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후궁]][[분류:평산 신씨]] [include(틀:조선의 후궁(중종 ~ 고종))] ---- ||<-3> {{{#gold '''조선 명종의 후궁'''}}}[br]{{{#gold {{{+1 '''숙의 신씨 | 淑儀 申氏'''}}}}}} || ||<|2> '''{{{#gold 출생}}}''' ||<-2>미상 || ||<-2>장소 불명 || ||<|2> '''{{{#gold 사망}}}''' ||<-2>미상[br]{{{-2 (향년 알 수 없음)}}} || ||<-2>장소 불명 || || '''[[본관|{{{#gold 본관}}}]]''' ||<-2>[[평산 신씨|평산(平山)]] || || '''{{{#gold 부모}}}''' ||<-2>부친 신언숙(申彥淑)[br]모친 [[해주 최씨]] || || '''{{{#gold 부군}}}''' ||<-2>[[명종(조선)|명종]] || || '''{{{#gold 자녀}}}''' ||<-2>자녀 없음||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명종(조선)|명종]]의 [[후궁]]. 아버지는 강서 현령을 지낸 신언숙(申彥淑)이며, 어머니는 최응(崔凝)의 딸이다. == 생애 == 1548년(명종 4) 숙의(淑儀)가 궁궐에 들어오려면 본가에서 마련할 물품이 많으니 아버지 신언숙에게 6품의 직을 제수하라는 기록이 있다.[* 명종실록 8권, 명종 3년 12월 21일 임술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312021_001|#]] ] 이때 자전(慈殿) 즉, 왕의 어머니가 전교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후궁 봉작은 [[문정왕후]]의 뜻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숙의 신씨는 입궁하여 3년이 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해서 1551년(명종 6) 문정왕후는 숙의를 한 사람 더 뽑자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명종실록 11권, 명종 6년 2월 25일 계미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602025_002|#]] ][* [[인종(조선)|인종]]이 후사없이 일찍 죽었고, 명종도 이때까지 자식이 없어서 왕실에서는 후궁 소생이라도 태어나기를 바라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해 5월에 [[인순왕후]]가 [[순회세자]]를 낳았지만, 결과적으로 명종의 후궁들 중에서는 자식을 낳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 1562년(명종 17)에는 숙의 신씨의 본가 옆집에 살던 윤홍중(尹弘中)이 담장 문제로 신씨의 본가 여종을 매질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숙의 신씨가 명종에게 호소해 윤홍중이 강진(康津)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명종실록 28권, 명종 17년 4월 12일 을축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ma_11704012_001|#]] ] 이 일에 대해 사관은 본래 윤홍중의 사람됨이 좋지 않아서 애석한 일은 아니지만, 후궁을 위해 사사로운 사건에 왕이 나섰다고 비판하였다. 한편, 숙의 신씨의 정확한 생몰년은 알 수 없으나 《[[선조실록]]》을 보면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까지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593년(선조 26) 숙의 신씨는 아산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아산현감 권유(權愉)가 교만하고 포악하여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1일 계해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7011_001|#]] ] 숙의 신씨가 '종을 시켜 언문 편지를 보내어 기아(飢餓)를 호소'했다고 하니 전쟁 중에 많은 고생을 겪은 듯. >좌승지 이덕열(李德悅)에게 전교하였다. >"혜빈 정씨는 광주(廣州)에서, 숙빈 윤씨는 남양(南陽)에서, 숙의 이씨ㆍ신씨는 연안(延安)에서 음식물을 제급(題給)하여 줄 것을 감사에게 유지(有旨)를 내리도록 하라." >---- >《[[선조실록]]》 선조 28년 5월 26일 [[경빈 이씨|숙의 이씨]]와 함께 [[황해도]] 연안(延安)에서 지낸 것으로 보이지만, 1595년(선조 28) 이후부터는 기록에서 등장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