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일보 사장)] [목차] == 개요 == [[조선시대]] 말 ~ [[대한민국]]의 [[언론인]], [[독립유공자]] == 생애 == [[1895년]] 출생. 호는 우창(于蒼). [[구한말]]의 무신인 태휴(泰休)의 아들이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를 졸업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하고 유인신문(油印新聞)인 『아등(我等)의 소식』을 발간하는 한편,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총장으로 있었다. [[1924년]] 귀국하여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를 [[송병준]](宋秉畯)으로부터 8만 5000원에 인수하여 신문의 면목을 일신하였다. 사장에는 [[이상재]](李商在)를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가 [[1927년]] 이상재가 사망하자 사장에 취임하였다. 1931년까지 사장에 재직하는 동안 서울 견지동에 새 사옥을 지었고, 1929년부터 시작한 귀향남녀학생문자보급운동은 [[일제강점기]]에 신문사가 벌인 민중운동으로는 성공적인 사례였다. 또한, [[신간회]]가 창립될 때에 그 간부직을 맡았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많은 돈을 써가면서 민족지를 키우는 데 노력하였다. [[8.15 광복]] 후 [[1949년]]부터는 [[주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주중국대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 여담 == *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세워진 임시정부에서 국호를 정하기 위해 회의를 할 때 신석우는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정하자”라고 주장했다. [[여운형]]이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대한제국|나라]]가 망했는데 또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반대하고 조선공화국을 주장했지만,[* 이외에도 신한민국, 고려공화국 등이 후보로 올라왔다.]신석우는 “대한으로 [[경술국치|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8.15 광복|흥해보자]]”고 설명해 모두 동의했다. 이후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던 [[이동녕]]이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지금부터 이 나라는 [[대한제국]]이 아니라 민간이 주도하는 [[대한민국]]이다”라고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이때 처음 등장했다. * [[이범석]]의 누이의 남편으로 이범석의 매형이다. 신석우의 중국 망명은 이범석이 항일운동을 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분류:1895년 출생]][[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일보 관련 인물]][[분류:와세다대학 출신]][[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195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