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중국 흠정 24사)] ||<:><-2>'''{{{+1 송서}}}[br]宋書[br]Book of Song''' || ||<:> '''저자''' ||<(> [[심약]] || ||<:> '''시기''' ||<(> [[5세기]] [[제(남조)|남제]] || ||<:> '''언어''' ||<(> [[한문]] || ||<:> '''권 수''' ||<(> 100권 || ||<:> '''분량''' ||<(> 399년 ~ 479년 (80년)[br] [[안제(동진)|진안제]] 4년 ~ [[순제(유송)|송순제]] 3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宋書 중국 정사 [[24사]] 중 하나다. 학자 [[심약]](沈約)에 의해 편찬된 [[기전체]] 정사로서 420년, [[송(육조)|송]] 무제 [[유유(송무제)|유유]]가 제위에 오른 이후 479년, [[소도성]](蕭道成)이 선위를 받아낸 시기까지 59년간 이어진 남조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무제(남제)|제무제]] 영명(永明) 5년인 [[487년]]에 편찬되었다. == 편찬과정 == 『송서』가 빠르게 편찬될 수 있었던 것은 이전에 저술된 다량의 저작들을 참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송]]의 역사편찬은 438년 국자학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뇌차종의 [[유학]], 하상지의 현학, 사원의 [[문학]]과 함께 하승천에 의해 [[사학]]이 설립되어, 사학(四學)이 정립되었다. 하승천은 여기서 국사(國史) 편찬을 시작하였는데, 「무제기」와 「공신열전」의 초고를 작성하고, 이어서 「천문지」와 「율력지」 「주군지」 등을 정리하였다. 그 뒤를 이어 [[배송지]](裴松之)·산겸지(山謙之)·소보생(蘇寶生) 등이 이를 담당하고, 이어서 대명 연간(457~464) 저작랑 서원(徐爰)이 이를 이어 받아 462년 65권의 『송서』를 완성하였다. 서원의 『송서』는 [[동진]] 의희 초년부터 [[유송]] 대명 말까지의 역사가 담겨있었다. 당시 살아서 활동하고 있던 장질, 노상, 왕승달의 열전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심약은 대명 말부터 순제 때까지의 역사를 정리, 보충하였다.[* 물론, 서원의 열전 입전 기준은 문제가 많았으며 실록에 의지하지 않은 까닭에 심약이 새로운 원칙에 따라 역사를 편찬하였다. 이를테면, [[동진]] 말 환현(桓玄)이나 노순(盧循)은 진적일 뿐이었고, 오은(吳隱)과 사혼(謝混)의 활동은 오로지 진나라를 위한 것이었으며, [[유의(동진)|유의]]와 [[하무기]]도 유송의 창건에 큰 뜻이 없었다고 하여 열전에서 배제하였다. 이는 「자서」에서 밝히고 있다.] 한편, 하승천의 작업을 받들고 있었던 배송지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남제]] 영명 말 심약의 『송서』가 일부분 공개되었다. 그러자 배송지의 증손자였던 배자야(裴子野)가 원고를 수정하여 『송략(宋略)』 20권을 찬하였다. 심약이 이를 보고 탄식하였는데[* “내가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배송지의 작업을 심약이 참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 외에도 『[[수서]]』와 『[[구당서]]』 그리고 『[[신당서]]』에 경적지 목록에만 남아있고, 왕지심의 『송기(宋紀)』 30권과 왕염의 『송춘추(宋春秋)』 20권 그리고 손엄의 『송서』 65권, 포형경의 『송춘추』 등이 확인된다. 그러나, 위 사서들은 현존하지 않거니와 심약이 이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송서』의 편찬과 어떠한 관계가 있었는지는 알 수없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송서』들은 대체적으로 [[북송]] 시대에 판본이 정착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상당부분이 산일되었다. 북송의 문인들이 『고씨소사(高氏小史)』와 『[[남사]]』를 기반으로 보충한 것도 적지않다. 중화서국의 표점본은 이에 대한 상세한 교감을 거쳐 실상을 알리고 있다. == 구성 == [include(틀:송서)] 본기(本紀) 10권, 지(志) 30권, 열전(列傳) 60권 총 10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 본기 === ||<-4> {{{#fff 《송서》(宋書) <본기> 구성}}} || ||<-4><^|1>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권1 || 본기제1[br]本紀第1 ||<|3> 무제본기[br]武帝本紀 ||<|3>[[무제(유송)|유유]](劉裕) || || 권2 || 본기제2[br]本紀第2 || || 권3 || 본기제3[br]本紀第3 || || 권4 || 본기제4[br]本紀第4 || 소제본기[br]少帝本紀 ||[[소제(유송)|유의부]](劉義符) || || 권5 || 본기제5[br]本紀第5 || 문제본기[br]文帝本紀 ||[[문제(유송)|유의륭]](劉義隆) || || 권6 || 본기제6[br]本紀第6 || 효무제본기[br]孝武帝本紀 ||[[효무제(유송)|유준]](劉駿) || || 권7 || 본기제7[br]本紀第7 || 전폐제본기[br]前廢帝本紀 ||[[전폐제(유송)|유자업]](劉子業) || || 권8 || 본기제8[br]本紀第8 || 명제본기[br]明帝本紀 ||[[명제(유송)|유욱]](劉彧) || || 권9 || 본기제9[br]本紀第9 || 후폐제본기[br]後廢帝本紀 ||[[후폐제(유송)|유욱]](劉昱) || || 권10 || 본기제10[br]本紀第10 || 순제본기[br]順帝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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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세도(郭世道), 엄세기(嚴世期), 오규(吳逵), 반종(潘綜)[br]장진지(張進之), 왕팽(王彭), 장공(蔣恭), 서경(徐耕), 손법종(孫法宗), 범숙손(范叔孫), 복천흥(卜天與)[br]허소선(許昭先), 여제민(余齊民), 손극(孫棘), 하자평(何子平) || || 권92 || 열전제52[br]列傳第52 || 양리전[br]良吏傳 ||[[왕진지]](王鎭之), [[두혜도]](杜慧度), 서활(徐豁), 육휘(陸徽), 완장지(阮長之), 강병지(江秉之), 왕흠지(王歆之) || || 권93 || 열전제53[br]列傳第53 || 은일전[br]隱逸傳 ||대옹(戴顒), 종병(宗炳), 주속지(周續之), 왕홍지(王弘之), 완만령(阮萬齡), 공순지(孔淳之), 유응지(劉凝之)[br]공기(龔祈), 적법사(翟法賜), [[도연명|도잠]](陶潛), 종욱지(宗彧之), 심도건(沈道虔), 곽희림(郭希林), 뇌차종(雷次宗)[br]주백년(朱百年), 왕소(王素), 관강지(關康之) || || 권94 || 열전제54[br]列傳第54 || 은행전[br]恩倖傳 ||[[대법흥]](戴法興), 대보명(戴明寶), 서원(徐爰), 완전부(阮佃夫), 왕도륭(王道隆), 양운장(楊運長) || || 권95 || 열전제55[br]列傳第55 || 삭로전[br]索虜傳 ||[[북위|삭로]](索虜) || || 권96 || 열전제56[br]列傳第56 || 선비토욕혼전[br]鮮卑吐谷渾傳 ||[[토욕혼]](吐谷渾) || || 권97 || 열전제57[br]列傳第57 || 이만전[br]夷蠻傳 || || || 권98 || 열전제58[br]列傳第58 || 저호전[br]氐胡傳 ||[[구지]](仇池), [[저거몽손]](沮渠蒙遜) || || 권99 || 열전제59[br]列傳第59 || 이흉전[br]二凶傳 ||[[유소(유송)|유소]](劉劭), [[유준(유송)|유준]](劉濬) || || 권100 || 열전제60[br]列傳第60 || 자서[br]自序 || ||}}}}}} || == 의의와 평가 == 『송서』는 표면적으로는 일반적인 정사의 전형을 잘 따르고 있지만, 서술 구조, 방식 그리고 사상적 배경에 대해 몇 가지 지적되고 있다. 먼저 송 문제 원가 연간 시대상을 원가의 치라고 극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효무제 이후 황실의 혼란이 이어지다 오다가 원가 연간은 비교적 안정적인 시대였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이것은 심약이 문벌귀족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가치 판단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송서』 전체 글이 당시의 정치적 시대상이 많이 반영된 것을 볼수 있다. 따라서 『송서』가 정사서치고는 당대사적인 성격이 매우 강함을 알수 있다. 특이한 점은 지(志)의 서술이다. 『송서』의 지는 그 연원을 [[삼국시대]]부터 [[한나라]] - [[위나라]]시대까지의 소급하여 서술하였는데 이를 통해 『[[정사 삼국지|삼국지]]』에서 빠진 내용을 보충했다는 평가가 있다. 이는 『송서』를 편찬한 하승천과 서원의 입전 기준이 까다로운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리고 조칙(詔勅)이나 주의문(奏議文) 등 기타 문학적 문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를테면 하승천전의 「간북벌표(諫北伐表)」, 왕휘전(王徽傳)의 「여강효사관서(與江湛辭官書)」 등이 있겠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현안 상황이나 의식 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고귀한 사료로 포함된다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하승천과 서원은 원사료적인 문장을 많이 중시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송서』의 독특한 점은 열전에서 두드러진다. 어떠한 중심 사안을 두고 관련인물의 이력, 연원 등을 부가적으로 기록한 것이 많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중국의 성인과 전통에 대해 불교와 유가가 크게 논쟁하는 단서가 되는 혜림의 흑백론(黑白論)이 나오는가 하면, 인도지역의 국가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승려 혜림(慧琳)과 혜의(慧議)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이른바 대서법(帶敍法)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한서]]』를 대표로 비슷한 인물을 하나로 묶는 유서법(類敍法)이 있다. 이에 대해 [[청나라]]의 고증학자 조익(趙翼)은 『이십이사차기(卄二史箚記)』에서 “입전(立傳)의 숫자는 줄이면서 그 사람을 없애지는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역사서를 서술하는 좋은 방법이다.”라고 호평하였다. 하지만 본기, 지, 열전 등의 서술과정에서 뜬금없는 인물이나 사건 그리고 사진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오류도 적지않다. 이 때문에 『송서』는 서술의 과정이 일목요연하지 않아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는 현재 사용되는 육십갑자의 계산기점이 되는 상원갑자법을 처음 도입한 책이기도 하다. 자세한 건 [[경진]] 문서 참조. [[분류:중국 정사]][[분류:남북조시대]][[분류:기전체]][[분류:단대사]][[분류:송(남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