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한국의 성씨)] [목차] ||<-2><:>'''로마자 표기'''||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373a3c,#ddd '''RR식 표기'''}}}]] ||<|3> Song || ||<:>[[매큔-라이샤워 표기법|{{{#373a3c,#ddd '''MR식 표기'''}}}]] || ||<:>{{{#373a3c,#ddd '''통용 표기'''}}} || == 개요 == [[통계청]]에서 실시한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IN15SD&vw_cd=MT_ZTITLE&list_id=A11_2015_30&seqNo=&lang_mode=ko&language=kor&obj_var_id=&itm_id=&conn_path=MT_ZTITLE|2015년 인구총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국에서 쓰이고 있는 송씨는 '''[[宋]](성 송), [[松]](소나무 송), [[送]](보낼 송)'''으로 나뉜다. 이 중 [[宋]](성 송)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松]](소나무 송), [[送]](보낼 송)은 극소수이다. == 한자별 == === 宋 === [[대한민국]]과 [[중국]]의 성씨. 한국 내 송씨(宋氏)는 2015년을 기준으로 인구가 '''683,494명'''이며 전체 성씨 중 18번째로 많은 성씨이다. 중국에서는 22번째로 많은 성씨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중 가장 많은 수(15%)가 산동성에 살고 있다. 그외 사천성, 하남성, 하북성 등지에 살고 있다. ==== 송씨(宋氏)의 역사 ==== ===== 송씨(宋氏)의 기원 ===== '''모든 송씨(宋氏)의 공통 시조는 [[상나라]][* 은나라] 29대 왕 [[덕왕(상)|제을(帝乙)]]의 장자 [[미자계]](微子啓)다.''' 미자계가 제후로 봉해진 나라가 바로 [[송(춘추전국시대)|송(宋)나라]]였으며, 이후 700여년간 존속하다가 기원전 286년경에 멸망했다. 해당 성씨의 발원지는 [[상나라]]의 수도이자 상나라를 계승한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춘추전국시대)]]의 수도 [[상추시|상구시]](商丘市)다. 물론 송씨(宋氏) 성을 가진 사람들 모두 [[상나라]] 왕족이자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춘추전국시대)]] 초대 국군인 [[미자계]]의 혈통적 후손이라는 건 당연히 아니다. 송씨(宋氏) 자체는 [[춘추전국시대]]에 [[중원]]에서 [[상나라]] 왕족에 의해 탄생한 것은 맞지만 송(宋)을 성씨(姓氏)로 사용하는 집단이 탄생한 건 '''기원전 286년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가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자 나라를 잃은 [[왕족]]과 [[귀족]] 집단들이 자신들의 [[모국]]을 기리고자 [[국호]]를 성씨(姓氏)로 사용한 게 그 시작이다.''' 현재 한국의 성씨(姓氏) 시스템은 중국에서 따온 것이지만, 본래 성(姓)과 씨(氏)는 다른 개념이었다. 고대 중국 사회에서 성(姓)은 혈연으로 정해지는 개념이었고 씨(氏)는 지연으로 정해지는 개념이었다. 그러던 것이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성과 씨의 구분이 희미해져 결국에는 [[진한시대]] 이후로는 성과 씨의 개념이 합쳐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용하는 [[성씨]](姓氏) 개념이 탄생하게 되었다. 당장 송씨(宋氏)의 시조 [[미자계]]와 그의 자손들인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춘추전국시대)]] 군주들만 하더라도 씨(氏)는 자신들이 건국하고 속한 집단인 송(宋)을 쓰긴 했지만 혈통적 승계 의미로 가지는 성(姓)은 자(子)였다. '''즉, 송(宋)이라는 성씨(姓氏)의 첫 시작점은 혈통에 기반한 성(姓)이 아닌 자신들 속해 있던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씨(氏)로 볼 수 있으며''' 이런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를 건국하고 송씨(宋氏)를 만들어 처음으로 사용한 [[미자계]]는 모든 송씨(宋氏)들의 정신적 시조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춘추전국시대)]] 초대 국군인 [[미자계]]를 혈통적 시조로 삼는 건 어렵더라도 성씨(姓氏)로서의 송(宋)은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춘추전국시대)]] 왕족, 귀족 집단들이 성씨(姓氏)로 사용한 게 그 기원이기 때문에 [[사서]](史書)나 공신력 있는 족보상 기록에 흔적들이 남아있다면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춘추전국시대)]]의 지배층 및 귀족 집단과의 혈연적 관계에 대해서 추정은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래 항목에서 더 자세하게 후술하겠지만 한국 내 모든 송씨(宋氏) 집안들은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춘추전국시대)]] [[왕족]] 출신이자 [[당나라]] 호부상서[* 현재 [[재무부]] 장관에 준하는 직급] 송주은(宋柱殷/柱恩)[* 도시조 송주은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면 한자로 柱殷과 柱恩은 둘다 나오기 때문에 일단 둘다 표기]을 [[시조|도시조]][* [[본관]]이 모시는 직계 [[시조]]는 아니지만 옛 [[문헌]]이나 다른 [[본관]]의 [[족보]]를 통해 성씨(姓氏)의 최고 [[조상]]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도시조라고 부른다.]로 모시고는 있긴 하지만 모화사상으로 후대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이라는 의견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 송씨(宋氏) 후손들이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춘추전국시대)]]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고 싶다면''' 먼저 송주은(宋柱殷/柱恩)이라는 인물의 실체가 명확한지 만약 송주은(宋柱殷/柱恩)이라는 인물이 가공의 인물이라면 [[중원]]에서 탄생한 송씨(宋氏)가 어떻게 [[한반도]]로 들어왔는지 '''[[실증주의|실증적인 연구]]를 통해서 밝히는 게 우선'''일 것이다.[* 사실 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현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여담으로 송씨(宋氏)자체는 [[중원]]에서 만들어진 성씨(姓氏)고 현재 중국 [[한족]]들도 어느 정도 사용하는 성씨(姓氏)이긴 하나 '''[[한족]]계 성씨(姓氏)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중원]]계=[[한족]]계가 아니다 [[중원]]은 그냥 지리적인 명칭이며 통일 왕조가 들어서기 전 또는 멸망 후에 [[중원]]에서는 [[한족]]을 포함 여러 민족들이 뒤섞였거나 대립했다. 그동안 중국 땅에 존재했던 여러 민족들이 [[한족]]으로 많이 동화된 현시점에서도 [[중국]]에는 여전히 56개 소수민족이 존재하며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한대 묶기 위해서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오늘날의 주류 학설에 의하면, '''현재 중국 주류 민족인 [[한족]]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화하족(華夏族)이 세운 최초의 나라는 [[주나라]]다.'''[* 중국에서는 [[하나라]]를 화하족(華夏族)이 세운 최초의 나라로 주장하나 학계에서는 그 실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상나라]] 역시 화하족(華夏族)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지만 학술적으로 [[상나라]]와 화하족(華夏族)과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현재 일부 학계에서는 중립적인 표현을 위해 [[상나라]]를 건국하고 지배한 민족을 상(商)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따 상족(商族)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 상족(商族)에 대한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당시 화하족(華夏族)과는 별개의 민족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한국의 일부 재야 사학계, 역사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동이족]] 기록에 대한 확대 해석과 [[기자]]의 존재를 들어 [[상나라]]와 [[고조선]]과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시도 중이지만 이 역시 신빙성있는 학술적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중립성을 위해 따로 서술하지 않겠다.] 즉, 요약하자면, [[한족]]의 원류는 화하족(華夏族)이며 '''기원전 1040년경 이 화하족(華夏族)의 [[주나라]]가 그들 입장에서 [[동이|이민족]]인 상족(商族)이 세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에게 협조적이었던 [[상나라]] 왕족 [[미자계]]를 [[제후]]로 봉하고 땅을 주어 상족(商族)들을 다스리게 하니'''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가 앞서 계속 언급된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춘추전국시대)]]다. '''송씨(宋氏)의 기원(起源)은 이 시점에서 시작된다.''' ===== 한국에서의 송씨(宋氏) ===== ||<:> [[파일:송(宋)씨족보.jpg|width=100%]] || ||<:> '''한국 송씨(宋氏)의 선계도(先系圖)'''|| 일단 국내 송씨(宋氏) 각 종친회에서는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춘추전국시대)]] [[왕족]] 혈통이자 [[당나라]]에서 호부상서[* 현재 [[재무부]] 장관에 준하는 직급]를 지낸 송주은(宋柱殷/柱恩)[* 도시조 송주은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면 한자로 柱殷과 柱恩은 둘다 나오기 때문에 일단 둘다 표기]이라는 인물을 모든 한국 송씨(宋氏)의 [[시조|도시조]][* [[본관]]이 모시는 직계 [[시조]]는 아니지만 옛 [[문헌]]이나 다른 [[본관]]의 [[족보]]를 통해 성씨(姓氏)의 최고 [[조상]]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도시조라고 부른다.]로 모시고 있는 상황이다.''' 송주은(宋柱殷)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대부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 중인 [[문헌]]에 포함된 <송씨상계세보(宋氏上系世譜)>를 인용하여 간략하게 다루고 있으며 이외 정확한 기록은 없는 상황이다. 후손들에 의해 현대에 쓰인 《송씨통사》에 의하면 정황상 [[안사의 난]]을 피해 [[경덕왕]] 시절 [[신라]]에 귀화하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다. 송주은(宋柱殷/柱恩)의 7세손 송순공(宋舜恭)은 [[신라]] 말 [[헌강왕]] 때 [[대아찬]](大阿飡)을 역임했다고 한다. '''진천 송씨(鎭川 宋氏)가 현재 송순공(宋舜恭)을 시조'''로 모시고는 있지만 그 후 16세(世) 340년간 세계가 실전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만 할 뿐이며 고려 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0048|평장사]]를 지낸 송인(宋仁)을 1세조로 모시고 있다. 송주은(宋柱殷/柱恩)의 10세손 송자영(宋自英)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송유익(惟翊)은 [[여산 송씨|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시조'''가, 둘째 아들 송천익(天翊)의 후손 중 은진군 '''송대원(大原)은 [[은진 송씨|은진 송씨(恩津宋氏)]]의 시조'''가, 셋째 '''송문익(文翊)은 서산 송씨(瑞山宋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 외 신평(新平), 야성(冶城), 연안(延安) 등 13여 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여산, 은진, 진천 송씨(宋氏)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한국의 모든 송씨(宋氏)는 도시조인 송주은(宋柱殷/柱恩)의 후손'''이며, 오늘날에 와서도 송씨끼리는 다른 본관이라도 통혼하지 않는 것이 관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제는 송주은(宋柱殷/柱恩)을 도시조로 하는 위와 같은 족보는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즉, 송주은(宋柱殷/柱恩)은 후손들의 모화사상으로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 [[당나라]]에서 현대의 [[재무부]] [[장관]] 직급이었으면 상당히 거물급 인물인데 [[신라]] 역사 다룬 《[[삼국사기]]》와 당나라 역사를 다룬 《[[구당서]]》, 《[[신당서]]》를 포함한 그 어떤 [[정사(역사)|정사(正史)]]에서도 흔적 조차 찾기 어려우며 심지어 중국 포털 사이트 등에서도 한국 송씨 종친회발 소스를 인용하여 설명하거나 송주은(宋柱殷/柱恩)이라는 인물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송씨(宋氏) 족보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인 1600년대 만들어져 어느 정도 공신력을 인정받아 경기도 유형 [[문화재]]로 지정된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113101390000&pageNo=1_1_2_0|여산 송씨 족보]]》'''[* 이 족보는 1606년에 처음 편찬되었고 현재 문화재로 보존 중인 책은 1653년에 나온 간행본이다. 이 족보 이전에도 여산 송씨 족보는 존재했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그 후손들이 남아있는 자료들을 모아 취합해 다시 발간한 것이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357|#]]]에 나오는 '''시조 송유익(宋惟翊) 이전 [[한반도]]에서의 송씨(宋氏) 기원과 뿌리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길은 없다.''' 현재 공식 기록상에 보이는 [[한민족]] 최초의 송씨(宋氏)는 [[정사(역사)|정사(正史)]]로 여겨지는 《[[고려사]]》에서 등장하는데 [[태봉]](후고구려)에서 [[궁예]]의 [[책사]]였다가 궁예의 폭정에 반감을 갖고 [[왕건]]에 귀의해 [[고려]] 건국 이후 [[개국공신]][* 3등 공신으로 추정]으로 인정 받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486|대상(大相)]]'''이 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137|송함홍(宋含弘)]]'''이라는 [[문인]] 출신이 최초의 기록이다. 송함홍과 비슷한 시기의 인물[* 송능(宋能)은 문헌을 통해 914년생으로 정확한 나이가 확인 가능하고 송함홍(宋含弘)은 918년에 이미 [[태봉]]에서 문사(文事)를 관장하는 [[문인]]이었다는 대목을 보면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나 송함홍(宋含弘)이 최소 아버지 뻘일 확률이 높다.]보이는 '''[[https://ko.wikipedia.org/wiki/%EC%86%A1%EB%8A%A5|송능(宋能)]]'''이라는 인물도 [[고려사]]에 나오는데 왕건의 [[삼한일통|후삼국 통일 전쟁]]에 참여한 [[무인]] 출신으로 이도 역시 고려 [[공신|삼한공신]]으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229|보국대장군]]''' 칭호를 받았고, 100세가 되었을 때 [[현종(고려)|현종]]으로 부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045|대광(大匡)]]'''이라는 [[벼슬]]을 받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이 두 인물 모두 [[본관]]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해당 내용들을 봤을 때 '''[[한반도]]에서 송씨(宋氏) 자체는 늦어도 [[고려]]가 건국 된 직후인 900년대 초부터 존재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800년대 중~후반 출생으로 추정되는 송함홍이라는 인물이 [[후삼국시대]]부터 등장했으니 송씨(宋氏)도 한반도에서 최소 800년대 중후반 혹은 그 이전부터 등장한 게 아닐까 추정은 해볼 수 있지만 《[[고려사]]》는 15세기에 조선 중앙 정부 주도로 편찬된 책이다. 즉 해당 인물들 이름은 후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며 [[후삼국시대]]에는 성씨(姓氏)가 없었다가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성씨(姓氏)를 하사받거나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일단 확실한 시기는 900년대 초로 봐야할 것이다.] [[한반도]]에서 [[한국의 성씨|성씨(姓氏)]]는 [[고려]] 때 본격적으로 퍼졌고 이때 [[중원]]에서 만들어진 [[중국의 성씨|성씨(姓氏)]]를 빌린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현 시점에서는 송씨(宋氏) 역시 이 시기쯤 지방 [[호족]]이나 [[귀족]] 세력에 의해 들여왔을 확률이 높다.[* [[고려]] 초 때만 해도 [[귀족]]들 조차 [[한국의 성씨|성씨(姓氏)]]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정부에서는 [[한국의 성씨|성씨(姓氏)]] 사용을 추진하기 위해 [[한국의 성씨|성씨(姓氏)]]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는 봉미제도(封彌制度)가 시행되었다. 이 봉미제도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모든 [[귀족]]층들은 [[중국의 성씨]]를 빌려다가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족보]]가 오래될수록 권위가 높아지는 시대였고 그 권위가 과거 합격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사서 등 옛 서적에 존재하는 [[중국의 성씨]]와 자신들과 관련이 없는 중국 인물들을 가져다 [[족보]]를 만들었다. 이렇게 거의 모든 [[한국의 성씨|성씨(姓氏)]]는 가문의 권위나 역사를 늘리기 위해 실제로 자신들 조상과 혈연이나 관련이 없는 [[중국의 성씨]]를 빌려다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족보에 존재하는 중국 인물들이 중국 측 기록에는 전혀 등장한 적이 없는 경우가 다수이다. 특히 [[고려]] 때는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의 [[금나라]]에서의 공격과 합병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인]]은 [[거란족]]과 [[여진족]]과는 차별성을 두어야 했고 봉미제도까지 시행이 되니 중국에는 기록이 전혀 없는 가공의 인물을 이용하거나 중국 문헌을 참고하여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족보]]를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였다. 또한 [[고려]] 왕조에서 [[복성]]을 가진 자들은 [[거란]]식 [[복성]] 같다며 중국에서 먼저 자리잡은 [[중국의 성씨|단성]]를 하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 [[고종]]이 [[제갈씨]]가 복성이라며 [[제씨]]와 [[갈씨]]로 나눈 경우도 있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한국의 성씨]] 문서를 참조하길 바란다.] 한국 역사에서 송씨(宋氏) 성을 가진 한국인은 [[후삼국시대]]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고려]] 건국 직후 [[개국공신]] 이름에서 처음 등장하기 시작해서 [[무신정권]] 전후로 [[본관]]이 등장하고 이 때 부터 본격적으로 각종 사서나 문헌에 해당 [[한국의 성씨|성씨(姓氏)]]가 대거 등장한다. 따라서 [[후삼국시대]]에 '''특정 지방 [[호족]] 내지 귀족 세력이 [[왕건]]을 필두로한 [[패서]] [[호족]][* 고구려 유민 출신 호족]이 주도하는 [[고구려부흥운동|고구려 부흥 운동]][* [[고려]]는 [[고구려]] [[유민]] 출신 [[호족]]들 주도로 고구려를 직접 계승해 건국한 국가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고구려]] 멸망 직후에 일어난 부흥 운동 뿐만 아니라 [[후삼국시대]]에 일어난 [[후고구려]] 및 [[고려]] 건국 역시 [[고구려부흥운동|고구려 부흥 운동]]으로 본다. 애초에 [[고구려]] 5세기 부터 국호를 [[고려]]로 바꿨기 때문에 [[고구려]]=[[고려]]로 볼 수 있다.]과 [[삼한일통|후삼국 통일]] 과업에 적극 참여해 [[고려]] 건국에 기여하면서''' 중앙 정부로 진입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 해당 [[한국의 성씨|성씨(姓氏)]]를 가지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한반도]]에서 송씨(宋氏) 집단이 탄생'''하지 않았나 추측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이런 사례는 한국 성씨 역사에서 흔하고 흔해서 만약 이렇다고 해도 너무 실망할 필요 없다. 기록이 명확하지 않은 외래계 한국 성씨 대부분이 이런 경우며 중국식 단성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서 주류로 자리 잡은 시기도 [[통일신라]] 이후 부터 였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한국의 성씨]] 문서를 참조하길 바란다.] 다만 [[고려]] 이전 역사를 다룬 옛 [[문헌]]이나 [[사서]](史書)에 송씨(宋氏) 성을 가진 [[한민족]]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려시대]] 이전 [[한반도]]에 송씨(宋氏)가 없었다고 단언하는 것 역시 아직은 무리'''다. [[송(춘추전국시대)|송나라(춘추전국시대)]]가 기원전 286년 멸망했고 [[고조선|상고시대]]부터 꽤 긴 시간 동안 [[중원]]계 유이민들이 [[한반도]]로 꾸준히 들어왔다는 걸 생각해 보면 위에서 서술한 송주은(宋柱殷/柱恩)은 가공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해당 사례와 유사하게 송씨(宋氏) 성을 가진 [[중원]]계 유이민들이 [[삼국시대]]~[[남북국시대]] 즘 해서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송씨(宋氏)가 뿌리내렸을 가능성 역시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권 18 [[고국원왕]]편에 나와있는데, [[전연]](前燕)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송황(宋晃)[* 송황(宋晃)은 [[선비족]]이 세운 [[전연]](前燕)의 동이호군(東夷護軍) 장수였는데 [[후조]](後趙)가 [[전연]](前燕)을 공격하자 [[후조]](後趙)의 황제 [[석륵]]과 내통하여 반란을 꾀했지만 [[전연]](前燕)의 황제 [[모용준]]이 이를 격퇴하자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라는 송씨(宋氏) 성을 가진 장수를 349년에 [[전연]](前燕)으로 다시 송환한 사실이[* 황제에 대한 반란이었으니 당연히 송환되자마자 끔살당할 운명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모용준]] 황제가 꽤 관대한 편이었는지 고구려에서 송환된 송황(宋晃)을 용서해 주되 이름을 송활(宋活)로 개명시켜버리고(...) 다시 관직을 줬다고 한다.] 나온다.[[http://db.history.go.kr/id/sg_018r_0020_0190|#]] 비록 망명했다 송환된 인물이라 [[한반도]]에 완전히 뿌리내린 것은 아니지만 해당 내용만 봐도 최소 [[삼국시대]]부터 송씨(宋氏) 인물이 [[한민족]]의 영역으로 들어왔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원]]계 유이민 이주 설 역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 참조: [[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6346|성씨 전문기자 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 - 여산 송씨편]][[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1156|은진 송씨편]],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2/0002649025?sid=10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70〉 송씨(宋, 松氏)]], [[https://kyudb.snu.ac.kr/book/view.do?book_cd=GK07781_00|여산송씨십이세계(礪山宋氏十二世系)-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http://aks.ai/GC02600710|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여산송씨편]] ==== 송씨(宋氏) 목록 ==== ===== [[파일:여산 송씨 종문.svg|width=35]] [[여산 송씨]] ===== [[고려시대]]에 문과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고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진 '''송유익(宋惟翊)'''을 시조로 한다. 증손 송송례(宋松禮)는 추성익대보리(推誠翼戴輔理) 동덕좌명공신(同德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상장군(上將軍)에 올랐으며, 찬성사(贊成事) 중찬(中贊),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장남 송염(宋琰)은 [[충렬왕]]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고 차남 송분(宋玢)은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추성찬화안사공신(推誠贊化安社功臣)에 책록되고 낙랑공(樂浪公)에 봉해졌으며 정승(政丞)을 지냈다. 조선 [[중종(조선)|중종]] 때 송질(宋軼)은 영의정을, 송세형(宋世珩)은 대사헌을 거쳐 호조·이조판서를 지냈다. [[선조(조선)|선조]] 때 [[송상현]]은 문과 급제하여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내고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 등을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에 맞서 분전했으나 끝내 전사했다.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송희립은 통제사 [[이순신]] 휘하에서 시종일관 활약한 군관으로 수군절도사를 지내고 세충사(世忠祠)에 배향되었다. 송시철(宋時喆)은 좌승지를 거쳐 형조·공조참의등을 [[현종(조선)|현종]] 때 송광연(宋光淵)은 문과급제후 예조참의 황해도관찰사 이조참판등을 지냈고, [[숙종(조선)|숙종]] 때 송진명(宋眞明)은 호조·이조·예조판서를, [[영조]] 때 송인명(宋寅明)은 좌의정등을 지냈다. 2015년 기준 인구 298,231명으로 송씨 본관 중 '''1위'''. ===== [[파일:은진 송씨 종문.svg|width=40]] [[은진 송씨]] ===== 고려시대에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진 '''송대원(宋大源)'''을 시조로 한다. 증손 송명의(宋明誼)는 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집단(司憲府執端)으로서 공명정대함에 포은 [[정몽주]](鄭夢周) 등 제현(諸賢)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조선시대에 송유(宋愉)는 불과 열두살에 과거급제하여 종7품 부사정(副司正)에 오르고 회덕 [[배달촌]]에 자리 잡으면서 송촌(宋村) 지명이 생겼는데 이곳은 지금의 [[송촌동(대전)|송촌동]]이다. 학문이 뛰어나 '''[[송시열]]''', '''[[송준길]]'''과 삼송(三宋)으로 일컬어진 송규렴(宋奎濂)은 문과급제로 승지 이조참판 부제학 대사성 예조판서등을 지내고 동춘당 송준길은 병조판서 우참찬 영의정등에 올랐다. 우암 송시열은 장원급제로 대군 사부에 임명받고 좌참찬 우찬성 우의정 좌의정등을 지냈다. 문장과 서체에 뛰어났으며 송자(宋子)로 존숭되었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종사(宗師)되었다. 송상기(宋相琦)는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 대제학 공조 호조 예조 병조 이조판서를 두루 지냈으며 [[성리학]]의 대가로 선비들의 추앙을 받은 송인수(宋麟壽)는 대사헌 이조참판등을 지냈고 대사성때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강론했다. 송환기(宋煥箕)는 과거급제후 [[정조(조선)|정조]]의 신임을 받아 승지에 특채되고 대사헌 공조, 이조판서 우찬성등을 지냈다. 송근수(宋近洙)는 이조참판 대사성을 거쳐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으며 송시열과 함께 [[종묘]]에 배향되게 된다. 2015년 기준 226,050명으로 송씨 본관 중 인구 순위 '''2위'''. ===== 진천 송씨 ===== [[신라]] [[헌강왕]]때 [[대아찬]](大阿湌)을 지낸 '''송순공(宋舜恭)'''을 시조로 한다. 고려시대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지낸 송인(宋仁)은 진천 송씨의 중시조다. 송인은 찬화공신(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진천백(鎭川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의 손자 송국첨(宋國瞻)은 고려 강종(康宗)때 과거급제 하여 직사관(直史館)이 되었다. 금나라가 침입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우군장(右軍將)이 되어 공을 세웠다. 정언(正言)을 거쳐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형부상서(刑部尙書)등을 지냈다. 송순(宋恂)은 고려 고종(高宗)때 진강부전첨(晉康府典籤) 참지정사(參知政事) 지공거(知貢擧)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올랐다가 수태위(守太尉)를 더하였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로 치사(致仕) 하였다. 송언기(宋彦琦)는 고려 고종때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지냈다. 송광보(宋匡補)는 고려 공양왕때 예부상서를 송찬(宋贊)은 도승지 우참찬을 거쳐 판중추부사 형조참판 호조참판 우참찬등을 지냈으며 조선 4대조를 섬긴 중신으로 [[중종실록]]과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송창(宋昌)은 병조좌랑 도승지 공조판서 좌참찬등을 역임했으며 사관이 평하길 훌륭한 인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고 한다. 송영구(宋英耉)는 병조참판을 지내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송사윤(宋思胤)은 열여덟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과 목사등을 지냈으며 진천 송씨는 조선시대에 184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 진천 송씨 유명인으로는 가나다라, 고래사냥등으로 유명한 가수 [[송창식]]이 있다. 2015년 기준 인구 32,690명이다. ===== 연안 송씨 =====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첨의부(僉議府)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에 봉해진 '''송경(宋卿)'''을 시조로 한다. 송경은 반란(叛亂)을 평정(評定) 하고 홍건적(紅巾賊)을 격퇴시킨 공(功) 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으며 벽상에 도형 되었다. 이어 지밀직사사, 서북면 체찰사를 지내고 추성익대보국동덕좌명공신(推誠翼戴輔國同德佐命功臣)으로 연안부원군에 봉해졌다. 송경의 아들 송훈(宋勛)은 과거 급제해서 중의대부와 상서성 이조판서등을 역임하고, 손자 송광언(宋光彦)은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오르고 이후 공을 세워 연안군(延安君)에 추증되었다. 송운룡(宋雲龍)은 고려 말기에 문과 급제해서 신호위 보승중랑장 사천감등을 역임했고 송복륭(宋復隆)은 정당문학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사 호부상서등을 지냈다. 송운렴(宋雲濂)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빈시 주부 제용 감주부 상원군수 성천진관병마절제도위등을 역임했다. 송광언(宋光彦)은 학문이 뛰어났으며 문과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송승연(宋承衍)은 과거급제해서 집의 병조참판(兵曹參判)등을 지냈고 송유량(宋有良)은 참의 예조판서 도총관(都摠管)등을 지냈다. 2015년 기준 인구 13,098명이다. ===== 야성 송씨[* 야로 송씨라고도 한다.] ===== 고려 목종(穆宗)때 간의대부(諫議大夫) 총부의랑(摠部議郞) 등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야성군(冶城君)에 봉해진 '''송맹영(宋孟英)'''을 시조로 하고 있다. 야성(冶城)은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冶爐)의 별칭인데 이때부터 후손들이 본관을 야성으로 하여 경상도 야로현에 정착해 살았다. 시조 송맹영의 아들 송창(宋昌)은 고려조에서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냈고, 손자 송우(宋瑀)는 문림랑(文林郞)으로 소부소감(小府少監)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송인서는 상서호부(尙書戶部)에 올랐으며 송구(宋構)가 경기감사와 어사(御使)등을 역임하였고 송길창(宋吉昌)이 또다시 공민왕 때에 세운 공로에 힘입어 다시한번 야성군에 재차 봉해진다. 경상북도 성주군 송천으로 이거하여 14세에 이르러 직장공파·상호군공파·대호군공파·현령공파·선전공파 등으로 갈라졌다. 송광심(宋光心)은 문과급제하여 병조정랑 등을 지냈으며 성리강요를 저술했다. 숙종대에 송원기(宋遠器)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올랐으며 송희규(宋希奎)는 흥해군수와 장령, 상주목사 등을 지냈고 송광정(宋光井)은 장원급제하여 권지학유에 취임하고 동학교수와 성균관직강이 되었다가 군수로 부임하고 사헌부장령 형조낭관등을 지냈다. 송천흠(宋天欽)은 용양위부호군과 상주목사를 지냈으며 선정을 베풀어 관민의 칭송을 받았다. 송준필을 비롯한 후손 11명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하여, 독립 유공 가문으로 이름이 높다. 송규(宋奎)는 원불교(圓佛敎) '''제2대 종법사(宗法師)'''다. 2015년 기준 인구 20,201명이다. ===== 신평 송씨 ===== 고려시대에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서운관정(書雲觀正) 겸 습사도감판관(習射都監判官)을 지낸 '''송구진(宋丘進)'''을 시조로 하고 있다. 신평송씨는 여산송씨(礪山宋氏)의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12세손 송말선(宋末善)이 홍주(洪州)의 신평(新平)에 정착하였고 후손들이 홍주(洪州)와 신평(新平)으로 본관이 갈라져 잇게 되었다. 그의 6세손 송희경(宋希璟)이 조선 세종(世宗)때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에 이르러 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을 지냈고 조선 성종때 문과급제한 송흠(宋欽)은 수찬(修撰) 병조좌랑(兵曹佐郞) 지평(持平) 등을 거쳐 담양(潭陽)과 장흥부사(長興府使)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과 이조(吏曹) 병조판서(兵曹判書) 우참찬(右參贊) 등을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송순(宋純)은 중종(中宗)때 문과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명종(明宗)때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선조(宣祖)때 대사헌(大司l憲) 한성부 판윤 등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로서 시조문학(時調文學)의 정수를 계승하여 명작을 남겼다. 송해용(宋海容)이 현감을, 송흠의 아들 송익침은 병조참의를 역임하고 송지원(宋之遠)은 공조참의 장례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송해령(宋海寧)은 겸교리(兼校理)와 감찰(監察)을 송덕미(宋德美)는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과 참의(參議)를 지냈다. 2015년 기준 인구 13,916명이다. ===== 남양 송씨 ===== 시조 '''송규(宋奎)'''는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난신(亂臣)의 참소를 입고 후당명종(後唐明宗) (926년~ 933년) 때 동료 7학사와 함께 신라에 동래하여 경순왕의 후대(厚待)를 받으시다 고려가 건국하자 세상(世上) 을 등지고 청운야학(靑雲野鶴)으로 벗을 삼다가 947년 타계하시니 우리나라 남양송씨는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남양(南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그 후, 후손 충(忠)이 고려 예종(睿宗) 무자년(1108년)에 길주에 침입한 여진과 싸우다 전사하니 왕으로 부터 상장군(上將軍) 과 병부상서(兵部尚書)에 증직(贈職) 되었다는 내용이 고려사 와 고려사 절요에 나타나며 그 다음 진(進), 아들 함진(含進), 손자 신준(臣俊), 증손 득청(得淸) 등 4대가 흥양이씨족보 (興陽李氏族譜) 와 씨족원류(氏族源流)에 실려 있으나 그 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알 수 없어 고려 말에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감찰대부(監察大夫)을 지낸 남양군(南陽君) 송세보(宋世輔)를 기세조(起世祖)하여 중시조(中始祖) 일세(一世) 로 하는 도촌파(道村派) 와 고려 말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낸 송공절(宋公節)을 기세조(起世祖)하여 중시조(中始祖) 일세(一世) 로 하는 [안서파](안동파, 서호파)[雁洞派,西湖派]로 각 종파를 이루었다. 2015년 인구는 11,041명이다. ===== 홍주 송씨 ===== 고려시대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송계(宋桂)'''를 시조로 하고 있다. 홍주 송씨의 선계(先係)는 [[여산 송씨]]의 시조 송유익(宋有翊)의 12세손 송말선(宋末善)이 홍주 신평(新平)에 살면서 여산송씨에서 분적하였다. 송계의 아들 송기손(宋麒孫)은 성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남평(南平)과 구례(求禮) 등지의 수령을 역임한 후 내직으로 들어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등을 지내고 그의 아들 대에서 이요당공파(二樂堂公派). 우유당공파(優遊堂公派). 청심헌공파(淸心軒公派) 등 크게 세갈래로 분파했다. 아요당공파의 송준기(宋駿)가 참봉 별좌(別坐) 주부(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단성현감(丹城縣監)등을 지냈으며 중시조 송평(宋枰)은 조선시대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와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 등을 지내고 송평 세대부터 홍주에서 담양(潭陽)으로 이거하여 살게되었다. 송문중(宋文中)은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고 그의 아들은 송개신(宋介臣)은 조선 태조때 조선시대 첫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송정순(宋廷筍)은 형조좌랑 예조정랑 구례현감(求禮縣監) 등을 지냈다. 송정황(宋庭篁)은 조선 명종 때 장원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교서(校書)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등을 지냈고 문인들은 그의 학문과 인품을 이윤(伊尹)과 안자(顔子)에 비유하였으며 저서에 주자문록(朱子文錄) 정자송공유고(正字宋公遺稿)등이 있다. 송타(宋柁)는 유려한 문장과 학식으로 유명하였는데 화암수록 매농곡 화암구곡 등의 문집을 남겼으며 정유재란때 공을 세워 운암서원(雲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아들 송수(宋燧)는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使) 송계은(宋繼殷)이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를 송두문(宋斗文)은 회양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를 송동식(宋東植)은 군수(郡守)를 송익중(宋益中)은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송인하(宋寅夏)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등을 지냈다. 2015년 인구는 9,679명이다. ===== [[파일:청주 송씨 대종회 종문.jpg|width=35]] [[청주 송씨]] ===== 청주 송씨의 '''시조''' '''송유충(宋有忠)'''은 [[여산 송씨]] 밀직공(密直公) 송방영(宋邦英)의 아들 표(標)의 장남으로 고려시대 충숙왕(忠肅王)때 나라에 공을 세워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지며 '''송유충(宋有忠)'''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의 아들 송훤(宋暄)은 조선조 개국공신으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였으며 이때부터 본관을 청주로 하여 후손들이 세계를 이어왔고 서원은 청주의 옛 이름이다[* 현재 [[청주시]] [[서원구]]라는 이름의 어원이기도 하다.]. 송훤(宋暄)의 아들은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지낸 송승은(宋承殷)으로 경상도 칠원현감(漆原縣監)으로 나갔다가 경상남도 김해 하계면 이거하면서 [[김해]]가 청주 송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그의 아들 송숙형(宋淑亨)은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 주부(主簿)등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송경(宋經)은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송경(宋經)의 아들 송창(宋昌)은 절제사(節制使)를 지냈다. 송창(宋昌)의 아들 '''[[송빈]](宋賓)'''은 임진왜란 당시 김해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자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이다. 영남의 요충지를 사수하며 혈투를 벌였다. [[송빈]](宋賓)은 공조참의와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에 추증 되었으며 [[이순신]](李舜臣)의 현손인 부사 이봉상(李鳳祥)이 주지(州誌)를 보다가 [[송빈]](宋賓)의 공적을 발견하고 감격한 나머지 충렬사(忠烈祠)를 건의해서 향사하게 되었고 또한 부사 정현석(鄭顯奭)의 상소로 건립된 사충단(四忠壇)과 더불어 배향되었다. [[송빈]](宋賓)은 임진왜란 김해성사충신(金海城四忠臣)중에서도 필두에 오르는 인물로 대표적인 의병장이라고 할 수 있다.[* 송빈(宋賓)을 추모하는 충단(忠壇)은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에 있고 추원재(追遠齋)는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도강동에 있다. 증이조참판청주송공순절기념비(贈吏曹參判淸州宋公殉節記念碑)가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에 있다.] [[송빈]](宋賓)의 두 아들 송정백(宋廷伯)은 청암공파(晴庵公派)로 송정남(宋廷男)은 부사공파(府事公派)로 각각 분파되었다. 송빈(宋賓)의 아우 송밀(宋密)은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현감등을 지냈고 선정관(宣傳官)을 지낸 아들 송민영(宋敏英)은 만호공파(萬戶公派)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송정영(宋廷英)은 부사공파(府事公派)로 분파하였다. 송처관(宋處寬)은 세종때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를 거쳐 집현전부제학 이조참의 전라도관찰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역임했다 동생 송처검(宋處儉)은 문과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송제용(宋齊龍)은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송재식(宋在軾)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2015년 인구는 8,171명이다. ===== [[용성송씨|용성 송씨]] =====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용성 송씨는 남한에 4,1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기타 ===== * '''문경 송씨''' * '''서산 송씨''' * '''덕산 송씨''' * '''옥구 송씨''' * '''나주 송씨''' * '''김해 송씨''' * '''회덕 송씨''' === 松 === [[대한민국]]과 [[중국]]의 성씨. 중국에서도 쓰이는 성씨이며 216위 정도에 머무는 듯 하다. 중국 내에서도 드문 성씨로 취급하는 모양 [[https://zh.wikipedia.org/wiki/%E6%9D%BE%E5%A7%93|#]] 한국에서는 통계청이 시행한 1985년도 인구총조사에서 총 18가구 177명으로 나타났는데, 200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1,493가구 4,737명으로 대한민국 성씨 중 130번째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아마 전산 오류일 확률이 높다. 상식적으로 특정 성씨를 가진 사람이 15년 만에 4700명 가까이 새로 생겨났다가 15년 만에 다시 사라져버리는 일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리 없기 때문이다. 2015년도 인구 총조사에서는 아예 '''18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한국에서 파악된 소나무 송씨(松氏)를 사용하는 본관은 화순 송씨가 유일하지만 2015년 인구총조사에 의하면 아예 '''0명'''으로 잡히는 걸 보아 없어진 듯 하다. 남아 있는 나머지 18명은 본관 조차 파악 불가능한 상태다. ==== 송씨(松氏)의 역사 ==== ===== 송씨(松氏)의 기원 ===== 소나무 송씨(松氏)의 기원에 대한 중국 측 기록은 [[https://baike.baidu.com/item/%E6%9D%BE%E5%A7%93?fromModule=lemma_search-box|여러개]]로 갈리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하고 오래 된 일화는 [[천하통일]]을 이룩한 [[진시황]]과 소나무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사기·진본기》와 《명현씨족 언행류고》에 따르면,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조정의 관리들을 데리고 [[태산]]에 올라가 제사(봉선의식)를 지내고, 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는데, 산에는 바람을 막을 곳이 없었다. 마침 산에는 다섯 그루의 큰 소나무를 발견했는데, 가지와 잎이 무성해 마치 큰 정자처럼 둘러 싸여 있어 진시황제는그 소나무 아래로 달려가 비바람를 피할 수 있었다.곧 비바람이 그치자 진시황은 기뻐하며 이 큰 나무가 보호한 공로가 있다고 생각해 그 자리에서 다섯 그루의 소나무를 '오대부송(五大夫松)'으로 상봉하였다.이 때 진시황제를 따라 산에 오른 관리들 중 일부는 황제의 봉호를 받지 못하여 성씨가 없었는데 진시황제가 아직 봉호를 받지 못한 관리들에게 소나무의 덕을 보았다 하여 소나무 송(松)을 성으로 하사해 대대로 전해 내려해 진 것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이 전설에 따르면 소나무 송(松)을 성씨로 쓴 시기는 대략 [[진한시대]]인 기원전 200년대 즘 탄생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 한국에서의 송씨(松氏) ===== 한국 역사에서 소나무 송씨(松氏)를 쓰는 인물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고구려]]에게 기원전 36년에 합병당한 [[비류국]]의 군주인 [[송양]](松讓)이 [[정사(역사)|정사(正史)]]로 인정받은 기록상 소나무 송씨(松氏)를 쓰는 첫 인물이다. '''다만 이를 시조로 삼는 후손들은 현재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한국에서 유일하게 소나무 송씨(松氏) 본관이 확인되는 화순 송씨와는 관련이 없다. ==== 송씨(松氏) 목록 ==== ===== 화순 송씨 ===== 화순 송씨(和順 松氏)는 다른 국내 송씨와는 다르게 소나무 송(松) 자를[* 강릉 성씨(江陵 成氏)의 시조로 알려진 송씨가 원래는 訟 자를 썼었지만 현재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워 사실상 사라진 성씨다. 강릉 성씨의 시조인 송흔적(訟昕迪)은 고려시대에 예빈경을 지냈으며 6대손이 고려 목종(穆宗)의 휘와 비슷한 송(訟)자를 피휘하기 위해 외가쪽 성(姓)인 성(成)씨로 바꿨다고 한다.] 쓰며 현존하는 본관은 [[화순군|화순]] 단본이다. [[https://www.rootsinfo.co.kr/info/roots/view_roots.php?Bid=1895|해당 기록]]에 따르면 화순 송씨의 시조는 어려서 일본에서 고아가 된 송길만이라는 현대 인물인데 막연히 어머니를 찾아 1946년(18세때)에 귀환선을 타고 부산에 왔다. 부모의 성을 몰라 1959년 무효적자 자진신고 때에 일본에서 [[마쓰모토]](松本)라으로 불리웠으므로 松本에서 소나무 송(松)자를 따 성을 송씨(松氏)로 신고하여 송씨(松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즉, 현대 들어와서 새로 생긴 성씨이다.''' 화순 송(松)씨는 통계청이 시행한 1985년도 인구총조사에서 1가구 2명[* 서울특별시 0가구 1명, 전라남도 1가구 1명이었다.]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미상 또는 기타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200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1,486가구 4,643명으로 나타났는데 이것 역시 전산 오류로 보인다. 화순 송씨는 남아있는 족보 기록에 의하면 현대 와서 생겨난 성씨인데 불과 60년 만에 4000명 넘는 후손들이 생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2015년 조사에서는 불과 '''0명'''으로 본관 자체가 없어진 듯 하다... === 送 === [[통계청]]에서 실시한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IN15SD&vw_cd=MT_ZTITLE&list_id=A11_2015_30&seqNo=&lang_mode=ko&language=kor&obj_var_id=&itm_id=&conn_path=MT_ZTITLE|2015년 인구총조사]]에 의하면 보낼 송(送)을 성씨로 쓰는 인구가 '''9명''' 정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 그 외 == === Song === 비 [[한자문화권]]에도 있는 성씨이다. [[리고베르 송]]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 실존 인물 혹은 가상인물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송(성씨)/목록)] [[분류:송씨]][[분류:성씨/한국]][[분류:성씨/중국]][[분류:성씨/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