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제11대 국회의원/전국구)] [include(틀:민주정의당 제11대 국회 전국구)]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송지영}}}'''[br]'''宋志英[* 宋志'''{{{+1 泳}}}'''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 SONG JI YOUNG'''}}}}}}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tv.pstatic.net/201410301744404631.jpg|width=100%]]}}} || || '''창씨명'''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21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7926&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야마모토 시에이]](山本志泳) || || '''호''' ||우인(雨人) || || '''본관''' ||[[여산 송씨]][* 1988년 1월 5일 [[여산 송씨]] 대종중 명예회장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10514#home|추대되었다]].] || ||<|2> '''출생''' ||[[1916년]] [[12월 13일]] || ||[[평안북도]] [[박천군]] 남면 동하동[* [[여산 송씨]] 집성촌이다.][br](현 [[평안북도]] [[박천군]] 맹하리)[* [[http://geumgye.kr/bbs/content.php?co_id=first0103|#]].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96315#home|#2]]] || ||<|2> '''사망''' ||[[1989년]] [[4월 24일]]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을지로3가]] 서울을지병원 || || '''학력''' ||[[난징대학|난징 국립중앙대학]] {{{-2 ([[중어중문학|중문학]] / 중퇴[* 3학년 때 중퇴했다.])}}}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92호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전 [[언론인]], [[소설가]], [[정치인]]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 초년기 === 1916년 12월 13일 [[평안북도]] [[박천군]] 남면 동하동(현 박천군 맹하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12살 되던 1928년 평소 [[정감록]]에 심취해있던 조부의 주도하에 가족들과 함께 [[경상북도]] [[영주시|영주군]] [[풍기읍|풍기면]] 금계동(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432번지로 이주했고, 이곳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21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7926&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본적을 두었다]]. 1943년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할 당시에는 [[중국]] [[상하이시]] 자오펑로(兆豊路) 288호에 살고 있었다. 10대에 영주군 풍기면 삼가리 달밭골에서 사촌 동생 유계(幽溪) 송지향(宋志香, 1918 ~ 2004)과 함께 [[한문]]·[[국문학]]·[[역사]] 등을 배웠고, 이후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단양)|단성면]] 가산리 상선암에서 [[http://www.yjinews.com/news/curationView.html?idxno=64168|수학하면서]] 독학으로 [[사서오경]]과 [[주역]]을 깨우쳤다. 그 뒤 1935년 7월 24일 [[동아일보사]] 맹중리(孟中里)분국 [[기자]]로 [[http://db.history.go.kr/id/npda_1935_07_26_x0005_1390|임명되면서]] 언론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이어 1936년 5월 9일에는 동아일보사 풍기지국 기자로 [[http://db.history.go.kr/id/npda_1936_05_14_w0005_0940|임명되었다]]. 1937년 6월 1일 동아일보사 풍기지국 총무에 [[http://db.history.go.kr/id/npda_1937_06_07_x0004_0630|임명되었고]], 1939년 11월 1일에는 동아일보사 신경지국 총무에 [[http://db.history.go.kr/id/npda_1939_11_03_w0004_0800|임명되어]] 만주특파원 등을 지내기도 했다. === 독립운동 === 1940년 동아일보사를 그만두고 상하이로 건너가 잠시 상하이시보(上海時報) 기자로 재직하다가, 같은 해 [[난징시]]로 가서 [[난징대학|난징 국립중앙대학]] [[중문학과]]에 입학했다. 그해 대학에서 만난 [[조일문]]·[[신영묵]]·[[이정선(1921)|이정선]]·[[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54|이일범]](李一凡)·박철원(朴哲遠)·박익득(朴益得) 등과 함께 [[중화민국 국민정부]] 특파원인 능지남(凌志男) [[상교]]와 접선했고, 이에 비밀결사 한족동맹(韓族同盟)을 조직했다. 그 뒤 [[쑤징허]](蘇景和)·왕해청(王海靑)·능담여(凌澹如)·임세원(林世源) 등 중국인 학우들의 협조로 [[일본군]]의 동향을 탐사하고 독립운동 참여를 희망하는 청년들을 규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각 지대(支隊) 등에 후송했다. 1943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김병호(金炳豪)를 통해 공작원이 되라는 권유를 받고 대학을 중퇴한 뒤 임시정부 특파원이 되었다. 이후 1년여 간 임시정부와 연계해 조선인 유학생들을 포섭하고 반일 선전을 하는 등 지하 공작활동을 하고 그 공작 현황을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장군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1944년 [[난징|남경시]]에서 김병호가 밀정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남경시를 비롯한 [[화중]] 지방 일대에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어닥치고 말았다. 결국 그는 조일문·이정선·이일범·김덕원(金德元) 등 동지들과 함께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고, 1944년 8월 15일 재외상해일본제국영사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21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7926&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선고받고]] [[일본]]으로 이송돼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복역 중이던 8월 9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으나]] 가까스로 화를 면했고, 일주일 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패하면서 비로소 석방되었다. === 광복 후 === [[8.15 광복]] 후인 1946년 민세(民世) [[안재홍]]의 한성일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이 때 문예지 백민에 '''젊은날의 노래'''를 발표하여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국제신문]] 기자를 거쳐 1958년 [[조선일보]]에 논설위원으로 입사했으며, 1년여 뒤에 편집국장으로 승진했다. 한편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을 역임하였다. 1961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68&docId=555320&categoryId=46668|민족일보]](民族日報)에 논설위원으로 몸담다가 [[5.16 군사정변]] 후 열린 [[혁명재판]]에서 사장 [[조용수]], 감사 안신규(安新奎)와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8년이 넘게 복역하면서 '''우수의 일월'''이라는 [[소설]]을 집필하였다. 결국 감형으로 1969년에 풀려났다. 1969년 10월 [[조선일보]]에 재입사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70년부터 3년간 무협소설 「천풍」을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다. 1979년부터 5년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지내며 1980년 [[신군부]]가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했을 때 입법의원으로 참가해 언론기본법을 제정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제6번)으로 당선되었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1984년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까지만 해도 진보언론인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전두환 집권기 들어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되는 등 적극적으로 [[신군부]]에 영합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욕을 왕창 퍼먹기도 했다. 1989년 4월 24일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을지로3가]] 서울을지병원[* 1996년 12월 경영악화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6120600099138011&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6-12-06&officeId=00009&pageNo=38&printNo=9620&publishType=00010|폐업했다]].]에서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9042500099215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9-04-25&officeId=00009&pageNo=15&printNo=7122&publishType=00020|별세했다]]. 향년 72세. 그의 유해는 1989년 4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81 ||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 [include(틀:민주정의당)] || '''-''' || '''당선 (6번)''' || '''초선''' ||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제11대 국회의원]][[분류:민주정의당 국회의원]][[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박천군 출신 인물]][[분류:여산 송씨]][[분류:1916년 출생]][[분류:1989년 사망]][[분류:실향민]][[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당뇨병으로 죽은 인물]][[분류:동아일보 관련 인물]][[분류:조선일보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