 것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그냥 정약용을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괴롭혔던 [[악역 영애물|악역 영식]](...) A 포지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