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송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77449 0%, #2e8b57 20%, #2e8b57 80%, #277449); color: #ece5b6" '''북송 제6대 황제[br]{{{+1 신종 성황제 | 神宗 聖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Shenzong.jpg|width=100%]]}}} || ||<|2> '''출생''' ||[[1048년]] [[5월 25일]] || ||[[북송]] [[카이펑시|동경 개봉부]] 복왕 사저[br](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 ||<|2> '''즉위''' ||[[1067년]] [[1월 25일]] || ||[[북송]] [[카이펑시|동경 개봉부]] 변경 황궁[br](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 ||<|2> '''사망''' ||[[1085년]] [[4월 1일]] (향년 37세) || ||[[북송]] [[카이펑시|동경 개봉부]] 변경 황궁[br](現 [[허난성]] [[카이펑시]] 구러우구) || || '''능묘''' ||영유릉(永裕陵) || ||<|4> '''재위기간''' ||'''{{{#ece5b6 북송 황태자}}}''' || ||[[1067년]] [[1월 10일]] ~ [[1067년]] [[1월 25일]] || ||'''{{{#ece5b6 제6대 황제}}}''' || ||[[1067년]] [[1월 25일]] ~ [[1085년]] [[4월 1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조(성씨)|조(趙)]] || || '''휘''' ||중침(仲鍼) → 욱(頊) || || '''부모''' ||부황 [[영종(송)|영종]][br]모후 [[선인성렬황후]] || || '''형제자매''' ||4남 4녀 중 장남 || || '''배우자''' ||[[흠성헌숙황후]], [[흠성황후]], [[흠자황후]] || || '''자녀''' ||14남 10녀 || || '''작호''' ||광국공(光國公)[br]→ 회양군왕(淮陽郡王) → 영왕(潁王) || || '''묘호''' ||'''[[신종]](神宗)''' || || '''존호''' ||소천헌고문무인효황제[br](紹天憲古文武仁孝皇帝) || || '''시호''' ||소천법고운덕건공영문열무흠인성효황제[br](紹天法古運德建功英文烈武欽仁聖孝皇帝) || || '''연호''' ||희녕(熙寧, [[1068년]] ~ [[1077년]])[br]원풍(元豊, [[1078년]] ~ [[1085년]])[* 연호에서 유래한 원풍천자(元豊天子)라는 별칭이 있다.] || || '''절일''' ||동천절(同天節) || }}}}}}}}}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송]]의 제 6대 황제.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소천법고운덕건공영문열무흠인성효황제(紹天法古運德建功英文烈武欽仁聖孝皇帝). 휘는 조욱(趙頊). 전대 황제인 [[송영종]]와 [[선인성렬황후 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 생애 == === 황제 즉위 전 === 1048년 5월 25일(음력 4월 10일), 복안 의왕궁에서 복왕 조윤양의 13번째 아들인 조종실[* 송 인종의 양자로 입적했으며 송 태종의 손자.뒤의 송 영종으로 즉위했으며 나중에 조서로 개휘했다.]과 인종의 계후인 자성광헌황후의 조카[* 신종의 어머니 선인성렬황후 고씨의 이모가 인종의 부인인 자성 광헌 황후이다.]이자 고준보의 딸인 [[선인성렬황후 고씨|고도도]][* 선인성렬황후 고씨의 아명]의 사이에서 적장자로 태어났다. 초명은 중침(仲针)이었다. 인종 가우(嘉佑) 8년(1063년)에 광국공(光国公)에 봉해졌고 아버지인 조종실[* 인종의 양자이자 황태자가 된 후 휘를 조서로 개휘했다.]이 인종의 뒤를 이어 북송의 제5대 황제 영종이 되고 난 뒤, 치평(治平) 원년(1064년)에 회양군왕(淮陽郡王), 영왕(潁王)에 봉해졌다. 치평 3년(1066년) 황태자가 되었고 휘를 욱으로 바꿨다. 1년 후 아버지 영종이 붕어하자 즉위하였다. === 재위 기간 === 당시 [[북송]]은 평화로운 듯 하면서도 여러 가지 모순에 빠져 있었는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서하]]와 [[요나라]]에 바치는 막대한 세폐, 관료의 증가로 인해 발생한 관료제 유지 비용 증가, 황실의 비용 증가, 군사비 지출 증가 등으로 인한 재정 적자였다. 이러한 재정 적자는 자연스레 농민들을 압박했고, 농민들은 지나친 세금을 견디지 못하거나 대지주들에게 부당한 방법으로 땅을 빼앗기며 유랑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20살의 젊은 나이에 즉위한 신종은 이러한 송나라 내부 사정과 북방 민족에 억눌리고 있는 송의 현실을 타파하고 싶어했다.[* 사실 이런 문제 인식을 위해 인종 경력연간에 범중엄 중심으로 개혁을 단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1년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후 인종의 뒤를 이은 신종의 아버지 영종도 이 부분 문제 해결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 부분을 조정에서 논의했다. 하지만 영종은 병약하여 이를 실행하려던 찰나에 붕어했다.]. 특히 그는 [[당태종]]처럼 송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군사력을 키워야 했다. 그러나 군사력을 키우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국고였다. 당시 북송의 국고 부족 현상은 사마광의 지적처럼 진종 무렵부터 시작돼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친 재정 낭비로 심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신종의 뜻대로 되기 위해선 재정 확보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당시 조정의 중신들이던 문언박, 한유, [[사마광]] 등은 긴축정책과 함께 신중론을 주장하며 젊은 황제가 구상하던 급진적인 개혁을 반대했다. 이에 신종은 개혁의 적임자를 찾았고 [[왕안석]]을 추천받아 파격적으로 한림학사로 임명하고, 그를 중앙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신종은 왕안석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에게 자신이 당 태종같은 정치를 하길 원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때 왕안석은 신종에게 요순의 정치를 본받으라고 지적하면서 쉬운 길이 있는데 왜 요순의 정치를 따르지 않느냐고 했다.] 신종의 절대적인 믿음과 지원 아래 왕안석은 여혜경, 소철 등을 새로 꾸려진 개혁 기구에 배치했고, 세수 파악을 위해 유이 등을 조사단에 넣어 전국 각지로 파견했다. [* 왕안석이 직접 꾸린 조사단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그동안 개간된 땅들과 징수대상에 없던 농지들을 찾아내 실제 성과를 얻었고 이때 얻은 자료들을 토대로 이전 세수보다 몇배나 많이 국고를 채울 수 있었다. 또한 조세 운반 과정에서 새로이 상어방이 형성되고 중간 상인들이 성장하는 성과도 얻었다, 그러나 조사단들이 전국을 돌면서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사리사욕을 채웠기에 정작 농민들은 이들을 파견한 왕안석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했다.] 이후 왕안석은 부국 강병을 목표로 '''신법'''을 실시했다. 그 신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청묘법, 시역법 (市易法)''' 가난한 농민과 상인들에게 저리로 융자를 공급하여 고리대금으로부터 보호. 청묘법의 경우는 농사 자금을 상평창에서 빌려주는 것인데, 이는 신법당의 [[구양수]]조차 반대했다[* 사실 청묘법은 산서 등 일부 변경에서 극히 일부 시행되고 있었고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왕안석은 청묘법을 처음 신종에게 입안하면서, 하북 등에서 먼저 시범 운영을 하고 이후 전국적 시행을 건의해 밀어붙였다. 그러나 청묘법 시행에 필요한 비용들을 모두 농민들에게 전가하고 자금 대출이 필요없는 농가까지 억지로 빌리게 하는 등의(삼정의 문란 시기 환곡의 문제와도 비슷하다.) 문제가 계속 터지자 하북 농민들이 당시 하북 사람들에게 공평정대한 판결로 명망높던 한기에게 “제발 청묘라는 법 좀 없애주십시오. 저 법때문에 못 살겠습니다”라고 집단항의하는 지경에 이르렸다. 이후 한기는 백성들의 호소를 듣고 하북일대를 돌면서 진상 조사를 했는데 백성들의 아우성 이상으로 문제가 많자 상소를 올려 청묘법 폐기를 주장했다. 조정에서 한기의 상소문을 보고받고 상소를 읽은 신종은 몹시 놀라 “과연 한기는 충신입니다”라는 말을 한 뒤, 취지와 달리 백성들을 가렴주구하는 청묘법을 없애라고 했다. 이때 신종의 명을 들은 왕안석은 신종 앞에서 한기를 상홍양에 빗대 신종과 한기를 모두 비난했고, 퇴궐 후에도 분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시역법은 상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 왕안석 주도의 신법(희녕변법) 당시부터 가장 논란이 컸던 것이 바로 청묘법이었다. 취지와 달리 소상인, 소작농 등의 삶은 더욱 더 어려워지고 이 제도를 악용해서 부정부패와 농민수탈이 더 심해져서 당시 조정에서는 ‘청묘법은 말 그대로 부정부패를 조장하며 백성들을 수탈하는 정책이다’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선인성렬황후가 수렴청정을 할 당시 사마광은 가장 폐단이 큰 청묘법부터 즉시 폐기조치했다. 취지는 좋았지만 결함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셈] * '''보갑법''' 10가구를 1보, 5보를 대보, 10대보를 도보로 편성. 농민을 치안 유지 조직의 구성원이 되게 하고, 농번기에 군사 훈련을 받아 병농일치의 민병 조직을 발전시켜 군사력을 강화하고 양병비 절감.[* 이전까지의 송나라는 용병제였다.] * '''보마법 (保馬法)''' 보갑법에서 동원된 보정(保丁)들에게 국가의 말을 빌려주어 농사 등에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것. 전쟁 때는 이것이 군마가 된다.[* 송나라의 고질적인 약점인 기마부대 양성을 위해서 추진된 보마법의 발상은 좋았다. 하지만 엄연히 농사에 쓰이는 말과 전쟁에서 쓰이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해볼때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주장이 많다.] * '''농전 수리법''' 국가가 수리 시설의 유지, 보수 비용을 지출하여 지주가 이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함. * '''모역법(혹은 면역법(免役法))'''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던 노역을 화폐화하여 농민들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된 제도. 이 돈은 실업자들에게 노역을 시키는 임금이 된다. 근대적인 세수 체계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소식조차도 폐지를 반대할 정도였다. * '''균수법''' 정부가 지방의 물자를 사들여 다른 지방에 팔아 이익을 얻음으로써 물자 유통을 원활히하고 물건 값을 조절하 며 안정화시킴. 왕안석의 주도 아래 진행된 신법은 그의 구상대로만 된다면 당시 북송의 농민과 소상인들을 보호하고 대지주, 대상인, [[고리대금업]]자들의 횡포를 막아 세수를 증대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그 당시 [[북송]]에 꼭 필요한 개혁안이었다. 신종은 왕안석의 개혁안을 입안받고 난 뒤, 처음에는 열렬히 지지하였다. 따라서 왕안석은 이런 신종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을 따르던 관료들과 함께 전격적이고 빠르게 개혁안을 실시해 나갔다. 그러나 당장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두고보지 않았던 대지주, 대상인, 고리 대금 업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여기에 더해 이들 계층에 해당되었던 대다수의 사대부들도 신법을 반대하는 '구법파(구법당)’을 결성했다. 그 구법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사마광]]이었다. 사마광과 왕안석은 서로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입장에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서로의 학문적 식견과 개인적 능력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경하고 있었다. 사마광과 왕안석이 살아있을 때에는 합리적인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사마광이 집권 후 8개월만에 병사하면서 그들의 사후 신법파와 구법파의 대결은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었고 신법을 무기삼아 반대파 숙청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참고로 철종 초 재집권한 [[사마광]]이 신법의 대안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지적도 있긴하나, 그가 얼마 안가 사망해 8개월동안 진행한 것은 고작 신법을 혁파하는 정도였다. 더해서 신•구법당파의 대립은 왕안석, 여혜경, 한강, 증포, 장돈 등 강남 출신 관료들과 기존의 화북 출신 관료들간의 갈등의 모습까지 띄게 되면서 진종, 인종 연간 급격히 발전한 강남 일대와 기존의 화북 일대 사이의 대결 양상까지 띄게 되었다. 구법파와 신법파의 대립[* 신종의 아버지 영종은 인종의 조카로서 부필, 문언박, 한기라는 대신들에 추천을 받아 양자가 되어 즉위하였는데 기존 승계 원칙상 황제가 되기 힘들었으나 앞선 대신들이 영종의 즉위를 적극 주장하여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에 대해 아버지이자 선황인 영종은 매우 고마워 하였고 영종의 아들인 송신종도 이 고마움을 늘 간직했다. 앞서 아버지를 추대한 대신들은 신종 시기에 구법파로 구분되었는데 다른 구법파와는 다르게 이들이 명예를 잃지않도록 탄핵 대신 중요 지방관으로 자리를 옮겨주어 황제가 직접 명예를 지켜주었다. 이러한 고마움을 담은 보답은 자신의 아들인 송철종도 보여주는데 후일 신법파가 정권을 잡을때 몸소 이들을 보호해준다.]이 극심해지고 있던 신종 7년(1074년), 하북에서 큰 가뭄이 들자 구법파에서는 이 가뭄을 '''"신법에 대한 하늘의 노여움"'''이라고 주장하며 왕안석의 퇴진 운동을 벌였다[* 당시 왕안석은 구법당 사람들로부터 전한 무제 시대 균수법, 평준법, 염철법, 술의 전매제 등을 만들어 실행에 옮긴 상홍양에 비유되어 비난받고 있었다.]. 더해서 원래부터 아들 신종의 개혁 정책을 반대해왔던 선인성렬황후까지 나서서 왕안석의 퇴진을 주장하자 결국 신종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왕안석을 지방으로 좌천시키기에 이른다. 왕안석이 좌천되고 난 이후부터 지극히 권세와 개인적 영달을 구하기 위해 합류한 인사들이 많았던 신법당파는 구심점을 잃고 서서히 분열했다. 그러다가 왕안석이 다시 복귀했지만 이 무렵부터는 구법당 신료들의 공세뿐만 아니라 왕안석의 보복을 두려워한 여혜경 등 일부 신법당 사람들이 앞장서 왕안석을 다시 탄핵했다. 이미 2년 전, 동생 왕안국을 잃었고 얼마 전에는 과거 급제 후 그 재능을 인정받고 있던 아들 왕방마저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까닭에 왕안석은 믿었던 친구, 측근들의 배신까지 겹치자[* 왕안석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그가 신법당 내부에서도 공격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어느 누구도 꺾지 못한 그의 외고집과 실패한 정책임에도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한 성격 때문이었다.] 낙향 후 은둔생활을 선택했다. 이후 왕안석은 금릉에서 자신이 주도한 신법들이 신종 사후 선인태후와 사마광 등 구법당에 의해 폐기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쓸쓸히 사망했다. 왕안석 실각 이후에도 조정 내에서는 여혜경, 한강 등을 중심으로 여전히 신법이 추진되고 있었지만, 신종이 1085년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1083년 서하와의 전쟁에서 패한 데 대한 울분으로 사망했다.] 어린 철종이 즉위하면서 신종의 모후 선인태후 고씨와 새로 재상이 된 사마광에 의해 신법은 완전 폐기조치됐다. 신종은 죽은 뒤 영유릉에 안장되었고, 신종의 뒤는 불과 9세 밖에 되지 않은 장남 [[송철종|연안군왕 조후]]가 이었다. 이때 신종은 병석에 있었기에 대신들이 먼저 후계건저회의를 건의했고 신종과 선인성렬황후의 허락을 얻었다. 이후 선인성렬황후와 대신들의 회의를 거쳐 신종의 아들 연안군왕이 황태자로 책봉된 뒤, 얼마안가 신종이 죽자 제위를 이었다. 철종의 나이가 어렸던 까닭에 신종의 어머니 선인성렬황후가 수렴청정을 맡았고 사마광이 선인성렬황후에 의해 재상이 되었지만 왕안석과 사마광 모두 그 다음해(1086년) 잇달아 죽고 달라진 분위기 속에서 구법당파와 신법당파 사이의 당쟁은 격화되었다. 연경을 회복하는 자는 왕으로 봉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송 휘종 시기 환관 [[동관(북송)|동관]]이 연경을 공략하나 요군에 연전연패하자, 금에 원군을 요청한다. 이후 연경을 되찾자, 동관은 요, 금에 나라 망신을 다 시켰음에도, 광양군왕으로 봉해진다.] 신종 재위 기간 동안이던 1078년에 송나라와 [[고려]]는 84년만에 재수교했는데, 이때 고려의 국왕은 [[고려 문종|문종]]이었다. == 대외 방면 == === 서하 === 송 신종은 요와 서하가 북송을 노리는 상황을 극복하려고 했다. 당시 요나라는 강대하여 힘든 상황이었다. [[경력의 화의]] 이후에도 북송과 서하는 소규모 분쟁이 있었는데, 먼저 1066년 의종 이량조가 북송을 공격했다. 북송의 영종이 즉위하자 서하가 오종을 파견하나 북송 측에서는 오종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이량조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서하군이 진봉과 경원 일대를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 이에 맞서 북송 조정에서 서하에 대한 세폐 지급을 중단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연주지주 육선과 한기가 이에 동조하였고 한기[* 남송 권신 한탁주의 증조부이다.]는 더 나아가 접경 지역의 호시도 중단해야 한다고 하였고, 이에 1067년 서하가 북송에 사죄하였던 것과 두 번째로는 [[충악]][* [[충세형]]의 아들로, 아버지의 연줄로 인해 청간성을 지키고 있었다. 충가군의 일원. 충악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고 종악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이 1067년 외명산 부락을 투항시킨 뒤 조정의 허가도 없이 서하의 수주를 공격하여 탈취하자, 이에 서하가 보안군을 습격하여 북송에 상당한 피해를 입힌 것이 그것이다. 이에 송 조정은 수주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고 송 신종도 이에 동의했으나, [[곽규]]의 반대로[* 송 신종의 조서를 은닉하기도 했다.] 무산된다. 1068년에는 [[왕소(북송)|왕소]]가 '''평융책'''[* 서하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하주와 황주 이 2개의 주를 탈취해야 하고, 이 2개의 주를 점령해야 [[서하]]를 양면에서 포위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3편을 올려 여러 소국으로 분열된 티베트를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왕안석과 신종은 이에 적극 찬성하였고, 왕소는 1071년부터 1073년까지 [[왕안석]]의 지지 하에 유용가가 이끄는 토번 부족을 귀순시킨 뒤 토번군을 무찌르고 하황 일대[* 오늘날 칭하이 성 일대. [[황하]]와 황수가 교차하는 지점이다.]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왕안석의 신법이 폐단이 많자, 왕소도 실각하게 되고 왕소는 1081년 사망한다.] 1071년에는 충악이 나올에서 서하를 격파해 나올성을 수축하였고, 송은 수주성과 나올성을 거점으로 횡산 일대에서 무녕성과 여러 산채를 지으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서하에 의해 선제공격을 받고 순녕채, 무녕성 등지에서 전쟁을 벌이나 서하가 승리했고 북송 정권은 그것들을 서하에 빼앗겼다.[* 충악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때 서하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서하 혜종 이병상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한족 출신인 양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양태후는 호전적인 성격이었고 수시로 북송의 국경을 약탈하였는데, 그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1076년에는 이병상의 나이가 만 15세가 되자 혜종이 친정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양태후는 섭정을 거두고 막후에서 서하 혜종을 꼭두각시로 부렸다. 이후 1081년 서하의 황제 이병상이 태후 양씨와 양을매 등에게 감금되는 등 서하에 내분이 일어났다. 한족 출신의 장수 이청이 북송 간 전쟁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국고가 비었다고 한 뒤 서하 혜종에게 황하 이남을 돌려주고 황하를 양국 경계로 삼아 화의를 맺어야 한다고 했으며, 북송과 연합해 양태후를 퇴진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를 알아챈 양태후가 측근들과 함께 궁중 정변을 일으켜 이청을 죽인 뒤, 서하 혜종을 흥경부에서 5리 밖에 떨어진 목책 안에 감금시켜 버린 것이다. 이에 장수들이 반기를 들고 양태후 일족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토번 수령 우장화마가 송에 군사를 일으켜 태후를 징벌하면 서하 군민들이 호응할 거라는 밀서를 보냈다. 이를 틈탄 북송 정권이 본격적으로 서하를 침공했는데, [[이헌(북송)|이헌]][* 이헌은 난주를 수복했다.]과 충악[* 충악은 10일치의 군량만 있으면 된다고 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고준유]], [[유창조]], [[왕중정]] 등을 필두로 진군하여 처음에는 제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각 장수들 간에 단합이 되지 않았고, 보급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군대는 다 영주로 집결하였으나, 난주를 수복한 이헌의 군대만이 오지 않았다. 하필이면 지휘관 중 하나인 이헌이 환관이었다.][* 서하의 청야전술로 인해, 굶어죽는 북송군이 많았다.][* 당시 유창조는 고준유의 통제를 받았는데, 유창조의 군대가 용맹하게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고준유는 이를 시기하였고 공성병기가 부족한데도 계속 싸우라고 독촉하였으며 서하군은 이를 틈타 황하의 제방을 무너트려 북송군을 궤멸시켰다.] 이에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대패하였다.([[오로벌하]]) 충악의 황산 점령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아 아들 충박을 보내 그의 계책을 상주시켰다. 송 신종은 충박(種朴)을 불러 상황을 묻고 충박을 각문지후(閣門知侯)로 승진시켰다. 조정은 황산에 가서 성을 쌓으려고 [[서희(북송)|서희]](徐熙)와 이순(李舜)으로 하여금 이를 지원하게 하나, 충악은 성을 쌓는 걸 은주, 유주, 그 다음에는 하주 이 세 곳으로 한 뒤 염주성을 쌓아야 서하의 소굴까지 바로 내려다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송과 서하의 접경 지역에 연이어 3개의 성을 건설해야 하옵니다. 3개 성의 건설이 완료되면 변경 지역을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 다음 서하의 수도인 흥주와 영주를 공격해야 하옵니다. 그 이후에도 서하를 정벌하려 시도하였는데, 이번에는 여러 개의 진로로 나누어 공격하는 대신 한 곳에서 진격하기로 하였다. 서희와 [[심괄]]을 필두로 하여 영락성을 수축하고자 했으나 [[충악]]은 이에 반대했다.[* 영락성은 오직 산에만 의존하고 있었던 데다가 수원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영락성에서는 반드시 패한다. 패하면 죽는 것이고 명령에 거절해도 죽는다. 지금 명령에 거역하여 죽는 것이, 군대가 패망하고 영토를 빼앗기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러나 [[서희(북송)|서희]]는 이를 무시하고 그의 주도 하에 영락성을 쌓아 서하를 방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하군의 공격을 받아 북송군이 패하고 서희는 난전 중 전사하고 말았다.([[영락성 전투]])[* 여기서 이헌의 군대는 서하의 군대에 가로막혔고, 심괄은 서하의 원군에 가로막혀 수덕을 지키고 있었다. 또한 충악은 이 때 서하군의 침공을 받고 있는 영락성을 관망하였고, 얼마 뒤 병사하고 말았다.][* 서하군이 영락성의 수원을 끊자 영락성 내 북송군은 말똥을 갈아 즙을 마실 정도로 열악해졌다.] 송 신종은 서하가 여전히 꺾기 어렵다는 상대인 걸 깨닫고 신료들 앞에서 통곡하고 만다. 그러나 서하도 경제적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 백성들의 생업이 어려워지고 경제도 파탄에 이른다. 1085년 양을매가 죽자 양태후는 양을매의 아들 양을포를 재상으로 임명한 뒤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민심 수습을 위해 혜종 이병상을 복위시켰지만 동년 10월 병으로 사망했다. 송 신종은 서하를 이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 베트남 === 송 태종 시기 레 왕조를 토벌하려고 했으나 [[후인보]]가 전사한 이후, 송 진종 시기부터 송 인종 시기까지는 베트남에 유화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이후에도 소규모 분쟁이 있었다. 농씨 일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적청이 이를 토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안석의 신법 시기 이후 모든 것이 변하였다. 1075년, 재상 [[왕안석]]은 대월을 토벌할 준비를 하였고 이를 눈치챈 [[리트엉끼엣]]은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송나라 국경으로 쳐들어가서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40일간의 교전 끝에 승리한다. 여기서 리트엉끼엣은 왕안석의 신법으로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을 구한다는 것을 전쟁의 명분으로 삼는다. 송나라 측은 당시 대월(베트남)의 적수인 참파와 크메르 제국을 끌어들였고 또한 서하 전선에서 활약한 [[곽규]]가 참전한다. 이에 리트엉끼엣은 강바닥 아래에 함정을 설치하여 1000명 이상의 침공군을 몰살시켰고[* 송나라의 기록에서는 홍진태자를 주살했다고 나온다.], 결국 지친 대월과 송은 화평조약으로 합의를 보면서 전쟁을 종결짓는다.([[송월희녕전쟁]] 참고) === 요나라 === 송 신종의 최대 목표는 요나라와 서하의 위협에서 송나라를 다시 개혁하는 것이었다. 특히 전연의 맹은 송나라에게 불안정한 평화를 구축했지만 평화의 대가로 요나라에게 매년 바치는 세패는 엄청난 양이었다. 당시 요나라는 도종의 치세였으며 도종은 즉위 중반부 부터 불교에 심취하여 온갖 불탑과 서찰을 신축하고 건설하는데 국비를 날려먹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요나라의 재정이 도종 치세 40년을 넘기는 동안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송나라의 경제력에서 나오는 세패가 근간이었다. 도종 집권부터 흔들리던 요나라였으나 군사적으로는 아직 막강한 나라였고 신종의 시기에는 요나라를 송나라가 군사적으로 도모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신종은 고려와 재수교로 요나라를 견제하는 구도를 만들고 흔들리는 서하를 먼저 공략하는 방안을 활용했으나 오로벌하 전투와 영락성 전투에서 패배하며 신종 당대에 서하를 무너트리는데 실패했고 자연스럽게 요나라에 대한 견제책 역시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결국 신종 시기에도 요나라에 대한 막대한 세패는 계속 지속됬다. === 고려 === 송 신종의 외교적으로 가장 노력한 나라가 바로 고려다. 당시 고려와 송의 관계는 적대는 아니었으나 송태종이 고려 성종의 원군 요청을 거절한 1차 여요 전쟁 이후 공식적인 외교가 단절된 상태였다. 송나라 초기에는 요나라와의 긴장 국면을 해소하는데 고려의 역할을 크게 보지 않았으나 이는 송나라의 최대 실책 돌아왔다. 1차 여요 전쟁에서 서로 입장을 확인한 후 불안정한 견제 관계에 돌입한 요나라와 고려가 2차, 3차 전쟁 끝에 고려의 승리로 끝나며 고려가 국력을 증명하자 송나라 입장에서 고려는 요나라와 관계에 필요한 나라로 급부상했다.[* 당시 요나라 초기~전성기에 툭하면 기마병 20~30만을 조직하여 송나라를 대규모로 침공하는 요나라는 송에게 큰 위협이었고 그들이 송나라로 침공하지 못하도록 후방에 불안을 조성할 나라는 서쪽의 서하와 동쪽의 고려가 유이했다.] 송 신종은 즉위 이후 서하, 요나라와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하여 국력을 향상, 당대에 서하를 물리치고 요나라를 견제할 국력을 쌓아가고자 했는데 서하를 치기 위하여 요나라 방면을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고려을 끌어들이는 '''연려제요'''[* 고려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견제한다.]를 실시한다. 당시 문종의 치세에 국력이 치솟던 고려를 보며 요나라와 형식상 군신관계이나 송나라가 먼저 재수교를 제의하면 고려는 요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을 것을 확신한 송 신종은 먼저 상인 황신을 보내 재수교의 의지를 강하게 보였고 문종이 화답하며 고려와 관계를 복원했다.[* 송나라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고려 문종은 황신이 고려에 온 1068년보다 10년 전인 1058년에 재수교를 하려고 했지만 요나라와 관계를 걱정하던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특히 고려의 입장에서는 송나라는 이미 군사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한 나라였기에 문종이 재수교 강행에 부담이 있었으나 송나라가 먼저 제의하자 고려 문종은 바로 재수교를 강행한다.] 비록 송 신종 사후 송나라, 요나라의 국력이 약해지며 고려와 관계 복원에서 원하던 요나라 공세적 견제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주변국이 전부 적국이던 당시 송나라는 북송이 멸망하던 때까지 고려와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수세적 견제로서 요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도종 시기부터 고려의 존재로 인한 후방 불안과 내부의 정치 다툼으로 요나라가 송나라에게 대군을 소집한 침공은 사라졌으니 신종의 최대 업적 중에 하나로 평가된다. == 평가 == [[파일:북송 신종.jpg|width=300]] >왕안석은 사람됨이 고집스럽고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여 조종이 유계(幽薊)와 영무(靈武)를 삼킬 뜻을 세웠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러 차례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신종은 분연히 장차 여러 대에 걸친 치욕을 씻고자 했지만 마땅한 조치가 아직 없었기에 결국 편협한 견해와 왜곡된 학문이 일어나 조정을 장악했다. 청묘법(靑苗法)·보갑법(保甲法)·균수법(均輸法)·시역법(市易法)·수리법(水利法)이 이미 제정되었지만 천하는 흉흉하여 소동이 벌어지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신종은 끝내 이를 깨닫지 못했고 바야흐로 단연히 원로들을 쫓아내고, 간언하는 신하들을 물리쳤고, 한치의 의심도 없이 신법을 추진했다. 끝내 조종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은 거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바뀌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간사하게 남에게 아첨하는 이들이 날마다 승진했고 인심이 날마다 떠나갔고 화란이 날마다 일어났다. 안타깝구나! >----- >[[송사]]의 논찬 결과적으로 신종 대의 개혁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오히려 내재되어 있던 갈등이 잘 정비된 관료제 속에서 격화된 당쟁으로 연결되었다.[* 송나라의 관료제는 태종과 진종 연간에 정비되었고 신종 연간에 꽃을 피웠다고 평가받는다.] 또 추진된 정책들이 좌초되면서 사회 모순은 심해져만 가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평가받는다. 즉, 그의 묘호인 신종에서 드러나듯''' ‘개혁을 추진했지만 미완으로 끝이 나고, 재위 기간 동안 칭송할 업적도 애매해서 뚜렷한 특징을 잡기에도 애매한 황제’ '''라고 평가받고 있다. 당장 신종 생전 희녕변법 추진 과정에서 조정은 찬반 논쟁으로 당쟁이 벌어졌고, 타협점이 사라질수록 당쟁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당쟁 속에서 신•구법당 관료들이 탄핵되고 지방으로 좌천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신종 본인도 지치고 동력을 상실해갔으며 설상가상 신종이 젊은 나이에 승하하게 되었다. 신법 추진 후 현실에서도 문제가 여기저기 터져나왔다. 특히 인종 말부터 줄어드는 세수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추진한 개혁이 모순만 심화시키고 신법 중 일부를 악용한 관리들의 등장[* 신법을 도구로 삼아 반대파를 구법당으로 몰고 권세를 쥔 대표적인 인물은 여혜경과 휘종대의 권신이자 대표적인 간신 채경이 있다.]으로 이전에는 없던 탄핵과 숙청, 부정부패마저 만들어버렸다. 또 신법의 미숙함으로 재정 적자 폭은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오히려 세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선인성렬황후 수렴청정 시기와 철종의 친정기를 합친 철종 연간에는 재정 적자가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를 이은 휘종 연간이었는데, 황제와 황실의 사치, 채경, 동관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의 잇단 실정 등이 맞물리면서 신종, 선인성렬황후, 철종이 안정화시켜 놓은 국고가 바닥이 나게 되었다.] 민생은 피폐해졌으며 군사력은 나날이 약해져 갔다. 따라서 '''신종 사후 송나라는 각종 모순들이 터지고 당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약해진 군사력을 가지고, 쇠퇴하는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금나라]]을 상대해야 했다.''' 이런 까닭에 신종이 죽은 뒤, 어린 철종을 대신해 선인성렬황후가 수렴청정을 할 때 정권을 잡은 구법당파(원우당파)는 신종이 추진했던 신법 조치들을 즉시 폐기했다[* 선인성렬황후와 사마광 등 노신들이 이런 조치를 내린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신법의 좋은 취지와 달리 제도가 악용되고 토목사업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더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법이 시행된 이후 농민들이 부역에 동원되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유랑민들이 증가했다. 더해서 세금 수취 과정에서도 각종 부정부패들이 생겨나 왕안석의 생각과 달리 신법의 방향성이 왜곡되는 부작용들이 제도 여기저기에서 발생했다. 그런 까닭에 선인태후와 사마광은 신법을 급격하더라도 당장 폐기해 민생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사마광이 재상이 된 지 8개월만에 죽으면서 제대로 된 후속책이 나오지도 못했고, 선인성렬황후가 죽고 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장돈]] 등 과거 왕안석과 신법을 추진해 온 원칙론적인 신법당파들이 돌아오면서 당쟁은 심화되고 타협점을 찾기 힘들어졌다. 할머니 사후 친정을 하게 된 철종 역시 아버지가 추진했던 신법을 다시 펼치려 했지만 이마저도 불과 25세의 나이에 철종이 요절하면서 미완의 개혁으로 끝나버렸고, 철종의 짦은 친정기 동안 원우당인 사건, 맹황후 폐출 사건 등이 벌어지면서 신•구법당 감정의 골은 깊어지게 되었다. 이후 흠성헌숙황후 상씨와 증포, 채변 등의 결정으로 가장 황제감이 아닌 휘종이 즉위한 이후의 송나라는 철종 연간보다 당쟁이 더 심해졌다. 특히 철종이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도 전에 갑자기 죽고 난 뒤, 제왕 교육도 받지 못한 휘종 대신 섭정을 맡은 상태후의 조치들은 말그대로 미봉책에 가까웠고, 이마저도 알맹이 없는 과거 회귀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때 상태후의 조치들을 보면 죽은 친딸 주국장공주 개칭, 폐후가 된 맹황후 복위, 원우당파 복권, 한충언과 증포의 재상 기용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 중 신•구법당간의 당쟁을 막고자 단행한 한충언, 증포 기용은 오히려 갈등 끝에 증포가 한충언을 쫓아내고 집권한 뒤 증포 중심으로 조정이 운영되다가 증포의 추천으로 복귀한 채경이 집권하는 일련의 결과를 낳았다. 또 철종이 쫓아낸 맹황후를 복권시킨 조치는 상태후 사후 다시금 원우당인 사건이 일어나는 데 또 다른 빌미가 되고 만다. 따라서 상태후의 조치들과 그녀의 짦은 수렴청정은 당쟁을 완화시키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북송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더해서 수렴청정을 하던 상태후는 철종의 섭정을 했던 시어머니 고태후처럼 안목이 뛰어나거나 유능한 인물도 아니었고 휘종이 올바른 제왕이 될 시간도 벌어주지 못하며 1년여만에 사망했다. 당연히 재목도 아니었고 준비도 안 된 휘종이 친정을 하고 난 뒤, 그의 총애를 받은 채경에 의해 신법을 무기삼아 다시 원우당파 사건이 터지게 된다. 이때 상태후에 의해 복권된 맹황후가 다시 폐출되고 각지에 원우당비가 설치되면서 과거의 명신들까지 당쟁에 포함시키는 등 철종 친정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당쟁의 규모는 커지게 된다. 특히 휘종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을 쥐게 된 채경은 집권 이후 꾸준히 구법당, 신법당에 상관없이 자신과 그 무리를 따르지 않으면 모조리 쫓아냈다. 이렇게 채경이 중심이 된 간신들이 신법을 무기삼아 정적들을 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휘종은 채경이 탄핵되더라도 다시 복직시켰으며 여전히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울러 휘종을 포함한 황실의 사치, 그 측근들의 부정부패 등이 맞물리면서 신종, 철종때 애써 줄여놓은 재정 적자는 다시 늘어났고, 채경 등은 이를 메꾸기 위해서 신법을 가렴주구의 수단으로 사용해 무리하게 수탈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이런 까닭에 각지에서는 [[송강#s-4|송강의 난]], [[방랍의 난]] 등의 민란이 일어났고, 각종 사회적 모순들이 더 심화되었다. 또 외교적으로 요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어설픈 전략 등을 펼치다가 이마저도 실패하면서 발생한 비극이 [[정강의 변]]이었다. >송 신종은 변법파의 후원자였다. 하지만 그는 기백이 부족하고 사상이 깊지 못했으며 성격도 강직하지 못했다. >----- >왕재충의 평가 == 가족 관계 == 황후는 -- '''[[만악의 근원|송나라 몰락의 진정한 원흉]]'''[* 철종이 갑자기 요절하게 되자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주덕비와의 관계, 당쟁에서의 이해관계, 원래부터 단왕 조길을 유독 총애한 사심 등을 고려해서 신종의 아들 중 가장 황제라는 자리와는 자질상 거리가 먼 휘종을 후계자로 선정했다.]인-- [[흠성헌숙황후]][* 일부 서적, 번역 게시물에서는 향씨, 향태후라고 오역되지만 向가 ‘향할 향, 성씨 상’이므로 상씨, 상태후가 맞다. 그녀의 증조부인 [[상민중]] 역시 오역되어 일부 서적 등에서 종종 향민중으로 언급되고 있다.]이다. 황후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후계자가 된 철종과 휘종의 생모가 각각 황후로 추존되었다. 철종의 생모 주덕비(朱德妃)는 [[흠성황후 주씨|흠성황후]][* 원래는 최걸의 딸이었는데, 가난해서 주사안에게 딸을 팔았고 나중에 주사안이 궁궐에 궁녀로 입궁시켰다](欽成皇后 : 1052년 ~ 1102년)로 추존되었고, 휘종의 생모 진미인(陳美人)은 [[흠자황후 진씨|흠자황후]](欽慈皇后 : 1054년 ~ 1085년)[* 신종이 죽자 신종의 묘를 지키며 곡기를 끊어 순사했다.]로 추존되었다. 신종은 [[철종(송)|철종]]과 [[휘종(송)|휘종]]을 포함하여 1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철종, 휘종, [[조필(송)|오왕 조필]], 연왕 조우, [[조사(송)|초왕 조사]], 월왕 조시를 제외한 8명의 아들들은 모두 요절하였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송사)] [각주] [[분류:송나라/황제]][[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 [[분류:1048년 출생]][[분류:1085년 사망]][[분류:카이펑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