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중국의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F51BA 0%, #3F51BA 20%, #3F51BA 80%, #3F51BA)" {{{#ece5b6 '''유송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송(남조))] ---- }}}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13E88 0%, #3F51BA 20%, #3F51BA 80%, #313E88); color: #ece5b6" '''{{{+2 송}}}[br]宋 | Song Dynasty'''}}} || ||<-3>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북위-유송.png|width=100%]]}}} || ||<-3><#ece5b6> {{{#3F51BA {{{-2 지도의 회색 부분 (440년 기준)}}} }}} || ||<-3> '''420년 ~ 479년''' || ||<-2>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2><:>'''[[동진|{{{#ECE5B6 동진}}}]]'''||<:>'''[[제(남조)|{{{#ECE5B6 남제}}}]]'''|| || '''별칭''' ||<-2>'''유송'''(劉宋), 전송(前宋), 남송(南宋) || || '''위치''' ||<-2>[[중국]] [[강남(중국)|화남]], [[베트남]] 북부 || || '''수도''' ||<-2>[[난징시|건강]](建康) || || '''인구''' ||<-2>4,680,000명 {{{-2 (468년 기준)}}} || || '''민족''' ||<-2>[[한족]] || || '''언어''' ||<-2>[[중고한어|중세 남방 중국어]], [[한문]] || || '''문자''' ||<-2>[[한자]] || || '''종교''' ||<-2>[[대승 불교]], [[유교]], [[도교]] || || '''화폐''' ||<-2>사수(四銖), 효건(孝建) || || '''정치체계''' ||<-2>[[군주제]] || || '''국가원수''' ||<-2>[[황제]] || || '''국성''' ||<-2>[[유(성씨)|팽성 유씨]] || || '''주요 황제''' ||<-2>{{{#!folding [ 펼치기 · 접기 ] [[무제(유송)|고조 무황제]] {{{-2 (420년 ~ 422년)}}}[br][[문제(유송)|태조 문황제]] {{{-2 (424년 ~ 453년)}}}[br][[효무제(유송)|세조 효무제]] {{{-2 (453년 ~ 464년)}}}}}} || || '''현재 국가''' ||<-2>[include(틀:국기, 국명=중국)][br][include(틀:국기, 국명=베트남)] {{{-2 (일부)}}}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의 국가 중 하나로 420년 [[동진]](東晉)의 무관이었던 [[무제(유송)|유유]](劉裕)가 선양을 받아 이룩한 왕조다. 유(劉)씨의 [[한나라]]를 조(曹)씨의 [[위(삼국시대)|위나라]]가 멸망시키고, 그 위나라를 사마(司馬)씨의 [[진(사마씨)|진나라]]가 멸망시켰는데 그 진나라를 다시 한나라의 후손인 유송이 멸망시켰다. 대체로 10세기에서 13세기까지 존속한 인지도 높은 통일 제국 [[북송|송나라]]가 있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 왕족의 성을 붙여 유송(劉宋), 간혹 동송(東宋)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유송의 영역 중 북위의 영역과 겹치는 부분을 뺀 것이 실제 영토라고 보면 된다. 육조 시대 왕조들 가운데서는 영토가 가장 넓었다. [[남조#s-1.1|남조]]의 하나로 [[오(삼국시대)|손오]]-동진-'''송'''-[[제(육조)|제]]-[[양(육조)|양]]-[[진(육조)|진]](陳)을 [[육조시대]]라고도 부른다. == 역사 == 건국 군주 유유는 정치적인 이유로 동진 및 전조에서 시작된 [[촉한정통론]]을 강하게 부각시켜 스스로를 한의 후계자로 인식되고자 했다. 다만 촉한의 직접적인 계승을 주장한 것은 아니며, 포괄적인 한 왕조의 계승을 주장했다. 유비는 한경제의 아들 중산정왕의 후손이며 유유는 한고조 유방의 동생 초왕 유교의 먼 방계 후손이다. 그는 선양 받기 이전에 이미 장수로서 북벌을 통해 [[황하]] 이남의 상당한 영토를 획득했다. 대략 [[하북]]을 제외한 중원 대부분이라고 보면 좋다. 후한 식으로 따지면 [[청주(중국)|청주]], [[서주]], [[연주(중국)|연주]], [[예주]] 정도. 일시적으로 낙양,장안을 점령하며 사예주까지 획득하기도 했다. [[시안(도시)|장안]]은 유유가 북벌 중 함락시키며 근거지를 둔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후진을 깨트리는 데 공을 세운 [[왕진악]]과 [[심전자]]가 서로의 갈등으로 인해 죽었고 후진의 강역을 빼앗겼으며, 유유의 아들인 [[유의진]]이 백성을 괴롭혀 민심이 떠나자 그 틈을 노린 [[북하]]의 [[혁련발발]]이 쳐들어와서 [[관중]] 일대를 모두 빼앗겼다. [[낙양]]은 장안에 비해 점령에 성공한 편이지만 그 점유는 10년을 못 넘는다. 그래도 지도에서 [[낙양]]을 함락시킨 [[북위]]의 공세 일부를 저지시키면서 [[산둥반도]](청주)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게 눈에 띈다. 유독 기괴스런 폭군이 많았던 왕조다. 특히 후임 황제들 뿐만 아니라 황제가 되지 못한 황족들 역시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나마 장수한 무제를 제외하면 소제, 문제, 전폐제, 후폐제, 순제는 젊은 나이에 살해당했고 효무제와 명제는 비록 병사했지만 오래 살지 못했다. 게다가 이 둘의 대는 후대에 모두 끊긴다. 이런 리더십의 부재 때문에 창업 군주가 넓힌 영토를 [[북위]]에게 많이 빼앗겼다. 그러나 3대 황제 유의륭은 괜찮았다. 유의륭은 내정을 잘해서 '원가의 치'로 불리는 전성기를 구가한 명군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아들 교육이 엉망이었다. 서자인 아들도 아닌 '태자' [[유소(유송)|유소]]와 차남 [[유준(유송)|유준]]에게 죽는 전례없는 일을 당했다. 운 나쁘게 당한 것도 아니고 두 아들이 개막장 짓을 해서 본인도 태자를 폐하고 아들을 죽일 생각을 하다 시간만 질질 끌며 머뭇거렸는데 그러다 그 소식이 유소와 유준에게 새어나가 선빵맞고 당한 것이다. 태자나 차남이나 개막장이고 뒤를 이은 셋째인 유준도 막장 타이틀을 벗어나는 인물은 아니니 명군이었어도 자식 교육에 막장이어서 결국 자신의 치세도 허무하게 끝내게 된 명군이기는 하나 실책도 많았던 셈. 그러나 이 정도만 되어도 솔직히 유송에선 그나마 제대로 된 통치자였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황제 유준이 이미 정권을 장악한 권신 [[고제(남제)|소도성]]에게 선양하면서 59년만에 멸망하였다. == [[송(남조)/왕사|왕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송(남조)/왕사)] [[분류:송(남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