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410년 출생]][[분류:469년 사망]][[분류:하동 설씨]]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c143c 0%, #3f51ba 40%, #3f51ba 60%, #dc143c)" '''하동강왕(河東康王)[br]{{{+1 薛安都 | 설안도}}}''' }}} || || '''시호''' ||강(康) || || '''작호''' ||남향현후(南鄕縣侯) → 무창현후(武昌縣侯)[br]→ 하동군공(河東郡公) → 하동왕(河東王) || || '''성''' ||설(薛) || || '''이름''' ||안도(安都) || || '''자''' ||휴달(休達) || || '''출신''' ||하동군(河東郡) 분음현(汾陰縣) || || '''부친''' ||설광(薛廣) || || '''생몰''' ||410년 ~ 469년 || || '''국적''' ||[[북위]](北魏) → [[송(남조)|유송]](劉宋) → [[북위]](北魏)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송(남조)|유송]], [[북위]]의 장수로 자는 휴달(休達). 처음 북위에서 활약한 장수였으나 유송으로 망명했다가 반란을 일으켜 다시 북위로 망명한 인물이었다. 설안도의 집안은 하동군(河東郡) 분음현(汾陰縣)을 본관으로 하는 하동 설씨였다. == 생애 == === 초기 생애 === 설안도는 410년에 태어났다. 설안도의 아버지 설광(薛廣)은 [[무제(유송)|유유]]가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을 평정한 뒤 [[동진]]에서 상당태수(上黨太守)가 되었다. 설안도는 신장이 7척 8촌으로 어린 시절부터 용맹하다는 칭송을 받았고 궁술과 기마술에도 뛰어났으며, 협객들과 자주 교유해서 형들의 불만을 샀다. 설안도는 결국 형들과 분가하면서 집안의 재산을 단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는데, 설안도와 교유했던 이들이 앞다투어 설안도에게 옷이나 말 같은 것들을 보내주었다. 434년, 설안도는 진주자사(秦州刺史) 북하골(北賀汨)과 함께 북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백룡(白龍)을 토벌했고 전공을 세워서 옹진2주도통(雍秦二州都統)이 되었다. === 유송으로의 망명 === 444년, 북위의 [[태무제]] 탁발도가 [[유연 제국]]을 정벌하다가 패배하였다. 설안도는 이때 기회를 틈타 같은 집안 사람인 설영종(薛英宗)과 함께 거병하며 홍농(弘農)을 점령했다. 445년, 개오(蓋吳)가 거병하여 북위에 대항하자, 설안도는 개오와 연합했다. 그러나 태무제가 설영종을 토벌하여 설영종의 삼족을 멸하고 개오를 토벌하고자 진군하자, 설안도는 병력의 압도적 차이를 감안하여 결국 신영도(辛靈度) 등을 이끌고 홍농을 포기하고 유송으로 망명하였다. 설안도는 유송의 [[문제(유송)|문제 유의륭]]을 알현하여 북쪽으로 돌아가서 의병을 모을 것을 주청하였다. 문제는 설안도의 주청을 받아들여 설안도에게 비단을 하사하였다. 설안도는 다시 홍농으로 출병했으나 북위에서는 이미 홍농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을 함락하지 못했고 또한 개오의 반란도 이미 평정되었기 때문에 결국 상락(上洛)으로 퇴각했다. 무릉왕 유준이 양양에 진수할 때 설안도는 양무장군(揚武將軍), 북홍농태수(北弘農太守)로 임명되었으나 북위가 점차 강성해지면서 결국 양양으로 귀환했다. === 북벌 === 450년, 설안도는 수왕(隨王) [[유탄(유송)|유탄]]의 부름을 받아 건무장군(建武將軍)으로 임명되었고 유원경, 진무장군(振威將軍) 윤현조(尹顯祖), 분무장군(奮武將軍) 증방평(曾方平), 약양태수(略陽太守) 방법기와 함께 관협(關陝)을 향해 출병하였다. 이후 방법기 등은 여씨현(盧氏縣)을 함락하여 현령 이봉(李封)을 참수하고 조난(趙難)을 현령으로 삼았으며, 다시 홍농을 탈취하고 태수 이초고발(李初古拔)을 사로잡았다. 설안도는 홍농에 남았고 방법기는 [[동관]]을 향해 진군하였다. 설안도는 이후 윤현조와 함께 방법기에게 합류하여 섬성(陝城)을 포위했다. 북위에서 낙주자사(洛州刺吏) 장식연제(張是連提)을 원군으로 파견하자, 설안도 등은 섬성 남쪽에서 장식과 전투를 벌였는데, 북위의 기병들이 돌격해오자 유송의 군사들이 이를 당해내지 못했다. 설안도는 결국 분노해서 자신의 투구와 갑옷을 벗은 뒤 단기로 돌진하여 눈을 부릅뜨며 적진으로 돌격했는데, 이런 돌격을 4번이나 감행하면서 수많은 북위의 병사들을 죽였다. 그리고 날이 저물면서 북위에서 노원보(魯元保)가 함곡관(函谷關)을 따라 원군으로 도착하자 북위군은 후퇴했다. 유원경은 다시 부관인 유원호(柳元怙)에게 2,000명의 군사를 줘서 설안도를 구출하도록 명했는데, 이때 이미 밤이 되어서 북위의 군사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유송의 북벌군이 성의 남서쪽에 진을 쳤다. 이때 증방평이 설안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대적이 우리의 앞에 있고 견고한 성이 뒤에 있는으니 지금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격해야 할 때요. 경이 많약 진군하지 않으면 내가 마땅히 경을 죽일 것이요, 내가 만약 진군하지 않으면 경이 나를 죽이시오! >---- >자치통감 설안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소, 경의 말이 옳소! >---- >자치통감 설안도는 말을 마친 뒤 북위군과 교전을 벌였다. 유원호도 군대를 이끌어 남문에서 북을 치면서 진군했기에 북위군은 혼비백산했다. 설안도는 이때 직접 용명스럽게 출병하여 피가 흘러 팔꿈치가 굳고 사용하던 창이 부러질 정도로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분투해서 북위군을 물리쳤고, 장식연제를 포함한 3,000명의 군사들을 참수하였다. 나머지 병사들도 해자에 빠져 죽어서 살아남은 북위의 병사들은 2,000명에 불과했다. 설안도는 다시 섬성을 공격했는데, 이때 왕현모와 양탄이 패배하면서 조정에서는 유원경에게 퇴각을 명했다. 유원경은 설안도에게 후방의 차단을 명하고 군사들을 이끌어 양양으로 돌아갔다. 설안도는 양양으로 돌아와서 유탄의 행참군이 되었다. 452년, 설안도는 시흥왕(始興王) [[유준(유송)|유준]]의 행참군으로 임명되고 건무장군이 더해졌다. 노상이 호뢰관으로 출병하자, 설안도는 다시 유원경을 따라 북쪽으로 출병하여 곧바로 관성(關城)을 점령하고 함께 황하를 건너 포판(蒲坂)을 점령하기로 기약했는데, 노상이 후퇴하자 설안도는 다시 군사들을 이끌고 유원경을 따라 귀환하였다. 이후 설안도는 서양(西陽)으로 출병하여 오수만(五水蠻) 토벌하였다. === 효무제 ~ 전폐제 재위기 === 453년, 유의륭의 태자 [[유소(유송)|유소]]가 유의륭을 살해하고 제위에 오르자, 무릉왕 유준이 유소를 토벌하고자 거병하였다. 설안도는 참군사(參軍事)로 전임되고 영삭장군(寧朔將軍)이 더해졌으며, 기마병들을 거느리고 유원경과 함께 출발하였다. 주작항(朱雀航)에 도착한 설안도는 눈을 부릅뜨며 적장 황보안민(皇甫安民) 등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역적이 임금을 시해했는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역적의 편을 드는 것인가? 이후 무릉왕 유준이 신정(新亭)에서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4대 황제인 [[효무제(유송)|효무제]]였다. 설안도는 효무제가 즉위한 뒤 우군장군(右軍將軍)으로 제수되었다. 이후 기병들을 거느리고 남문으로 진공하여 장질과 태극전에서 합류한 뒤 유소를 사로잡았다. 유소가 처형된 뒤 설안도는 남향현남(南鄉縣男)에 봉해지고 식읍 500호를 받았다. 이후 설안도는 엄격함과 강직함으로 인해 면직되었다. 454년, 설안도는 다시 좌군장군(左軍將軍)으로 제수되었다. 2월에 들어 노상, 장질, 유의선이 효무제에 대항하여 거병하였다. 설안도는 이때 용종복야(冗從僕射) 호자반(胡子反), 용양장군(龍驤將軍) [[종월]]과 함께 보병과 기병을 거느려 역양(歷陽)을 수비하였다. 한편 노상이 부하 정덕현(鄭德玄)을 대현(大峴)으로 파견했고 정덕현이 양호(楊胡)를 선봉으로 삼고 역양으로 보내자, 설안도는 종월과 역양군태수 정천조(程天祚)를 파견하여 양호를 격파했고 양호와 양호의 軍副를 참수하였다. 정덕현이 다시 사마(司馬) 양엄(梁嚴)을 보내자, 설안도의 부하인 주문공(周文恭)이 새벽에 정찰을 마친 뒤 양엄을 습격하여 모두 사로잡았다. 효무제는 설안도에게 300명의 군사들을 역양에 남기도록 명했고, 설안도는 강을 건너 채석기로 돌아와 보국장군(輔國將軍), 경릉내사(竟陵內史)가 되었다. 4월에 들어 노상은 아우인 노유(魯瑜)에게 3,000명의 군사를 줘서 소현(小峴)으로 파견했고 자신도 대군을 이끌고 대현을 점령하였다. 설안도는 8,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건너 역양태수 장유서(張幼緖) 등과 함께 노상을 토벌하고자 출전하였다. 그리고 장유서가 물러나자 설안도도 역양으로 물러났다. 한편 장질이 오랫동안 진군하지 않자, 조정에서는 심경지를 원군으로 파견했다. 한편 노상은 군량과 마초가 부족해지자 군사들을 이끌고 후퇴하기 시작하여 스스로 후방을 차단했으며, 심경지는 설안도에게 그들을 추격하도록 명했다. 설안도의 부장인 담금이 노상의 군영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는 못했다. 설안도는 노상의 진영을 바라본 뒤 말을 달렸다. 이때 노상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가 설안도의 창에 찔려서 땅바닥에 떨어졌고 설안도의 부하인 범쌍(范雙)이 노상을 참수하였다. 노상은 당대의 맹장으로 진법을 숙련하여 [[만인지적]]으로 칭송받았던 장수였는데, 설안도가 단기로 노상을 참수하고 돌아오니 당시 사람들은 [[관우]]가 [[안량]]을 벤 것도 이것만큼 낫지 못하다고 이야기했다. 설안도는 이때의 공적으로 작위가 후로 올라갔다. 한편 왕현모가 양산(梁山)에서 유의선과 장질을 막고 있었는데, 설안도는 다시 기병을 거느려 왕현모와 합류했다. 반군은 무호(蕪湖)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설안도는 부하인 여흥수(呂興壽)에게 수십 명의 기병을 줘서 반군의 진영을 습격하도록 명했다. 유의선이 유담지(劉湛之)와 장질을 보내 왕현모를 습격하자, 왕현모는 군사들에게 반격을 명하는 한편 설안도에게 기병들을 거느려 반군의 진영 우측을 돌파하도록 명했다. 설안도는 담금이 3번이나 적의 진영으로 돌격한 틈을 이용해 기병들에게 돌격을 명했고 장수들이 뒤이어 공격했다. 다음날 아침, 반군의 기병들이 무호를 출발하려고 했으나 설안도의 기병이 많은 것을 보고는 결국 산 속으로 숨어서 감히 나오지 못했다. 설안도는 적진의 동남쪽을 공격하여 반군을 대파하였고 설안도의 부하인 유원유(劉元儒)가 유담지를 참수하였다. 설안도는 태자좌위솔(太子左衛率)로 전임되었다. 457년, [[북위]]의 군대가 무염(無鹽)을 침공하여 동평태수(東平太守) 유호가 이를 막고자 출병했으나 실패했다. 효무제는 설안도에게 기병을 거느려 북쪽으로 향하게 했고 동양태수(東陽太守) 심법계(沈法系)에게 보내 수군을 거느려 팽성(彭城)으로 향하게 했으며, 모두 서주자사(徐州刺史) 신탄(申坦)의 절도를 받게 하였다. 출병하기 직전, 효무제가 설안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군이 따라잡을 수 있다면 힘껏 그들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미 돌아갔다면 황하를 건너서 위세를 떨치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팽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북위군은 철군해서 신탄은 조정에 임진(任榛)이라는 도적 집단을 토벌할 것을 상주했다. 설안도는 활대로부터 좌성(左城)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말머리를 돌렸다. 설안도는 동방성(東坊城)에 이르러 임진의 기병 3명을 만났는데, 1명은 사로잡았지만 2명은 결국 놓쳤다. 보고를 받은 임진의 도적들은 모두 달아났다. 게다가 당시 가뭄으로 인해 하천이 대부분 말랐고 말과 병사들도 지쳐서 멀리 추격하지는 못했으며, 설안도와 심법계는 모두 면직되었고 신탄은 상방(尙方)에 수감되었다. 458년, 복직하여 무창현후(武昌縣侯)로 개봉되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다. 463년, 설안도는 다시 정로장군(征虜將軍)이 더해졌고 10년 동안 태자좌위솔을 맡았지만 끝내 전임되지 않았다. 전폐제가 즉위한 뒤 설안도는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옮겼고 급사중(給事中)이 더해졌다. 465년, 사지절(使持節), 도독연주제군사(都督兗州諸軍事), 전장군(前將軍), 연주자사로 전출되었다가 의양왕(義陽王) [[유창(북위)|유창]]을 대신하여 도독서주예주양군제군사(都督徐州豫州梁郡諸軍事), 평북장군(平北將軍), 서주자사가 되었다. === 유자훈의 난 === 465년, 유자업이 수적지에게 살해당하고 상동왕 유욱이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5대 황제인 [[명제(유송)|명제]]였다. 설안도는 안북장군(安北將軍)으로 진호되었으나 명령을 받지 않았고 진안왕(晉安王) 유자훈을 지지하고자 거병했다. 당시 설안도의 조카 설색아와 유광세(柳光世)가 모두 건강에 있었는데, 설안도는 이들에게 서신을 보내 빨리 건강에서 벗어나라고 재촉했다. 설안도의 서신을 받은 유광세와 설색아는 설안도의 가솔들을 데리고 건강에서 벗어나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청주자사(青州刺史) 심문수, 기주자사(冀州刺史) 최도고가 모두 거병했으며, 심문수는 유미지(劉彌之), 장영경(張靈慶), 최승선(崔僧琁)을 파견했고 최도고는 아들 최경미(崔景徵)와 부영월(傅靈越)을 파견하여 설안도에게 호응하였다. 한편 제음태수(濟陰太守) 신천(申闡)이 휴릉성(睢陵城)에서 조정에 호응하자, 설색아는 부영월 등을 이끌고 신천을 공격하였다. 설안도는 배조륭(裴祖隆)에게 하비의 수비를 명했다. 이때 유미지가 하비에 이르러 마음을 바꾸고 조정에 투항하여 배조륭을 습격하자, 최승선은 유미지에게 동조하지 않고 설안도에게 동조하였다. 설색아는 유미지의 배반에 대해서 듣고는 하비로 향하여 유미지를 참수하였다. === 다시 북위로 === 유자훈의 난이 평정된 뒤 설안도는 별가종사사(別駕從事史) 필중애(畢衆愛)와 하비태수 왕환(王煥) 등을 보내 [[명제(유송)|명제]]에게 투항할 뜻을 밝혔다. 설색아가 죽은 뒤 설색아의 명으로 하비에 주둔했던 유광세 또한 투항하였다. 명제는 사방이 이미 평정되었기에 회북(淮外)에 위세를 드러내고자 장영과 심유지에게 대군을 이끌고 설안도를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채흥종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안도가 귀순한 것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므로 단지 서신 한 통만 보내면 됩니다. 지금 대군을 이끌고 설안도를 맞이하게 한다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할 것이며, 혹여 북쪽의 오랑캐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재앙이 끝없을 것입니다. 만약 반역죄가 중해서 그를 주벌하지 않을 수 없다면 이전에 사면했던 이들 또한 이미 많기 때문에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물며 설안도는 外據大鎮 변경과 밀접하게 접하고 地險兵強 공격하든 포위하든 함락하기 어려우며, 考之國計,尤宜馴養, 설안도가 만약 배반한다면 장차 정사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명제는 채흥종의 간언을 따르지 않았고 다시 정북사마 소도성과의 사이에 다음의 대화가 오갔다. >명제: 내가 지금 북쪽을 토벌하려고 하는데 경의 의견은 어떠한가? >소도성: 설안도는 매우 교활하니 지금 군대를 이끌고 설안도를 핍박하는 것은 아마 나라에 해를 끼칠 것입니다. >명제: 군대의 사기가 맹렬하고 예기가 한창 성해서 가는 곳마다 승리했다! 경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 설안도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이미 귀순했는데 명제가 대군을 보낸 것은 자신의 죄를 물으려는 것이라 생각해서 두려워하다가 북위로 다시 사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설안도의 사신을 접견한 북위의 [[헌문제]] 탁발홍은 곧바로 대신들을 소집했다. 이때 대신들은 헌문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세조황제께서는 항상 유의륭을 멸할 뜻이 있으셨기 때문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강포(江浦)로 향하려고 하셨습니다. 지금 강남이 혼란에 빠지고 내외가 유욱을 배반하고 있는데, 설안도가 지금 항복을 청한 것은 천재일우의 다시 얻기 어려운 기회이니, 어지러운 나라를 쳐서 빼앗고 멸망하려는 나라를 업신여겨 침략할 기회는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헌문제가 대신들의 의견에 동의하던 그때 설안도는 자신의 아들인 설도차(薛道次)를 조정에 인질로 보내고 이부(李敷) 등에게 서신을 보냈다. 북위에서는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박릉공(博陵公) 울원(尉元)과 성양공(城陽公) 공백공(孔伯恭) 등에게 1만의 기병을 줘서 설안도에게 보냈다. 또한 설안도를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서남북연청기5주예주양군제군사(都督徐南北兗青冀五州豫州梁郡諸軍事),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서주자사로 삼고 하동군공(河東郡公)의 작위를 내렸다. 그러나 울원 등이 팽성에 도착한 뒤 설안도는 다시 속으로 북위에 투항한 것을 후회하여 울원 등을 도모한 뒤 다시 유송에 투항하려고 했다. 하지만 울원이 이를 알게 되자, 설안도는 울원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사위인 배조륭에게 죄를 덮어씌워서 배조륭을 죽였다. 장영과 심유지는 결국 달아났고, 설안도는 도망치는 유송군을 추격하여 여량(呂梁) 동쪽에서 유송군을 대파하였다. 설안도는 468년, 평성에서 헌문제를 알현하여 후한 대우를 받았고 설안도의 형제와 조카들은 모두 후작에 봉해졌다. 이후 469년에 사망하여 가황월(假黃鉞), 진주자사(秦州刺史), 하동왕(河東王)으로 추증되고 강(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