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동아시아의 경제사]] [목차] {{{+4 [[食]][[邑]]}}} == 개요 == 식읍은 [[동아시아]]에서 [[종친]], [[공신]], [[대신]]들에게 [[공로]]에 대한 특별 [[보상]]으로 주는 영지(領地)이다. 식읍을 받으면 [[지역]] [[조세]]를 중앙 정부 대신 수취할 수 있는 수조권을 받게 된다. == 내용 == 간단히 말해서 식읍은 공이 많은 [[신하]]에게 내리는 [[토지]]와 [[백성]]이다. 식읍을 받은 신하는 본래 국가가 식읍에서 거둬야 하는 [[조세]]를 백성들로부터 대리하여 수취할 수 있고, 백성들의 [[노동]]력을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다. 식읍은 백성들의 가호 단위로 센다. 예를 들자면 식읍 50호. 식읍은 훈작(勳爵)의 수단으로서도 활용되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구체적인 식실봉(食實封) 개념이 도입되면서 식실봉이 없으면 식읍은 명목에 지나지 않았다. 식실봉은 대체로 식읍 1천 호 이상부터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규모는 대개 명목상 식읍의 1/10 안팎이었지만 경우에 따라서 그 절반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고려시대부터 훈작의 상속이 사라지면서 역시 훈작 개념인 식읍 역시 상속되지 않게 되었다. [[한국사]]에서는 [[신라]], [[고려]]의 여러 공신 및 [[조선]] 초기까지 [[개국공신]] 위주로 식읍이 배분됐으나 [[세종(조선)|세종]] 18년(1436) 완전히 철폐된다. == 신라시대 식읍, [[녹읍]], 봉읍의 차이 == [[녹읍]]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일종의 [[보너스]] 개념이다. 식읍과 녹읍의 차이는 녹읍은 직역([[벼슬]])의 대가(소위 나라의 녹을 받는다)로 받는 것이고 식읍은 벼슬을 하지 않아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세습]]이 인정되지 않는 [[녹읍]]과는 달리 자산으로 여겨져서 세습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인문(신라)|김인문]]은 [[삼국통일전쟁]] 당시 식읍을 받았는데,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를 보면 무려 2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김인문의 후손인 김흔(金昕)이 [[보령시]]에 대대로 물려받은 식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봉읍과 비교할 때, 온전히 그 [[소유권]]까지 주는 봉읍(封邑)[* 중국 고대 [[봉건제]] 시절에나 있던 것으로, 한국사에서는 실제로 시행된 적은 없다.]과는 달리 식읍의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나라에 속한다. == 특권 == 그 수가 많든 적든, 식읍을 받는 것은 대단한 영예이다. 단 1백 호의 식읍만 받아도, 100 가구로부터 세금을 받는 셈이니 물질적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었다. 게다가 [[화폐]]가 잘 발달하지 않거나 돈이 없는 가호에서는 노동력이나 군역으로 대신 부과할 수도 있으니 말 그대로 작은 마을의 왕이 되는 셈. 식읍이 대단한 건 옛날에는 인구가 현대처럼 특정 지역에 몰려사는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식읍 규모가 크면 거의 [[마을]]이나 심지어 [[도시]] '''몇 개'''를 받았다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무왕]]이 [[장보고]]한테 식읍 2천 호를 내려줬다고 하는데, [[한국]]으로 치면 거의 중견 도시 몇 개를 보너스로 받았다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바친 대가로 [[태조(고려)|태조]]에게 [[경주시|경주]] 전체를 식읍으로 받았다. 즉 신라의 [[소유권]]만 가져가고 자치권은 계속 보장한 것이다. == 유명 케이스 == 너무나 큰 [[특권]]이기에 [[삼국통일전쟁]] 때는 공을 세운 [[김유신]], 박유(朴紐), [[김인문(신라)|김인문]] 등 몇몇 인물에 각각 3백~5백 호 정도를 내려줬다가 [[통일신라]]부터는 사실상 거의 폐지되었는데, 이후 몇백 년만에 [[장보고]]가 식읍 2천 호를 받았다. 그리고 [[견훤]]이 [[왕건]]한테 투항할 때 왕건이 양주를 견훤한테 식읍으로 지급했다.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던 [[경순왕]]의 예와 함께 이처럼 '''특정 지역 전체'''를 식읍으로 받는 케이스도 있다. 견훤이 받은 양주 식읍은 2019년 기준 [[양주시]] + [[의정부시]] + [[동두천시]] + [[구리시]] + [[남양주시]] + [[중랑구]] + [[노원구]] + [[강북구]] + [[도봉구]] + [[성동구]] + [[광진구]] 일대이다. 견훤이 받은 양주 식읍에 2019년 살고 있는 인구는 무려 400만 명(...). 물론 나말여초에 한강 유역은 지금과 달리 행정구역 배분만 봐도 그리 인구가 많은 지역은 아니었다. 다만, [[왕건]]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신라 [[경순왕]]과 달리 오랫동안 적대를 해왔던 [[견훤]]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견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견훤의 근거지인 [[후백제]] 부근이나 견훤의 고향 [[상주시]]가 아닌 고려의 수도 [[개성시]] 근처의 양주를 식읍으로 준 것이다.[* 양주는 지금의 경기도 일대이기 때문에 한성백제와 연관성이 있기에 그가 가진 [[백제]]의 정통성으로 인정해서 [[후백제]]를 동요시키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930년]] [[고창 전투]]에서 [[왕건]]의 승리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던 [[권행]]한테 왕건이 '''[[안동시]](고창)를 식읍으로 하사'''한 기록도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견훤]]도 [[후백제]] 왕을 자칭하기 전에 신라의 식읍 2천 호를 자칭했는데, 이건 신라 조정에서 인정한 건 아니고 그냥 자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