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숭실대학교)] [include(틀:서울특별시의 대학별 역사)] [include(틀:숭실대학교)] ---- [목차] == 역사 == ||
''모란봉이 다라오다 도라안즈며[br][br][[대동강]]수 훌너나려 감도난곳에[br][br]백운 간에 소사잇는 층층한 집은''[br][br]합셩 숭실 학교 || ||<)> {{{#FFD700 ''' - 합성 숭실대학 교가 1절 전문(全文)'''}}} || [[1897년]] 10월 10일,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인 [[윌리엄 마튼 베어드]](William Martyne Baird, 한국식 이름 '배위량(裵偉良)') 목사가 [[조선]] [[평안남도]] [[평양시|평양부]]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숭실학당]](崇實學堂)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것이 모체이다. 이때 쓰던 학교 자리는 [[2022년]] 기준 [[주조 로씨야 대사관|북한 주재 러시아대사관]]이 차지하고 있다. 주변에 농장 부지와 교회 부지까지 포함하면 더 넓다. [[http://www.ssu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6252|기사{{{-2 (숭대시보)}}}]] 교육이념은 [[개신교]] 정신에 바탕을 둔 '진리와 봉사'. 한국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으로 1938년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맞서 자진 폐교 후 1954년 서울에서 재건됐다.[[https://www.d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6434|숭실대학교]] 대한제국 말기와 국권 병탄 직후에 '대학(大學)'이나 '대학부(大學部)'라는 명칭을 가진 여러 교육 기관들이 존재했다. 이런 명칭을 가졌던 현재의 일부 대학에서는 [[조선총독부]]가 대학과 대학부라는 명칭을 가진 학교를 인가한 사실을 들어, 자신들이 당시 대학 레벨의 고등 교육 기관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당시 총독부의 '''[[숭실대학교|합성숭실대학]]''', [[경신학교]] 대학부(현 [[연세대학교]]), [[이화학당]] 대학부(현 [[이화여자대학교]])의 인가 내용을 보면, '''[[전문학교]]'''급 인가였으며, 대한제국의 인가 사항을 연장하여 임시로 인가한 것에 불과했고 정식으로 전문학교령이 제정된 이후에는 모두 인가를 상실했다. 즉, 이 시기 일본의 교육 법제상 [[제국대학]] 이외의 대학은 설립ㆍ운영할 수가 없어 1918년에 [[대학령]]이 제정되기까지는 일본 본토에서도 [[제국대학]] 이외에는 대학의 설립과 운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총독부가 상기 학교의 대학이나 대학부라는 명칭을 진짜 [[대학]]으로 인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법제상으로 명백한 사실이다. 애초에 '''숭실학당 대학부이나 다른 학당 대학부를 졸업한 이들은 [[학사]] 내지 [[준]][[학사]] 학위도 없었다'''. 이는 후에 생긴 전문학교들도 마찬가지이며 학위를 받기 위해선 [[구제대학]] 본과로 들어가거나 아예 대학을 입학해서 다시 시작하든 선교사의 추천서를 통해 1,2학년으로 편입하든 해야 했다. 따라서, '''1926년 [[경성제국대학]] 본과의 수업이 시작될 때가 한반도에서 최초로 대학교육이 시작된 시점이며, 광복 이전까지 조선의 대학 기관은 경성제국대학(실질적 후신은 현 [[서울대학교]]) 하나뿐이었다'''. 한편, 숭실학당은 이듬해 학교 이름을 합성 숭실대학(合聖 崇實大學, Union Christian College)로 개칭하였다. 평양 숭실학당 시절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학교였으며, 그 덕분에 명사들을 많이 배출한 학교였다. 대표적으로 [[안익태]], [[조만식]], [[한경직]], [[김현승]] 등이 있다. [[1925년]]에 [[조선총독부]]의 교육령에 따라서 모든 조선인 학교들은 고등 교육을 실시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고등 교육 기관이 아닌 합성 숭실대학은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1938년]] 3월, [[일본 제국|일제]]의 탄압에 따른 [[신사(신토)|신사참배]] 강요로 인해 종교적 신념을 저버릴 수 없었던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교직원과 학생들은 항거하는 의미에서 자진 폐교를 했다.[* 이때 폐교된 숭실전문학교의 시설은 대동학원이라는 곳에서 인수하여 대동공업전문학교로 탈바꿈하는데, 이후에 조선총독부 산하의 평양공업전문학교가 되었다가 [[북한]] 정권 수립 이후에는 [[김책공업종합대학]]이 된다.][* 한편 평양 숭실전문은 현재의 [[인민문화궁전]] 자리라는 설과, 바로 [[김일성종합대학]] 캠퍼스 자리라는 설이 있었는데, 1946년 미군이 만든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5/Pyongyangarmymapservice1946.jpg|지도]]를 보면 10(신양리) 부근에 Sungsil Middle School 및 College가 보인다. College 자리를 현재의 구글 지도나 구글 어스와 대조해보면 '''[[주조 로씨야 대사관]]'''이 나온다. 실제로 대사관 경내에서 [[http://www.sp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10|숭실전문학교 식수 기념석]]이 발견되었다.] '''서울 등의 다른 학교들이 모두 신사 참배에 굴복했음에 비해 숭실전문학교의 신사 참배 거부와 자진 폐교는 진정한 민족 자긍심의 발로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숭실대학교 재학생들은 종교 여부를 떠나 선배들의 의기를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1954년]] 4월 15일, [[광복절|광복]]이 된 후에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숭실학당은 대학기관으로 승격하여 숭실대학(崇實大學)이라는 이름으로 재건된다.[* 현재의 [[숭실중고등학교]]인 숭실학당 중학부는 [[1948년]]에 이미 재건되었으며, 1954년에 재건된 것은 '''숭실학당 대학부'''이다. 한편 현재의 숭실중고등학교와 숭실대학교는 별개의 법인 소속으로서, 이 학교들을 세운 사람들은 폐교 이전의 건학 주체들이 아닌 평양 숭실학당의 교직원과 학생 중 일부이다.] 이때 당시에는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저동 [[영락교회]]의 건물을 빌려서 학교를 운영했으며, 3년 뒤인 [[1957년]] 6월에 현재의 위치인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서울)|상도동]](당시 영등포구 상도동)에 학교 건물을 세워 최종적으로 이전하였다.[* '서울특별시청 관계자가 "원하는 땅 표시해라."고 말했을 때, 금방 평양에 돌아갈 줄 알았던 서울 숭실대학 관계자가 상도동 캠퍼스 자리에다가 작게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도시전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대에 국·공유지만 있는 게 아니고 사유지도 많은데 함부로 땅을 줄 리가 없다. 국립 대학교였다면 공용 징수해 버렸겠지만... 숭실대학교는 사립 학교이지 않은가?][* 학교 중문 앞에 위치한 4차선 도로 건너편 자리는 원래 학교 땅이었다고 한다. 다만 [[대한민국 제4공화국|유신]] 시절 학교 한가운데로 도로가 뚫리면서 건너편 땅을 팔았다고 한다.][* 1970~80년대에 정부 시책에 따라 강남 개발과 인구 분산을 목적으로 [[서울대학교|강북 도심에]] [[강남 8학군|있는 학교들을]] [[서울교육대학교|강남으로 옮기기]] 훨씬 이전에, 자진해서 한강 이남으로 이전한 유일한 학교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1970년]]에 전자계산학과(현재의 [[정보대학|IT대학]])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웠고 그 덕택에 현재까지 IT 분야에서 나름의 강세를 보이고 있다. [[1971년]]에 대전대학과 [[합체]]하여 숭전대학교(崇田大學校)라는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역사가 있다. 하지만 [[1982년]]에 문교부(현재의 [[대한민국 교육부|교육부]])의 승인을 받아 대전캠퍼스는 분리되어 [[한남대학교]]가 된다. 숭전대학교라는 이름은 [[1986년]]까지 유지하다가 그 이후에는 숭실대학교(崇實大學校)로 교명을 환원하였다. || [[1971년]]부터 [[1986년]]까지의 역사는 [[숭전대학교]] 문서를 참조. || [[1993년]]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종합 9위를 했던 [[리즈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2001년에 있었던 일명 어윤배 총장 사태[* [[2000년]] [[12월]] 학교법인 이사회가 도덕성 논란이 있던 어윤배 당시 총장의 연임을 강행하면서 발생한 학내 분규. 어 총장은 1997년 취임 이래로 쭉 도덕성 논란이 있었으며 임기 말인 2000년에는 '어윤배 총장 퇴진을 위한 공동투쟁위원회'까지 결성되기도 했다. 학교법인 이사회가 어 총장의 연임을 의결하자, 교수 협의회, 교직원 노동조합, 총학생회가 항거하여 반년 넘게 학교 운영이 마비되었다. 결국 어 총장은 9개월 만인 [[2001년]] [[10월]]에 사퇴하여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학교 이미지가 폭망했다.]로 인해 입시 결과나 학교 이미지에 중대한 추락 현상을 보였다. [[2005년]] 이효계 총장이 취임한 이래로 무보수 총장 선언, 숭실 2010 프로젝트, 캠퍼스 마스터플랜 등을 추진하면서, 입시 결과와 학교 이미지가 예전 수준 이상으로 회복되었다.[* 현재는 1990년대 입시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평이 있다. 다만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것이 2007학년도 입시는 2+1전형으로 인문은 수리를, 자연은 언어를 반영하지 않는 방식이었으며, 2008~2009학년도 입시는 3+1전형이지만, 인문계의 경우 수리 반영 비율이 10%(인문계 중 상경대(경영, 경제 등)는 언수외 10%/30%/30% 반영), 자연계의 경우 언어 반영 비율이 10%라는 낮은 수치에 의한 것이 크다. 2010학년도 이후라고 해도 그 10%가 15% 정도로 조금 올라간 수준이다. 실제로 입결 평균도 소폭 하락했고.] [[2006년]] [[광명시]]와 제2캠퍼스 설립을 위한 양해 각서까지 체결하고 부지까지 선정되었다가, [[2010년]]에 토지 매입 비용 등의 문제로 인해 학교 측에서 협약을 해지하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2055222|기사]] [[2007년]] 이래로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조만식기념관과 웨스트민스터홀([[2007년]] 2학기), 진리관([[2008년]] 2학기), 레지던스홀([[2010년]] 1학기), 학생회관([[2012년]] 1학기) 등이 있다. [[2017년]]에 창학 120주년을 맞이하였다. [[2019년]] 3월 숭덕관(120주년 기념관 겸)이 완공되었다. 경상관이 철거되는 자리에 9월까지 광장이 조성될 예정이다. == 상징 == === 교표 === ||
<:> [[파일:숭실대학교 심볼.svg|width=75%]]|| ||<:> {{{+4 {{{#60c1c3 ''' SOONGSIL SYMBOL MARK ''' }}} }}} || [[대동강]]([[평양]]숭실)과 [[한강]]([[서울]]숭실)의 함께함을 의미. 숭실대학교의 영문 약자인 SSU를 모티브로 2개의 S라인을 통해 [[대동강]]과 [[한강]]의 함께함을 의미하며 평양에서 시작한 한국 최초의 대학임을 상징한다. 이것은 통일 후를 준비하는 대학교를 강조하면서 미래를 향한 큰 물결임을 내포하고 있다. 평양 숭실의 자세한 내용은 이 문서의 [[숭실대학교#s-2|역사]] 부분 참조. === 교화 === ||
<:> [[파일:external/www.ssu.ac.kr/intro_c_03_02_01.gif|width=100%]] || ||<:> {{{+4 {{{#60c1c3 ''' 목튤립 ''' }}} }}} || === 상징물 === ||
<:>[[파일:숭실대백마.jpg|width=100%]] || ||<:> {{{+4 {{{#60c1c3 ''' 백마 ''' }}} }}} || 이 상징물은 캠퍼스 중앙 공원 한켠, 진리관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다. 뒤태를 보면 끊어진 부분이 있다. 끊어진 부분은 '자진 폐교로 단절된 16년의 숭실의 역사'를 뜻한다. 자세한 내용은 [[숭실대학교/캠퍼스#s-3.5|숭실대학교 특색있는 장소]] 부분 참조. [[분류:숭실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