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436년 출생]][[분류:1502년 사망]][[분류:거창 신씨]][[분류:조선의 국구]][[분류:조선의 공신]][[분류:조선 좌리공신]][[분류:조선의 문관]][[분류:영의정]][[분류:좌의정]][[분류:우의정]] [include(틀:조선의 부원군(국구))]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11208, #7e2f22 20%, #7e2f22 80%, #511208)" '''{{{#ffd400 신승선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조선 영의정(태조-연산군))] ----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태조-연산군))] ---- [include(틀:조선 익대공신)] ---- [include(틀:조선 좌리공신)]}}}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11208, #7e2f22 20%, #7e2f22 80%, #511208)" '''[[연산군|{{{#ffd400 조선 연산군의 장인}}}]] | [[거창군부인|{{{#ffd400 폐비 신씨(거창군부인)의 부친}}}]][br]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 장성공(章成公)[br]{{{+1 신승선}}}[br]慎承善'''}}} || || '''출생''' ||[[1436년]]([[세종(조선)|세종]] 18)|| || '''사망''' ||[[1502년]] [[7월 13일]][* [[율리우스력]] [[7월 3일]].] (향년 65 ~ 66세)[br](음력 [[연산군]] 8년 5월 29일)|| || '''[[봉호|{{{#ffd400 봉호}}}]]'''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 || '''[[시호|{{{#ffd400 시호}}}]]''' ||장성(章成)|| || '''[[본관|{{{#ffd400 본관}}}]]''' ||[[거창 신씨]]|| || '''[[자(이름)|{{{#ffd400 자}}}]]''' ||계지(繼之), 원지(元之)|| || '''[[아호|{{{#ffd400 호}}}]]''' ||사지당(仕止堂)|| || '''부모''' ||아버지 - 신전(慎詮)[br]어머니 - [[순흥 안씨]] 안강(安剛)의 딸|| || '''부인''' ||[[중모현주]][* [[세종(조선)|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장녀.]|| || '''자녀''' ||'''슬하 3남 5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신수근]][* [[중종(조선)|중종]]의 정비 [[단경왕후]]의 아버지.][br]차남 - 신수겸(慎守謙, {{{-3 1453 ~ 1506}}})[br]3남 - 신수영(慎守英, {{{-3 1461 ∼ 1506}}})[br]장녀 - [[전주 이씨]] 이형(李泂)의 처({{{-3 1466 ~ }}})[br]차녀 - 남경(南憬)의 처({{{-3 1467 ~ }}})[br]3녀 - 안환(安煥)의 처({{{-3 1469 ~ }}})[br]4녀 - [[거창군부인]][* 10대 국왕 [[연산군]]의 왕비.][br]5녀 - 유윤범(柳潤範)의 처}}}||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연산군]]의 장인이다.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연산군일기 44권, 연산 8년 5월 29일 경자 2번째기사] == 생애 == [[1444년]] 세종의 손녀이자 [[임영대군]]의 딸인 [[중모현주]]와 결혼하였고 이후 [[세조(조선)|세조]] 때부터 [[1456년]] [[음서]] 천거와 과거 장원 급제 등으로 문과에 진출했다. 예문관제학, 이조참판, 병조참판, 공조참판, 지돈녕부사, 동지돈녕부사 겸 동궁빈전 세자빈객, [[공조판서]] 겸 동궁빈전 세자빈객, [[병조판서]], 특진관, 좌참찬,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사소대장,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이 된 후 [[영의정]]에 이르렀다. === [[세조(조선)|세조]] ~ [[예종(조선)|예종]] 시절 === [[1453년]] 진사과에 합격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고작 '''18세'''였다. 용모가 아름다워 [[임영대군]]의 [[사위]]로 발탁되었다. [[1454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돈녕부승(敦寧府丞), 정랑 등을 거쳐 [[1466년]](세조 12) 1월 당상관에 승진하면서 병조참지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3월 알성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뒤 병조참판에 승진, 그 해에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3등으로 급제하고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였다. [[1468년]] [[남이]] 사건 처리에 참여한 공적으로 익대공신이 되었다. === [[성종(조선)|성종]] 시절 === [[1471년]] 성종을 임금으로 세우는 데 참여한 공적으로 좌리공신이 되었다. [[1478년]]부터 세자 [[연산군]]을 2년 반 동안 [[과외]]시켰는데, 세자가 눈에 띄게 성장하자 그 후부터 성종이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그 후 고위직인 [[병조판서]]로 임명되었다. [[1484년]]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대, [[1486년]] 병조판서 겸 특진관(兵曹判書兼特進官)이 되었다. [[1487년]] 성종은 "병조 판서 신승선의 딸로 세자빈을 삼도록 하라."라는 명을 내린다. [[1487년]] 딸이 세자인 연산군의 빈(嬪)으로 뽑히자 그를 계기로 좌참찬, [[1488년]] 한성부판윤, [[1489년]] 예조판서, [[1491년]] 사소대장(四所大將)을 겸대,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1492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후 [[우의정]]이 되었다. === [[연산군]] 시절 === 1495년∼1499년에 걸쳐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서 『[[성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상술했듯 신승선은 연산군의 [[장인어른]]이었다. [[소혜왕후]]는 이 점을 감안해 신승선을 [[좌의정]]으로 승격시켰다가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사위]]의 난폭함으로 인해 신승선은 병을 핑계 삼아 여러 번 휴가를 냈다. 그의 호가 사지당(仕止當)인 이유도 '나 [[벼슬]] 안 할래'라는 자신의 의견을 담은 것이다. 신승선은 결국 사직한 뒤인 1502년 별세하였고[* 공교롭게도 이 당시 현직 영의정이던 인수대비의 사촌오라버니 [[한치형]]도 이 시기에 별세하였다. 신승선 다음에 한치형이 영의정을 했다.], [[갑자사화]]가 일어나며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 사후 == 신승선이 사망할 당시 연산군은 중전 신씨가 거애(장례에서 곡을 하는 것)를 하지 못하도록 막고 고기 반찬을 먹도록 하였다. 이것만 보면 연산군이 쓸데없는 패악질을 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신씨는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였다. 즉 신씨가 자칫 건강을 해치고 [[유산]]까지 할 것을 우려해서 일부러 막은 것에 가깝다. 이 당시 신하들도 "비록 친아버지의 장례이지만 임산부이니 고기 반찬을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ja_10805029_003|#]] 한편 신씨가 임신한 아기는 이후 유산된 것으로 추정한다. == 여담 ==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왕자인 [[임영대군]]의 [[사위]]로 발탁된 결정적인 이유도 '''[[외모지상주의|잘생겨서 였다고 한다.]]''' 현재 그의 [[영정]]은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외모는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당시 기준에 [[미남]]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 가족 관계 == 아내는 [[임영대군]]의 딸이었으며, 슬하에 [[신수근]], 신수겸, 신수영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전부 [[중종반정]] 때 [[임사홍]]과 함께 미리 제거당해 대가 끊겼다. 또한 [[연산군]]의 정비인 [[거창군부인]] 신씨는 그의 딸이며, [[중종(조선)|중종]]의 첫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도 그의 손녀로 장남 신수근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