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오다 사천왕)] [include(틀:오다 5대장)] [ruby(柴田 勝家, ruby=しばた かついえ)] (1522년? ~ [[1583년]] [[6월 14일]]) || [[파일:897px-Shibata_Katsuie_large.jpg|width=300]] || ||<#ffffff> [[파일:1024px-Japanese_Crest_Maru_ni_futatu_Karigane.svg.png|width=300]] || || '''두 마리 [[기러기]] [[가몬(일본)|가몬]]'''[* 시바타 카츠이에의 가문으로 기러기 가몬을 사용하였다.] || [목차] == 개요 == >'''매우 용맹한 무장이자 평생을 군사에 바친 사람.''' >---- >'''노부나가의 시대 일본에서 가장 용맹한 무장이자 과감한 사람.''' >---- >[[루이스 프로이스]][[https://ja.m.wikipedia.org/wiki/%E6%9F%B4%E7%94%B0%E5%8B%9D%E5%AE%B6|#]] [[일본]]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의 무장으로, 오다 가문의 가신. [[오다 노부히데]] 시기부터 오다 가문을 섬겼고, [[오다 노부나가]] 시기에는 그의 주요 가신으로 활약한 인물. == 생애 == [[기노시타 히데요시]]가 중용될 때 기존 가신들에게 찍힐까봐 아부하기 위해 고참들의 성에서 한자씩 따서 성을 바꾼 것이 '하시바'이며, '하([[羽]])'는 [[니와 나가히데]]에서, 시바([[柴]])는 시바타의 성에서 따왔다. 본래 노부나가의 동생인 노부유키 파에 서서 활약했다. 그러나 노부유키가 한 번 패하고 노부나가에게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차 모반을 꾀하자 차마 그 꼴을 못본 카츠이에는 노부유키의 모반을 밀고했고 노부나가에게 붙어 이후 죽을 때까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활약하였다. 오다 가문 최강의 [[맹장]]으로 용명을 떨쳤으며 그래서 붙은 별명이 '''[[오니]] 시바타([[鬼]]柴[[田]])''', '''돌격 시바타(かかれ[* かかれ(가카레)는 전국 시대 관련 매체에서 주로 대장급 무장들이 많이 외치는 말로 "덤벼라!" "돌격하라!" 정도의 뜻이다. 동사 かかる는 흔히 '걸리다'라는 뜻으로 제일 많이 쓰이지만 일어사전을 찾아보면 '덤벼들다, 공격하다'의 뜻으로도 쓰인다.]柴田)'''. 그의 통솔력을 보여주는 일화로 [[비와호]] 동남에 위치한 쵸우코지성에 가츠이에의 군세가 [[롯카쿠 요시카타]]의 맹공으로 성에 틀어박힌 채 고립되었는데 거기에 물과 식량마저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자 가츠이에는 큰 항아리에 성에 남은 물을 모두 모아 병사들에게 한 사발씩 먹이고 자신의 창으로 항아리를 깨면서 "이제 성에 남은 물이 없으니 죽기로 싸우는 일만 남았다"며 병사들을 고무시켰다. 파부침주([[破]][[釜]][[沈]][[舟]])와 비슷한 효과. 결국 그와 그 병사들은 죽기로 싸워 적의 포위망을 돌파, 성에서 탈출하여 퇴각하는 데 성공한다. 이 일화로 '''독깨기 시바타([[瓶]][[割]]り柴田)'''라는 이명도 얻었다. 항상 여러 방면에 적을 두고 싸웠던 오다 가문의 일개 방면군을 맡아 활약했으며 [[니와 나가히데]], [[아케치 미츠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타키가와 카즈마스]] 등 중신 중에서도 필두 가로에 속하는 인물로,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격파한 후 노부나가는 가츠이에에게 에치젠을 맡기고 나아가 [[호쿠리쿠]](北陸) 방면 공략을 담당하게 했다. 한때는 테도리가와에서 [[우에스기 겐신]]에게 대패[* 히데요시가 멋대로 전선을 이탈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나, 가장 큰 원인은 도하 직후 테도리카와가 범람하여 퇴로가 차단되고 전군이 분단된 상태에서 우에스기 군의 급습을 받아 각개격파 당했기 때문. 이 때문에 일각에선 우에스기 군이나 그와 연합한 세력이 오다 군에게 수공을 건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하여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겐신의 급사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노부나가의 원군은 강 건너에서 도와주지 못하고 지켜만 보다, 간신히 빠져나온 시바타만 데리고 후퇴한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의 급습으로 패사했을 즈음에는 엣츄 방면에서 겐신 사후의 우에스기 가문 공략 중 이었고 이와중에 우에스기 측의 우오즈성을 함락 시켰다. 당시 장자였던 [[오다 노부타다|노부타다]] 역시 니죠 성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순서대로라면 시바타가 권력을 쥐었어야 할 것이었으나, 북방에서 어물거리는 사이에 히데요시가 당시 적대하던 모리와 재빨리 화평하고 돌아와 아케치 미츠히데를 격파하며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히데요시보다는 카츠이에가 훨씬 유력한 후계자로 받아들여졌으나, [[키요스 회의]]에서 결정적으로 주도권을 뺏기게 된다. 대립을 거듭한 끝에 이후 히데요시와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맞붙었으나 이번에도 [[기동전]]에서 앞선 히데요시 군에 패배하여 자살하였다. == 기타 ==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프로이스]]는 노부나가가 가장 아끼는 두 장수 중의 한 명으로 언급했으며, 명예를 중시하는 가츠이에와 밑바닥 출신인 히데요시는 도저히 죽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마에다 토시이에]]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여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서도 투항을 거부하고 할복을 시도, 천수각에 불을 붙여 아내인 오이치와 함께 죽었다. 노부나가 집권 초창기에는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유키|노부유키]]와 함께 모반을 도모했었는데도 불구하고 용서받았고, 노부유키의 두번째 반란에서 노부나가의 편에 선 이후로는 완전히 노부나가의 심복이 되어 군단장으로 중용되었다. 그의 사후에는 노부나가의 적통인 산보시를 옹립하려 드는 히데요시와의 정권 다툼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노부나가의 누이 [[오이치]]를 아내로 맞이하기도 했다.[* 노부나가의 가족 사랑은 끔찍해서 친인척을 죽였다는 이유로 절간에 불을 싸지르거나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이치의 경우는 조금 다른데, 첫번째 결혼 생활은 남편 아자이 나가마사와 오빠 노부나가가 적대 관계로 치닫는 등 이례적으로 불행했고, 오이치의 두번째 결혼은 노부나가 사후에 일어난 일이라서 노부나가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다.] 또한 마에다 토시이에가 배신했을 때도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 때까지의 공을 칭찬하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프로이스는 '''훌륭한 [[기사도]] 정신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 == 대중매체에서 == [[시바타 카츠이에/기타 창작물]] 참조. [[분류:센고쿠 시대/인물]][[분류:오다 사천왕]][[분류:다이묘]][[분류:센고쿠 시대/전쟁 사망자]][[분류:할복한 인물]][[분류:인물신]][[분류:메이토구 출신 인물]][[분류:1583년 사망]][[분류:종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