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소련 영화 감독]][[분류:1898년 출생]][[분류:1948년 사망]][[분류:유대계 러시아인]][[분류:노보데비치 묘지 안장자]][[분류:민중예술가]][[분류:우크라이나계 유대인]][[분류: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분류:스웨덴계 유대인]][[분류:스웨덴계 러시아인]][[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심장마비로 죽은 인물]]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1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예이젠시테인}}}'''[br]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Эйзенштейн[br]Sergei Mikhailovich Eisenstein[* [[러시아어]]의 로마자 표기 기준 Sergey Mikhaylovich Eyzenshtey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5px-Sergei_Eisenstein_03.jpg|width=100%]]}}} || ||<|2> '''출생''' ||[[1898년]] [[1월 22일]][* 그레고리력 기준 1898년 1월 10일] || ||[[러시아 제국]] 리보니아 주 [[리가]][br](現 [[라트비아 공화국]] 리가) || ||<|2> '''사망''' ||[[1948년]] [[2월 11일]] (50세)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br](現 [[러시아 연방]]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 || '''안장''' ||노보데비치 묘지 || || '''배우자''' ||페라 아타셰바 (Pera Atasheva, 1934년 혼인) || || '''직업''' ||[[시나리오 작가]][br][[영화 감독]][br]영화 이론학자[br]영화 편집자 || || '''활동 기간''' ||[[1923년|1923]] ~ [[1946년]] || || '''주요 서훈''' ||[[레닌훈장]][br]소련 명예훈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소련]]의 [[영화 감독]]. [[1898년]] [[1월 22일]] 당시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라트비아]] [[리가]]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건축기사였다. == 생애 == [[영어]]도 잘해 [[미국]] [[할리우드]]와도 인연이 있었다. 할리우드 초기 발전을 이끈 인물이었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메리 픽포드]]도 《[[전함 포템킨]]》을 보고 감명을 받아 예이젠시테인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할리우드에 초청받아 미국에 가기도 했는데, 이 당시 찍은 사진으로 [[찰리 채플린]]과 [[테니스]]를 치는 사진이 있는 등 화려한 인맥을 쌓기도 했다. [[월트 디즈니]]와도 친분이 있었다. 다만 나중에는 할리우드에 대해 좋은 시설과 장비가 있으면서도 [[서부극]] 같은 (시시한) 것밖에 못 찍는다는 식의 비판을 하기도 했다. 예이젠시테인의 미국 경험이 그닥 좋게 안 끝난 것도 있고, 미국에 넘어가서 야심차게 촬영하던 영화 <¡Que viva México!>의 스케쥴이 질질 끌리고 비자 문제 등이 꼬이면서 결국 포기하고 돌아왔고, 30년대 소비에트 연방에서 '''미국인들과 친분'''이 있다는 것은 주요 숙청감이었다. 이로 인해 30년대는 예이젠시테인에게 있어서 최악의 암흑기였다. 이 시기의 예이젠시테인은 방만한 촬영으로 인해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경향을 자주 보였었는데, 이게 결국 소비에트 연방에서 대참사로 번진다.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 계획하던 <베진 초원(Бежин луг)>이 2년간 200만 [[소련 루블|금루블]] 이상이라는 거금을 잡아먹었고, 간신히 완성한 직후엔 [[소련 장관회의|소비에트 연방의 인민위원회의]]가 계급투쟁보단 기독교적 선악의 투쟁에 가까운 내러티브를 문제삼아 내린 상영 중지명령 때문에 결국 엎어졌다. 그 때문에 당시 소련 영화계의 총책임자였던 보리스 슈먀츠키가 2년 뒤에 총살당하는 등 수많은 영화인들이 죽거나 [[굴라크]]로 끌려갔다. 다행히도 스탈린이 예이젠시테인의 영화들을 마음에 들어해서 <베진 초원> 사태를 예이젠시테인보단 그를 관리 감독해야 할 상급자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으면 예이젠시테인 본인부터가 총살당했을 판이었다. 예이젠시테인이 스탈린에게 한 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한 끝에 만든게 <[[알렉산드르 넵스키]]>였고, 이 작품이 완성도 높게 잘 만들어지면서 예이젠시테인은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훗날 《이반 뇌제》 1부를 만들 때는 출세하지만, 2부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몰락한다.[* 마지막 장면에만 의도적으로 독일 표현주의식 조명을 사용해 공포감을 극대화했고 컬러로 촬영해 폭군의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사실 스탈린에 대한 풍자는 1부에서부터 만들어 놓았으나, 스탈린이 1부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2부의 제작은 장려했다고 한다. 2부에 대한 악평도 사실은 자신의 풍자보다는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취향에 안 맞아서라고...]] [[다큐멘터리]] 영화 [[알마아타]]에서의 에이젠슈테인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어찌 되었든 스탈린의 악평 탓에 3부의 제작은 좌초되고 남은 필름들이 파괴되었으며, 2부는 스탈린이 격하된 1958년이 되기 전까지 개봉조차 하지 못했다. [[1948년]] [[2월 11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후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 기타 == 한국에도 알려진 에이젠슈테인 감독의 대표작으로는 《[[전함 포템킨]]》, 《[[이반 4세|이반 뇌제]]》, 《[[알렉산드르 넵스키]]》 등이 있으나, 당연하게도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영화인 만큼 한때는 들여오는 것 자체를 금하던 시절이 있었다. 유명한 감독이지만 그가 감독한 작품 자체는 열 편이 채 안 된다. 결혼 이력이 있기는 하지만 일기에서 관련 기록이 발견되는 등 여러 행적으로 미뤄보아 러시아에서는 제정시대 이래 소련을 거쳐 현대까지도 금기시되는 [[동성애자]]였다는 의혹이 있다. [[표트르 차이콥스키]]처럼 역사가들도 [[반박불가]]라 여기는 정도는 아니라 영화 공부하는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는 편이다. 러시아 외의 국가에서 나온 전기를 찾아보면 동성애 의혹을 조심스럽게나마 소개하기도 한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영화화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스타일을 채용할 예정이었다고.] 하지만 예이젠시테인 시대 소련의 정치적 상황 등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했다. 훗날, 독일의 영화감독인 알렉산더 클루게는 이 시도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작품을 따로 창작하기도 했다. 예이젠시테인이 자본론의 영화화를 위해 노력하던 시기에 쓴 작품 노트가 2020년 국내에도 정발되어 있다. 제목은 《〈자본〉에 대한 노트》. == 작품 목록 == * 글루모프의 일기(Дневник Глумова, 1923, 단편) * 파업(Стачка, 1925) * [[전함 포템킨]](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 1925) * [[10월]](Октябрь «Десять дней, которые потрясли мир», 1927) * 일반 노선: 낡은 것과 새 것(Старое и новое «Генеральная линия», 1929) * 감상적인 로맨스(Romance sentimentale, 1930)[* [[프랑스어]] 영화이다.] * 베진 초원(Бежин луг, 1937)[* 미완성작. 원본 필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폭격으로 소실되었고, 촬영 중 ~~하도 방만하게 촬영하느라~~ 남은 B컷들과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나중에 재구성한 버전들이 일부 존재한다.] * [[알렉산드르 넵스키]](Александр Невский, 1938) * 이반 뇌제 1부(Иван Грозный 1-я серия, 1944) * 이반 뇌제 2부(Иван Грозный 2-я серия,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