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조선 문종의 후궁 소용 정씨, rd1=소용 정씨(문종))] [include(틀:조선의 후궁(중종 ~ 고종))]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광해군의 후궁[br]{{{+1 소용 정씨 | 昭容 鄭氏}}}'''}}} || || '''출생''' ||[[1596년]][*출처 서치상. (2020). 광해·인조 연간의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 상량문 연구. 건축역사연구, 29(1), 65-76.] || ||<|2> '''사망''' ||[[1623년]] [[4월 12일]] (향년 27세) || ||[[조선]] [[한성부]] [[창덕궁]][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서울)|율곡로]] 99)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 ||'''{{{#ffd400 조선 소용}}}''' || ||[[1616년]] 이전 ~ [[1623년]] [[4월 12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동래 정씨]] || || '''부모''' ||부친 정상헌(鄭象獻) || || '''형제자매''' ||정지산(鄭之産)[* 생년이 불명이라 오빠인지 남동생인지 알 수가 없다. 몰년은 광해 9년인 1617년이다.] || || '''배우자''' ||[[광해군]] || || '''봉작''' ||'''소용(昭容)'''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광해군]]의 [[후궁]]. 아버지는 정상헌(鄭象獻)이다. 조부는 어모장군 정순경(鄭純褧)이고, 증조부는 중추부 판사 정사룡(鄭士龍)이다.[* 정사룡은 [[중종(조선)|중종]] 대부터 [[명종(조선)|명종]] 대에 이르기까지 활동한 문신으로 시문·음률에 뛰어났고 글씨에도 능해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처첩 문제로 탄핵 받았고, 재물을 탐하고 사치스러워 사람들도 더럽게 여긴다고 비판을 들었던 인물이다. ][* 그래서 《인조실록》에서 정씨를 가리켜 '정사룡(鄭士龍)의 서손녀'라고 부르는데, 정사룡은 [[중종(조선)|중종]] 시대의 [[영의정]] [[정광필]]의 조카이다. ] 그러나 그녀를 낳아준 어머니는 정상헌의 천첩(賤妾)이었으므로 본래 천출이다. [[오빠]]로 정지산(鄭之産)이 있다.[* 《[[광해군일기]]》와 《[[인조실록]]》을 보면 정지산이 소용 정씨의 오빠(娚)라고 나온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801027_007|#]][[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9014_001|#]]] == 생애 == 정씨가 언제 광해군의 후궁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616년(광해군 8년)에 정지산을 후궁의 오라비라고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801027_007|칭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그 이전에 후궁 첩지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이 끝까지 사랑하며 함께 거처한 자는 임씨(任氏)·정씨(鄭氏) 두 소용(昭容)과 김 상궁(金尙宮)·이 상궁(李尙宮) 등 4, 5명이었는데, 임씨는 자색(姿色)이 있고 아첨을 잘 부림으로 총애를 받았고 '''정씨는 교태를 잘 부리고 일에 익숙하여 출입하는 문서를 관리하여 임금을 대신하여 계하(啓下)하였으므로 왕이 배로 믿었다'''. 그리고 김 상궁은 기교(奇巧)로써 사랑을 받았는데 이 3명이 후궁에서 으뜸이었다. >---- >《[[광해군일기]]》 광해군 9년 10월 21일 정씨는 광해군의 신임을 받아 후궁 중 으뜸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 덕분에 동복남매인 정지산은 [[빙고#s-4|빙고]]를 관리하는 종5품 별좌(別坐)에 제수되었다. 또한, 1617년(광해 9)에는 정지산이 [[임해군]]의 첩 환어사(喚御史)를 체포하는 등 공을 세우자 품계를 올려주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뇌물을 바쳐 집이 시장처럼 분주하였다고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09002_004|한다.]] 정지산은 누이 덕분에 권세를 누렸으나 이해 10월 21일에 사망하였다. 이는 정지산이 빙고 별좌로 부임한 지 1년 9개월 만의 일이다. 이때도 광해군은 그를 '[[계축옥사|계축년]]의 공신으로 삼았어야 하는 자'라고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910021_002|말하면서]] 특별히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라고 하여 비판받았다. 1623년(광해 15)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소용 정씨는 반정 당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대중매체에서 == * [[2013 전설의 고향#s-2/2013 전설의 고향]]에 등장했다. [[분류:조선의 후궁]][[분류:1596년 출생]][[분류:1623년 사망]][[분류:동래 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