申寧均 1916년[*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32500329209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3-25&officeId=00032&pageNo=9&printNo=12766&publishType=00020|해당 링크]].1987년 당시 71세라고 한다.] ~ ? [목차] == 소개 ==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초창기에 활동했던 [[정치깡패]]. 별명은 닷또상[* 일본 자동차회사 [[닛산]](日産) 최초의 소형승용차 DATSUN에서 따왔다.]으로 키는 [[단신|160cm도 되지 않았지만]], 80kg 가까운 체중에서 나오는 엄청난 근력과 빠른 발을 지녔다고 한다. == 생애 == 일제강점기 시절 [[김두한]]의 부하로 해방 이후 김두한이 대한민청(대한민주청년총동맹)의 감찰부장으로 있을 때, 그 밑의 조사과장을 맡았고, 좌우대립과정에 [[정진룡]]을 직접 살해한 장본인이었다. 정진룡은 [[우미관]]에서 김두한과 한솥밥을 먹던 동료였으나 해방 이후 활개치는 [[공산주의자]]들에 회유되어 [[신불출]] 휘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좌익주먹패로 앞장서 김두한과 [[조선청년전위대]]를 결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두한은 부친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전위대를 빠져나와 대한민청에 소속, 별동대를 이끌고 좌익단체 및 좌익인사들을 테러하는 반공활동을 하였고 시대의 비극으로 정진룡과 김두한은 극심한 충돌을 빚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1947년]] [[4월 19일]] 저녁 8시 경, 정진룡 패거리 측 주최로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내용의 악극 '청춘의 봄'을 공연하고 있던 국제극장에 김두한이 출입하여 정진룡과의 트러블이 있었고, 바로 다음날 4월 20일 낮 1시 경 김두한의 결정 및 지시 하에 정진룡을 기습하여 그의 일당 [[김천호]]를 포함 좌익전위대 35명을 권총위협으로 사로잡아 납치 후 모두 대한민청 별동대 본부 지하로 끌고가 감금시켰다. 일전에 정진룡이 김두한에게 선전포고했었던 기억에 화가 치밀어 오른 신영균이 홧김에 두 명을 쇠파이프로 각각 세 차례 씩 흉부를 강타하여 정진룡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중상을 입은 김천호는 현장에서 혼수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경을 헤매다 악화로 사망. 기적적으로 살아나 월북했다는 설이 있으나 밝혀진 바 없다. [* 정진룡, 김천호 외 다수 좌익전위대원들 모두 감금과 구타로 중경상을 입었다.] 김두한과 그의 부하들인 신영균, [[김영태]], [[김관철]], [[홍만길]], [[조희창|상하이 조]], [[휘발유(야인시대)|고경주]] 등등 총 14명의 인물들이 이 폭력, 살인사건에 가담했다. 신영균은 이 사건으로 인해 형을 선고받았으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에 풀려난 후, 대한민청의 후신 단체인 청년조선총동맹의 제3대 회장을 역임했다.[* 참고로 초대 회장은 야인시대에도 등장한 상관인 [[유진산]], 제2대 회장은 역시 야인시대에 등장한 [[박용직]]이다.]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으로 휴전이 되자 김두한이 조직을 해산하였고, 그 후에 신영균은 고향으로 내려가 사업을 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1987년]], 경향신문에서 대한민청에대한 연재기사를 냈을 때 김두한의 우미관 식구들과 함께 근황이 공개되며 '청년운동 반세기'에서 자신의 정치깡패 행위를 미화하는 인터뷰를 하고, 김두한의 추모행사에 꼬박꼬박 모습을 드러내는 사진을 보낸 것으로 보아 1987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연도를 빨리 잡아서 기사가 나온 1987년 당해로 가정하면 나이가 향년 71세가 된다.] 즉 또래의 조폭치고는 [[장수]]한 것. 반대로 아직도 살아있을 경우 102세가 된다. == 대중매체에서 == === 드라마 [[야인시대]] === * [[신영균(야인시대)]] 문서 참조. [각주] [[분류:조직폭력배]] [[분류:대한민국의 범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