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 추존 및 비정통 국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비정통 국왕[br]{{{+1 승화후 | 承化侯}}}'''}}} || ||<|2> '''출생''' ||1223년 이전[* 동생[[영녕공|영녕공 왕준]]의 나이에서 추산했다.] || ||[[고려]] || ||<|2> '''즉위''' ||[[1270년]] [[6월 20일]] || ||[[고려]] || ||<|2> '''사망''' ||[[1271년]] [[6월 23일]](향년 48세 이상) || ||[[고려]] [[전라도]] [[진도군|진도]][br](現 [[전라남도]] [[진도군]]) || || '''능묘''' ||미상 || ||<|2> '''재위기간''' ||'''{{{#670000 고려 비정통 국왕}}}''' || ||[[1270년]] [[6월 20일]] ~ [[1271년]] [[6월 23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개성 왕씨]] || || '''휘''' ||온(溫) || || '''부모''' ||부친 [[청화후|청화후 왕경]] 모친 미상 || || '''형제자매''' ||{{{#!folding 4남 중 장남 [ 펼치기 · 접기 ] [[승화후|승화후 왕온]](王溫) 단양백(丹陽伯) 왕서(王楈) [[영녕공|영녕공 왕준]](王綧) 수사공(守司空) 왕정(王珽)}}} || || '''배우자''' ||승화후비(承化侯妃)로 추정 || || '''자녀''' ||'''1남''' [[왕환(고려)|수사도 왕환]](王桓) || || '''작위''' ||승화후(承化侯) || || '''지지파''' ||[[삼별초]] ||}}}}}}}}}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후기의 왕족. 이름은 왕온(王溫). 봉지인 승화(承化)는 현재의 [[전주시]]이다. 즉 전주의 [[후작]]. == 생애 == [[정간왕|정간왕 왕기]]의 7대손이며 [[대령후|대령후 왕경]]의 외증손자이기도 하다. [[강종(고려)|강종]]의 제2비 [[원덕태후|정강원덕태후]]의 아버지 [[신안후|신안후 왕성]]의 증손자이다. 동생으로는 [[영녕공|영녕공 왕준]]과 사공(司空) 왕정[* 정간왕의 다른 후손들은 자손을 남기지 못하거나 조선 건국 후 성씨를 바꾸었으므로, 현재 모든 [[개성 왕씨]] 평양공파는 이 왕정의 후손이다.]이 있다. 1270년 고려가 [[몽골]]에 항복해 [[여몽전쟁]]을 끝내고 개경으로 환도하고자 하였을 때 이를 반대하던 [[삼별초]]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자신을 추대한 [[배중손]]과 [[노영희]]를 따라 전라도 [[진도군|진도]]로 이동하여 항전하였다. 이듬해인 1271년, 고려와 [[원나라]][* [[몽골]]은 1271년 [[쿠빌라이 칸]]이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치고 초대 황제가 된다.] 연합군이 진도 공격에 나서서 삼별초가 패배하면서 [[홍다구]]에게 살해당했다. >囑煕,雍曰,若事捷,當救兄死 >(왕준이) 왕희와 왕옹[* [[영녕공|영녕공 왕준]]의 장남과 차남이다.]을 불러서 말하였다. '만약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마땅히 형의 죽음을 구하여야 한다.' >---- ><<[[고려사절요]]>> 권19 당시 국왕이던 [[원종(고려)|원종]]은 물론 동생 [[영녕공|영녕공 왕준]]까지 그를 구하려 했는데, 특히 영녕공 왕준은 진도 공격에 종군한 두 아들 왕희(王熙)와 왕옹(王雍)에게 싸움에서 이기면 자신의 형을 죽음에서 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영녕공 왕준에게 적개심을 품고있던 [[홍다구]]가 지휘하는 몽골의 군대가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승화후 왕온은 아들 [[왕환(고려)| 왕환]](王桓)과 함께 침계리 인근에서 살해당했다. [[진도군]] 의신면에는 '전(傳) 승화후 묘'가 있는데, 전(傳)이란 알려져 있다는 뜻으로 승화후 왕온의 묘라는 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승화후 왕온의 묘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구전에 의하면 승화후가 사망한 후 진도군민들이 그 자리에서 시신을 수습해 묻었다고 한다. 이후 이 지역은 삼별초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진설리(陳設里)라 불렸으며, [[진도군/행정#s-1|진도읍]]에서 [[진도군/행정#s-4|의신면]] 운림산방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왕무덤재'''(王墳峙)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진도읍에서 [[803번 지방도]]를 타고 의신면 방향으로 가는 고개이다. 고개를 넘어가던 나그네들이 중턱 암반 위에 돌맹이를 던져 원혼을 위로했다한다.] 전(傳) 승화후 왕온의 묘 20m 아래에 묘가 하나 더 있는데, 승화후 왕온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한다. [[분류:고려의 왕자]][[분류:고려의 후작]][[분류:살해된 인물]][[분류:1271년 사망]][[분류:대립왕]][[분류:개성 왕씨 평양공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