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800080> {{{#ffffff {{{+3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 노빌리오르''' }}}[br]{{{-1 [[라틴어]]: Servius Fulvius Paetinus Nobilior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조부)[br][[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아버지)[br]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아들)[br][[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기원전 189년 집정관)|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손자) || ||<#800080> {{{#ffffff '''참전''' }}} ||[[제1차 포에니 전쟁]]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55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만리우스 불소 롱구스]][br][[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800080> {{{#ffffff '''동기''' }}}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기원전 255년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800080> {{{#ffffff '''후임''' }}} || [[스키피오 아시나]][br][[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기원전 4세기 중반에 투스쿨룸에서 로마로 이주한 뒤 집정관을 연이어 배출한 [[노빌레스]] 가문인 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조부 마르쿠스는 기원전 299년 집정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파이티누스]]일 것으로 추정되며, 아버지 마르쿠스는 이름 외에 알려진 바 없다. 기원전 255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기원전 255년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오르기 이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두 집정관은 전년도 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가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완패한 뒤 살아남은 로마군 장병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맡고 300척 또는 350척의 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해안으로 향했다. 그들은 도중에 코수라 섬[* 현재 판탈레리아 섬. 시칠리아에서 남서쪽으로 100km 떨어져 있고 튀니지 해안에서 동쪽으로 60km 떨어진 섬이다.]을 점령한 뒤 아스피스로 향했다. 카르타고 해군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200척의 퀸퀘레메를 동원했다. 양측은 아스피스 북쪽의 헤르마이움 곶 앞바다에서 맞붙었다. 해전의 양상은 거의 전해지지 않으나, 카르타고 함대가 해안에 몰린 뒤 로마군이 [[코르부스]]를 통해 적선을 옮짝달싹 못하게 한 후 단숨에 올라타서 제압했다는 이야기는 전해진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카르타고 전선 16척이 침몰하고 114척이 노획되었다고 한다. 로마군의 손실은 거의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카르타고 해군이 [[에크노무스 해전]]의 참상으로 인해 경험 많은 선원들을 많이 잃어서 로마군을 저지하기는 역부족이었으리라 추정한다. 노빌리오르와 파울루스는 적 해군을 격파하고 아스피스에 도착하여 생존병들과 합류한 뒤 인근 일대를 대거 약탈하여 식량을 확보한 후 이탈리아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 해 7월 중순 카마리나와 시칠리아 남동쪽 모퉁이인 파사로 곶 사이의 해상에서 폭풍을 만났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두 집정관은 폭풍이 밀어닥치는 상황에 겁을 집어먹고 전 함대에 해안가로 어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경험많은 선원들은 이런 상황에서는 해안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안전하다고 주장했지만 집정관들이 이를 묵살해버렸고, 결국 수많은 배들이 암초에 걸려 가라앉았다고 한다. 폴리비오스의 기록에 따르면 총 464척의 전선 중 384척이 침몰했으며, 300척의 수송선도 손실되었고, 10만 명 이상의 인력이 바닷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두 집정관은 목숨을 건져 얼마 남지 않은 생존병과 함께 귀환한 뒤 헤르노마이움 해전 당시 확보한 적선의 뱃머리를 전리품 삼아 기원전 254년 1월 [[개선식]]을 거행했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원로원은 카마리나 참사를 두 집정관의 오판보다는 자연재해로 간주했기에 개선식을 허락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또한 이후로 코르부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볼 때, 코르부스 때문에 피해가 더 많이 났다고 판단한 로마군이 코르부스를 더이상 쓰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아들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는 이름만 언급되었을 뿐 행적은 알려진 바 없으며, 손자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기원전 189년 집정관)|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는 기원전 189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