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고려 왕후)] ||<|2><:><#FEDC89>'''{{{#670000 시호}}}''' ||<#ffffff>고려사||<#ffffff>'''신헌선정태후(信獻宣靖太后)''' || ||<#ffffff>고려사절요||<#ffffff>'''정선태후(靖宣太后)''' || ||<-2><#FEDC89> '''{{{#670000 존호}}}''' ||<#ffffff>흥덕궁주 원비(興德宮主 元妃)[* 고려사에서는 궁호가 나오지 않으나, 이미 사망한 딸을 흥덕궁주로 추봉하였고 고려시대에 어머니와 어린 자녀가 궁호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신종 대 흥덕궁의 실소유주로 추정된다.][br]왕태후(王太后) / 황태후(皇太后)[br]태상황모(太上皇母) || ||<-2><#FEDC89> '''{{{#670000 관저}}}''' ||<#ffffff>흥덕궁(興德宮)[br]장추전(長秋殿) 경흥부(慶興府)[br]수복전(綏福殿) 응경부(膺慶府) || ||<-2><#FEDC89> '''{{{#670000 본관}}}''' ||<#ffffff>[[강릉 김씨]] || ||<-2><#FEDC89> '''{{{#670000 능호}}}''' ||<#ffffff>진릉(眞陵) || ||<-2><#FEDC89> '''{{{#670000 생몰연도}}}''' ||<#ffffff>? ~ [[1222년]] [[9월 23일]] ([[음력]] [[8월 17일]]) || ||<-2><#FEDC89> '''{{{#670000 부모}}}''' ||<#ffffff>부친 - [[강릉공]] 왕온(江陵公 王溫, {{{-3 ? ~ 1146)}}}) 모친 - [[강릉 김씨]] 김고(金沽)의 딸 || ||<-2><#FEDC89> '''{{{#670000 형제자매}}}''' ||<#ffffff>언니 - [[장경왕후(고려)|장경왕후]](莊敬王后) 언니 - [[대령후]] 왕경(大寧侯 王暻)의 부인 언니 - [[광정태후|의정왕후]](義靜王后) 남동생 - [[공화후]] 왕영(恭化候 王瑛, {{{-3 1126 ~ 1186}}}) 남동생 - 왕작(王鷟) || ||<-2><#FEDC89> '''{{{#670000 배우자}}}''' ||<#ffffff>[[신종(고려)|신종]](神宗) || ||<-2><#FEDC89> '''{{{#670000 자녀}}}''' ||<#ffffff>'''슬하 2남 2녀''' 장남 - [[희종(고려)|희종]](熙宗, {{{-3 1181 ~ 1237}}}) 차남 - [[양양공]] 왕서(襄陽公 王恕) 장녀 - 효회공주(孝懷公主, {{{-3 1183 ~ 1199}}}) 차녀 - 경녕궁주(敬寧宮主) || [목차] == 개요 == [[신종(고려)|신종]]의 왕후이자 [[희종(고려)|희종]]의 모후. [[안혜태후]]의 조모이다. == 가족관계 == 선정태후의 증조부는 [[문종(고려)|문종]] 왕휘, 조부는 [[조선국 양헌왕]] 왕도, 아버지는 [[강릉공]] 왕온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선정태후가 김씨를 따랐으므로 모계가 김씨 가문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자매로 [[장경왕후(고려)|장경왕후]], [[광정태후]]가 있다. [[인종(고려)|인종]]의 아들인 의종, 명종, 신종 삼형제가 왕온의 딸인 장경왕후, 광정태후, 선정태후 세 자매와 결혼한 것이다. 참고로 왕온의 둘째 딸도 인종의 차남 [[왕경|대령후]]와 혼인하였으며, 아들인 왕영은 인종의 딸 승경궁주와 결혼했다. ~~5겹사돈?~~ 고려 왕실 특유의 근친혼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남편과의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희종(고려)|희종]]과 [[양양공]] 왕서이며, 딸은 효회공주[* 종친인 하원공 왕춘과 혼인하였는데 신종 2년(1199)에 17세로 [[요절]]하였다. 이후 왕춘은 [[강종(고려)|강종]]과 사평왕후 이씨의 딸인 수령궁주와 재혼했다.]와 경녕궁주다. == 생애 == 신종이 [[황태제]]가 되기 전, 평량(平凉)[* 원 고구려의 평원군이었으며 신라의 북원소경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강원도]] [[원주시]]다.]의 공작일 때 결혼했다. 신종이 황태제가 된 후에 등극하자 궁주 원비에 봉해져 정식 왕후가 된다. 어떤 궁을 하사받았는지는 고려사에 나와있지 않은데 자신의 큰언니와 1년 전 죽은 자신의 딸이 살았었고, 희종이 즉위해 장추전으로 옮겨가자마자 최충헌이 소유하게 된 흥덕궁일 가능성이 있다. 늙은 남편이 [[태자]] 희종에게 양위하자 아들로부터 1204년 4월에 왕태후로 올려졌다. 18년 동안 [[태후]]로 존재했으며 중간에 아들 [[희종(고려)|희종]]이 [[최충헌]]을 죽이려다 실패하여 폐위되고, 조카 [[강종(고려)|강종]]이 등극했다가 [[고종(고려)|고종]]이 등극하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히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의 점잖은 모습을 보여주니,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222년에 사망하였으며 시호를 선정태후라 하고 이후 고종이 신헌(信獻)이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 [[고종(고려)|고종]]은 이규보를 시켜 선정태후를 기리는 시를 짓게 했다. 동국이상국전집 제 16권에 기록된 '왕태후 만사'가 바로 그 시인데, 선정태후가 생전에 태상황모(太上皇母) 존호를 받았다고 설명을 덧붙혔고 손녀가 [[안혜태후|왕후(王后)]], 아들이 [[희종(고려)|상황(上皇)]]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선정태후가 힘든 시절 정치에 관여하기보단 왕실 안정에 힘을 쓴 것을 찬양했다. == 마지막 시조 ==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은 양양공 왕서의 직계 후손이다. 양양공 왕서는 선정태후의 차남으로, 고려는 선정태후의 혈통으로 끝을 맺은 셈이다. == 시호 == 선정태후의 시호는 신종 靖효대왕과 靖 자 돌림이다. 그러나 고려사 기록 상으론 희한하게 신종 '정'효왕과 선'정'태후는 뒤의 시호를 맞췄다.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왕실은 [[시호]]를 맞출 때 보통 앞의 시호를 맞췄다. 선정태후의 자매들을 봐도 의종 '장'효왕과 '장'경왕후, 명종 '광'효왕과 '광'정태후 등 모두가 앞의 시호를 맞췄다. 고려사절요 제14권 희종 성효대왕엔 선정태후의 시호가 '''정선태후'''(靖宣太后)로 앞뒤가 바뀌어 있는데, 고려왕실이 모두 앞 시호를 돌림으로 썼다는 걸 감안하면 이 시호가 정확한 시호일 가능성이 더 높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127|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희종이 신종과 '''정화태후'''(靖和太后)의 아들이라고 나오는데, 정화태후라는 시호도 다른 왕후들의 시호 작명법과 같은 원리이나 어디서 근거하여 서술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분류:고려의 공주]][[분류:고려의 왕비]][[분류:122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