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c499 0%, #00c499 40%, #ff003f 60%, #ff003f)" '''{{{#ece5b6 소량의 망명 황족[br]{{{+1 蕭正表 | 소정표}}}}}}''' }}} || || '''{{{#ece5b6 시호}}}''' ||소열(昭烈) || || '''{{{#ece5b6 작호}}}''' ||봉산현(封山縣) 개국후(開國侯)[br] → 난릉군(蘭陵郡) 개국공(開國公), 오군왕(吳郡王) || || '''{{{#ece5b6 성}}}''' ||소(蕭) || || '''{{{#ece5b6 이름}}}''' ||정표(正表) || || '''{{{#ece5b6 자}}}''' ||공의(公儀) || || '''{{{#ece5b6 부친}}}''' ||[[소굉]](蕭宏) || || '''{{{#ece5b6 출생}}}''' ||508년 ~ 550년 || || '''{{{#ece5b6 국적}}}''' ||[[양(남조)|양]](梁) → [[동위]](東魏)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북조시대]]의 인물로, [[동위]]로 망명한 [[양(남조)|소량]]의 황족 출신이다. 자는 공의(公儀). == 생애 == 소정표는 양나라의 추존 황제인 태조 [[소순지]]의 손자이자, 임천왕(臨川王) 소굉(蕭宏)의 아들로 508년에 태어났다. 신장은 7척 9촌으로 탁 트인 얼굴로 용모가 준수하였지만 어리석은 성격이었다. 처음에 소정표는 [[무제(양)|양무제]]의 시기에 봉산현(封山縣) 개국후(開國侯)로 책봉되어 식읍 1천 호를 받았으며, 급사중으로 임명되고 동궁세마, 회남진안2군 태수를 역임하였으며, 경거장군, 북서주 자사를 지내고 종리(鍾離)에 진수하였다. 양무제가 아들이 없어서 소정표의 형인 [[소정덕]]을 양자로 삼았는데, 뒤에 아들인 [[소통(양나라)|소통]]이 태어나자 소정덕은 양무제로부터 소외되었고, 양나라가 건국된 뒤 서풍후로 책봉되었다. 소정덕은 [[북위]]로 망명하였지만 북위에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양나라로 돌아왔는데 양무제는 여기에 대한 죄를 묻지 않고 그를 임하왕으로 책봉한다. 훗날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소정덕이 후경에게 가담하였고, 소정덕이 후경으로부터 황제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소정표는 군량이 모이지 않았다는 구실을 대고 진군하지 않았다. 후경이 소정표를 남연주 자사로 삼고 남군왕으로 책봉하자, 소정표는 구양(歐陽)에 울타리를 세워서 양무제에게 파견할 원군을 차단시켰다. 또한 소정표는 시첩의 오빠인 공자명(龔子明)을 파견하여 광릉을 습격하였으나, 남연주 자사인 남강왕(南康王) 소회리(蕭會理)가 유원(劉瑗)을 파견하여 공자명을 격퇴한다. 결국 거점을 상실한 소정표는 종리로 달아난다. 549년, 소정표는 아들을 인질로 보내 [[동위]]로 귀순한다. 이에 동위의 서주 자사인 고귀언(高歸彦)이 장사인 유사영(劉士榮)을 파견하여 소정표를 맞이하였고, 소정표는 입조한 뒤 난릉군(蘭陵郡) 개국공(開國公), 오군왕(吳郡王)으로 책봉되고 식읍 5천 호를 받았다. 곧이어 소정표는 시중, 거기장군, 특진, 태자태보, 개부의동삼사로 제수되었고, 얼마 안 있어서 사망하였다. 소정표는 사후 시중, 사지절, 도독서양연예제5주제군사(都督徐揚兗豫濟五州諸軍事), 표기대장군, 사공공으로 추증되었고 작호를 그대로 하였으며, 소열(昭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508년 출생]][[분류:550년 사망]][[분류:양(남조)/황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