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세르게이 디아길레프}}}[br]Sergei Diaghilev'''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Dyagilev_SP.jpg|width=100%]]}}} || || '''본명'''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댜길레프[br]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Дя́гилев[* 러시아어에서 я는 사실 ya에 해당하는 모음이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자면 '댜길레프'가 올바르다.][br]Sergei Pavlovich Diaghilev|| ||<|2> '''출생''' ||[[1872년]] [[3월 31일]]|| ||[[러시아 제국]] [[노브고로드]] || ||<|2> '''사망''' ||[[1929년]] [[8월 19일]] (향년 57세) || ||[[이탈리아 왕국]] [[베네치아]]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러시아)] || || '''직업''' ||[[프로듀서]], [[사업가]] || || '''서명''' ||[[파일:Sergei_Diaghilev_signature.svg|width=200&bgcolor=#fff]] || [목차] [clearfix] == 개요 == [[러시아]]의 [[발레]] [[프로듀서]]이자 무대미술가. 20세기 초 발레 뤼스라는 발레단으로 [[유럽]]을 평정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유명한 음악가로부터 곡을 의뢰해 엄선된 발레 작품을 선보였고 러시아 출신 전설적인 무용수들이 알려지게 된다.발레단 발레 뤼스(Ballets Russes)를 창단하여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런던]], [[파리(프랑스)|파리]], [[뉴욕]] 등지에서 작품을 발표했다. == 상세 ==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훗날 음악으로 꿈을 바꾸어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졸업하였다.[* 그를 가르쳤던 스승인 [[러시아 5인조]]의 거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재능이 없다며 음악세계로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디아길레프는 음악가가 되는 대신 연출가로 큰 성공을 거뒀고, 훗날 스승의 작품인 <[[세헤라자데]]> 등을 파리로 가지고 가 환호를 받았다.] 1898년 [[잡지]] 『예술세계』를 발행했는데 훗날 이 잡지는 러시아판 [[아르누보]] 운동을 상징하는 잡지가 된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져 후원이 중단될 때까지 예술세계를 발행했다.] '예술세계'의 성공 덕분에 190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마린스키 극장]]의 특별고문이 됐으나 낙하산이라는 비난 속에 1년만에 사직해야 했다. 1908년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러시아 음악가 살리아핀과 함께 [[무소륵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공연했고 그 후 본격적으로 발레를 전문으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1909년 5월 18일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러시아 발레를 소개하기 위해 디아길레프는 [[모스크바]] 최고의 무용수 35명을 이끌고 첫 공연을 했다.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디아길레프는 파리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 일회성으로 끝날 수 있었던 팀을 발레단 '발레 뤼스'로 정식 창단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allets-russes-1400x650.jpg|width=100%]]}}} || || '''발레단 '발레 뤼스(Ballets Russes)'''' || 그 후에도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을 기용해 <세헤라자데>, <불새> 등의 작품을 런던, 파리 등 다양한 곳에서 발표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디아길레프는 해외에 머물렀다. 새로운 [[소비에트]] 정권은 그를 [[부르주아]] 퇴폐의 특히 교활한 예로 디아길레프를 비난했다. 이 영향으로 소련 미술 사학자들은 60년 넘게 예술에서 그를 언급하지 않았다. 1929년 57세의 나이로 [[베네치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발레 뤼스도 사라졌다. == 기타 == * 엉뚱한 면이 많아 평생 [[검은 고양이]]를 무서워했고, [[결벽증]]이 심했으며, 심지어 물에 빠져 죽을까봐 바다 여행도 싫어했다. * [[동성애자]]였다. 그는 서구에서 처음으로 공인된 [[게이]]였는데, 유명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 문제로 감옥살이를 한지 얼마 안 됐을 때라는 것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당시 발레 뤼스가 유럽 사회에 워낙 센세이션을 일으킨 덕분이다. * 서유럽권에서는 처음 공인되었을 수도 있지만, 러시아에서는 이미 유명한 성소수자였다. 의외로 러시아는 서유럽권과는 독립적인 문화권을 형성한 덕에 교회법은 몰라도, 세속에서는 성소수자들을 그닥 차별하지 않았다. 그러다 [[표트르 대제]]부터 성소수자들에 대한 처벌을 법률화하고 [[니콜라이 1세]] 시기에 이를 더욱 강화했으나, 이는 점점 [[사문화]]되어 황족과 귀족 성소수자들의 경우에는 별다른 차별이나 제한 없이 마음껏 활동했다.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친구이며 극우파였던 블라디미르 메시체르스키 공은 차르 전제정을 옹호하고 자유주의 세력들을 공격해준 덕에 현재 기준으로 봐도 난잡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음에도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가 크게 총애하고 보호해줬을 정도였다. * 물론 [[성소수자]]란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지만, 디아길레프는 나이 차이가 매우 많이 나는 어린 남자들(심지어 미성년자도 있었다)과 주로 교제했던지라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불편한 면모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연인들 중 가장 유명한 니진스키가 18살 연하였는데 이게 '디아길레프의 연인' 중에서는 나이 차이가 굉장히 적은 편일 정도이며 무려 30세 이상 차이 나는 [[미성년자]]와 육체적 관계를 가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는 성소수자가 아니었다(나중에 여자와 결혼했다). 성공을 대가로 성적 착취를 했다고도 볼 수 있으며 특히 니진스키의 사례가 그러했다. * 반대로, 그의 연인들이 육체적 매력과 미모를 이용해 일부러 디아길레프에게 접근한 다음, 그의 총애를 얻어내어 발레계와 예술계에서 큰 성취를 얻어내고는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그를 버리고 떠났다는 주장도 있다. * 그의 일생을 다룬 창작물로는 [[뮤지컬]] <[[디아길레프(뮤지컬)|디아길레프]]>가 있다. 국내 [[창작 뮤지컬]]이다. <[[니진스키(뮤지컬)|니진스키]]>의 자매작이기도 하다. == 발레 뤼스의 예술가 == 출저: The Great Composers Their lives and times === 음악가 === *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디아길레프가 그의 사후 [[세헤라자데]]를 편곡해서 공연했다.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불새]], [[페트로슈카]], [[봄의 제전]] *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 [[마누엘 데 파야]] === 무용수 === * [[바슬라프 니진스키]] * [[타마라 카르사비나]] *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 니진스키의 누이 * [[안나 파블로바]] * 크쳬신크스카야 * 리디아 로포코바 * 레오니데 마신 * 올가 스페시베체바 * 조지 발란신 === 디자이너, 미술가 === *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re_Benois|알렉산드르 브누아]] * 레온 박스트: 의상 디자이너 * 레리히 * [[파블로 피카소]]: 무대 디자인, 포스터 등 * 앙드레 드랭 * 마리 로랑생 * 조르주 브라크 * [[코코 샤넬]] [[분류:러시아 제국/인물]][[분류:러시아의 프로듀서]][[분류:1872년 출생]][[분류:1929년 사망]][[분류:노브고로드주 출신 인물]][[분류:러시아의 게이]][[분류: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