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서재현.jpg]] [목차] [clearfix] == 개요 == [[1906년]] [[11월 15일]]~[[1999년]] [[7월 14일]]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이자 [[해군]] [[제독]].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서병호]]의 아들이자 [[서경석(목사)|서경석]]의 아버지이며 199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생애 == 서재현은 1906년 11월 15일 [[황해도]] [[장연군]]에서 서병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 서병호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고 [[상하이시|상해]] 인성학교에 다니며 1924년에는 소년회 회장을 맡아 "나라를 찾는데는 돈이냐 피냐"는 주제로 직접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5년에는 상해 [[퉁지대학|동제대학]]에 다니며 호강대학 학생들과 조계 경부국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학생들의 방면과 배외운동을 위한 동맹휴학을 이끌었다. 1931년에는 김석[* 독립운동가 김철의 조카이며 해방 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의 집에서 상하이한인독립운동청년동맹을 결성하였고, 1932년 1월 25일에는 김석, [[유진동]], [[김영재(1911)|김영재]] 등과 상하이한인청년당을 창당해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44년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을 지냈고, 해방 후 해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1952년 진해 해군공창장 부창장으로 충무공 [[이순신]] 동상 제작에 참여하였고, 1954년 2월 해군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해군 창설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박옥규]], [[신현준(군인)|신현준]]과 함께 [[6.25 전쟁]] 참전 공로로 [[그리스]] 자유훈장을 받았고, 해군공창장을 역임 기술 분야에서 근무하였다. 1957년 예편 직후 [[HD현대인프라코어|조선기계제작소]] 관리인으로 취임하였고, 1961년 2월 공민권제한 해당자에 포함되며 해임되었다. 1963년 공민권제한이 해제되었고, 조선기계제작소가 한국기계공업으로 재편되면서 사장인 [[김석범]]과 함께 부사장으로 근무하였고, 1966년 사단법인 한국주물기술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1년에는 [[강원산업그룹]] 계열사인 삼표제작소 대표로 취임하였다. 1994년 독립운동사료에 언급되면서 왜 포상신청을 하지 않느냐는 친구의 권유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서훈 당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404130020912501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4-04-13&officeId=00020&pageNo=25&printNo=22483&publishType=00010|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상하이한인청년당을 통해 독립자금 모금에 앞장섰으며, 월급 대부분을 독립운동자금에 들어갔다고 한다. 1999년 8월 30일 서울보훈병원에서 사망하였다. == 가족관계 == 할아버지 경조 서상우는 한국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명이며 집안 전체가 기독교 전래 초기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아버지 서병호는 독립운동가이자 경신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다. 아들 서경석은 목사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을 창설해 사무총장으로 활동하고 현재는 조선족 선교 및 [[북한이탈주민|탈북자]]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장연군 출신 인물]][[분류:1906년 출생]][[분류:199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