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載昌 [[1866년]] [[10월 29일]] ~ [[1884년]] [[12월 13일]] [목차] == 개요 ==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대구 서씨|대구]](大丘)[* 전첨공(典籤公) 경수(景需)파 26세 재(載) 항렬.]. [[개화파|급진개화파]]이며 독립유공자 [[서재필]]의 첫째 남동생이다. == 생애 == 1866년 10월 29일 [[충청도]] [[논산시|은진현]] [[연무읍|구자곡면]](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서 동복현감을 지낸 아버지 서광효(徐光孝, 1830. 8. 22 ~ 1884. 11. 2)[* 이후 서광언(徐光彦)으로 개명한 듯 하다. 1859년([[철종(조선)|철종]] 10) 증광시 생원시에 3등 17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59_033214|입격했는데]], 이때는 이름을 서광언으로 썼다.]와 어머니 [[성주 이씨]] 이조이(李召史, 1830 ~ 1885. 1. 12)[* 이기대(李箕大, 이명 이기래李箕來)의 딸이다.] 사이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족숙 서광래에 입양되었고, [[한성부]] 서부 사동(社洞)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21_12A_13A_00190|#]] 그는 형인 [[서재필]]과 함께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의 영향을 받아 개화 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개화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일본 토야마 육군 유년학교(戶山陸軍學校)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은 뒤 정6품의 품계를 받았으며, 무위영 별기군 작전관에 임명되었다. 1884년 우정국 개국 2개월 전에는 우정국 사사(司事)에 임명되어 우정국 개설 업무에도 관여하였다. 그러다가 2달 뒤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 [[이규완(1862)|이규완]], [[홍영식]], [[유혁로]], [[정난교]],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 대신들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삼일 천하로 끝나자 [[홍영식]], [[박영교]]는 죽고 그는 도망쳤다. 그러다가 결국 관군에게 붙잡혀 사형당하고 만다. 이때의 서재창의 나이는 고작 만으로 '''18세'''였다. == 후손 == * 유복자가 한 명 있었는데 서자였으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족보상으로는 사촌 동생 서재영(徐載榮, 1867. 10. 5 ~ 1922. 2. 24)의 차남 서찬석(徐灒錫, 1893. 11. 29 ~ 1979. 11. 21)이 사후 입양되었다. 서찬석은 서희원(徐希源, 1923. 2. 21 ~ 2004. 4. 7) 前 [[이화여자대학교]] [[법학과]] 교수의 아버지로, [[최순실]]의 여동생 [[최순천]]의 남편 서동범(徐東範, 1958. 3. 28 ~ )의 조부이다. [[분류:급진개화파]][[분류:조선의 관리]][[분류:조선의 군인]][[분류:논산시 출신 인물]][[분류:대구 서씨]][[분류:1866년 출생]][[분류:188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