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총독부 중추원)] 申應熙 1858년 11월 2일 ~ 1928년 2월 12일 [목차] == 개요 == [[조선]] 후기, [[대한제국]]의 무신이며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얼마나 친일행위가 심했는지 사람들도 말을 나눠보기 전까진 원래 조선 사람이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고 한다. == 생애 == 그는 [[박영효]]의 심복이었으며 [[1884년]]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정난교]], [[서재필]], [[이규완(1862)|이규완]]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망명 생활 동안 [[박영효]]를 열심히 경호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귀국하였고 [[1895년]]에 [[박영효]], [[이규완(1862)|이규완]], [[정난교]] 등과 함께 [[명성황후]]의 암살을 계획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그의 동료였던 [[박영효]], [[이규완(1862)|이규완]], [[정난교]], [[우범선]], [[이두황]]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7년 귀국해서 육군 참령으로 복위되어 [[대한제국 군대 해산|군대해산]]을 지휘했고, 11월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1908년 4월 [[대동학회]] 평의원, 5월 대한학회 찬성회 발기인, 6월 대한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달 내부대신 송병준의 추천으로 전라남도관찰사 겸 전라남도 재판소 판사에 제수되었다. 관찰사로 재임하며 1909년 8월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각 지역을 순시하면서 의병운동을 절멸하는데 앞장섰다. 1910년 5월 광주농림학교 교장을 겸임했다. [[한일합방]]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조선 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었다. 이후 [[3.1 운동]] 때 황해도지사로서 경고문을 작성하였고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총독부에 건의한다. 황해도 각지에 3.1 운동 참가자를 색출하는 자제단을 조직했다. [각주] [[분류:급진개화파]][[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1858년 출생]][[분류:192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