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797년 출생]][[분류:1881년 사망]][[분류:뉴욕 시 출신 인물]][[분류:미국의 인권운동가]][[분류:미국의 작가]][[분류:노예/인물]][[분류:노예폐지론자]] [include(틀: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include(틀:스미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2>
'''{{{+1 소저너 트루스}}}[br]Sojourner Truth''' || ||<-2><#fff,#1f2023>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IE002466863_PHT.jpg|width=100%]]}}} || ||<|2> '''출생''' ||[[1797년]]경|| ||[[미합중국]] [[뉴욕 주]] [[뉴욕 시]] || ||<|2> '''사망''' ||[[1881년]] [[11월 26일]] (향년 약 86세) || ||[[미합중국]] [[미시간 주]] 배틀크리크 || || '''국적''' ||[[파일:미국 국기.svg|width=28]] [[미국]] || || '''부모''' ||제임스, 엘리자베스 바움프리 || || '''직업''' ||흑인/여성 인권운동가, 노예, 작가 || [목차] == 개요 == 소저너 트루스는 [[흑인]]/[[여성]] 인권 운동가인 이사벨라 바움프리가 1843년부터 개명된 이름이다. == 생애 == >여러분, 이렇게 야단법석인 곳에는 뭔가 정상이 아닌 게 있음이 틀림없어요. 내 생각에는 남부의 [[검둥이]]와 북부의 여성 모두가 권리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 그 사이에서 [[백인]] 남성들이 곧 곤경에 빠지겠군요. 그런데 여기서 얘기되고 있는 건 전부 뭐죠? 저기 저 남성이 말하는군요. 여성은 탈것으로 모셔 드려야 하고, 도랑은 안아서 건너드려야 하고, 어디에서나 최고 좋은 자리를 드려야 한다고. 아무도 내게는 그런 적 없어요. 나는 탈것으로 모셔진 적도, 진흙구덩이를 지나도록 도움을 받은 적도, 무슨 좋은 자리를 받아본 적도 없어요.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날 봐요! 내 팔을 보라구요! 나는 땅을 갈고, 곡식을 심고, 수확을 해왔어요. 그리고 어떤 남성도 날 앞서지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나는 남성만큼 일할 수 있었고, 먹을 게 있을 땐 남성만큼 먹을 수 있었어요. 남성 만큼이나 채찍질을 견뎌내기도 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난 5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 대부분 노예로 팔리는 걸 지켜봤어요. 내가 어미의 슬픔으로 울부짖을 때 그리스도 말고는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이런 일을 사람들이 머리와 관련해 얘기할 때 뭐라고 부르죠? 맞아요. 지성이 여성의 권리나 흑인의 권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거죠? 나의 잔이 1파인트도 담지 못하고, 당신의 잔이 2파인트를 담고 있는데, 당신은 내 보잘 것 없는 절반 크기의 잔을 채우지 못하게 할만큼 야비하지는 않겠지요? 저기 검은 옷을 입은 작은 남자가 말하네요. 여성은 남성만큼의 권리를 가질 수 없다고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요! 당신들의 그리스도는 어디서 왔죠? 어디서 왔느냐고요? 하나님과 여성으로부터 왔잖아요! 남성은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죠. 하나님이 만든 최초의 여성이 혼자서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만큼 강했다면, 이 여성들이 함께 세상을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지금 여성들이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게 더 좋을 겁니다. 내 말을 들어야만 해요. 이제 늙은 소저너는 더 이상 할 말 없어요. - 오하이오 여성권리 집회에서 한 그녀의 연설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인가> 1797년경 트루스는 하든버그 장군의 노예였던 제임스 바움프리와 엘리자베스 바움프리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태어났을때의 이름은 이사벨라 바움프리였다. 하든버그의 영토는 스와트킬이라는 네덜란드 이름으로 불리는 언덕에 있었는데, 이곳은 에소퍼스에서 북쪽으로 153km 떨어진곳이었다. 하든버그 장군이 사망하자, 하든버그 장군의 아들이었던 찰스 하든버그는 아버지의 부동산중 일부와 함께 바움프리 가족의 소유권을 상속받는다. 1806년 찰스 하든버그가 죽은 이후로, 트루스는 경매에 부쳐졌다. 당시 그녀는 9살이었으며 100달러에 한 떼의 양들과 함께 [[뉴욕]] [[킹스턴]] 근처에 사는 존 닐리에게 팔렸다. 트루스는 이때부터 영어를 할줄 알게된다. 트루스는 닐리에게서 많은 고난을 당했으며, 트루스는 훗날 닐리를 몽둥이 묶음으로 트루스를 구타하는 잔인하고 냉혹한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닐리는 1808년, 포트 어윈의 술집 주인 마티너스 슈라이버에게 트루스를 105달러에 팔았고, 슈라비너는 트루스를 18개월 동안 소유하였다. 1810년 슈라이버는 뉴욕 웨스트 파크의 존 듀몬트에게 그를 175달러에 팔았다. 듀몬트의 아내는 수많은 방법으로 트루스를 괴롭혀 트루스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었다. 1815년 경, 트루스는 이웃 농장에서 로버트라는 이름의 노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로버트의 주인인 캐틀린은 이 관계를 금지하였다. 자신의 노예가 다른 사람의 노예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지면, 그 아이는 자신의 노예가 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주인에게서 잔인하게 구타당하여 사망한다. 1817년 트루스는 듀몬트의 강요로 나이가 더 많은 토마스라는 노예와 결혼을 하였고, 트루스는 다섯 명의 자식을 낳았다. 1826년 말, 트루스는 자신의 갓난아기 딸 소피아를 데리고 자유를 찾아 탈출하였다. 1839년에는, 트루스의 아들 피터가 "존 오브 낸터켓"이라는 이름의 포경선에서 일하게 되었다. 1840년에서 1841년까지, 그는 그로부터 세 장의 편지를 받았다 (세 번째 편지에는 그가 지금까지 편지를 다섯 번 보냈다고 언급되어있다). 그 배가 1842년에 항구로 돌아왔을 때, 피터는 거기에 타고 있지 않았으며 트루스는 다시는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1843년 6월 1일, 트루스는 자신의 이름을 “소저너 트루스”(진실에 머무르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개명하고, 그녀의 친구들에게 말하였다. 트루스는 1851년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연설을 오하이오 여성권 집회에서 하였다[* 연설의 내용은 상술함]. 트루스는 1883년 11월 26일 배틀 크리크의 그의 집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배틀 크리크의 오크힐 공동 묘지의 그의 가족들과 함께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