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FFFF 4%, #E30613 4%, #E30613 8%, #FFFFFF 8%, #FFFFFF 12%, #E30613 12%, #E30613 16%, #FFFFFF 16%, #FFFFFF 20%, #E30613 20%, #E30613 24%, #E30613 76%, #E30613 80%, #FFFFFF 80%, #FFFFFF 84%, #E30613 84%, #E30613 88%, #FFFFFF 88%, #FFFFFF 92%, #E30613 92%, #E30613 96%, #FFFFFF 96%);" {{{#fff ''' 아르세니오 파스토르 에리코 [br] (Arsenio Pastor Erico)'''}}}}}} || || '''{{{#fff 출생}}}''' ||[[1915년]] [[3월 30일]]/[br]{{{-2 [[파라과이]] [[아순시온]]}}} || || '''{{{#fff 사망}}}''' ||[[1977년]] [[7월 23일]] (향년 62세) || || '''{{{#fff 국적}}}''' ||[[파일:파라과이 국기.svg|width=25]] [[파라과이]] || || '''{{{#fff 신체조건}}}''' ||183cm/76kg || || '''{{{#fff 포지션}}}''' ||[[스트라이커]] || || '''{{{#fff 소속팀}}}''' ||[[클루브 나시오날]](1930~1933)[br][[CA 인데펜디엔테]](1933~1946)[br]CA 우라칸(1946~1947)[br][[클루브 나시오날]](1947~1949) || || '''{{{#fff 감독}}}''' ||플란드리아(1948)[br][[클루브 나시오날]](1949)[br]클루브 솔 데 아메리카(1955)[br][[클루브 나시오날]](1956)[br]클루브 솔 데 아메리카(1957) || || '''{{{#fff 국가대표}}}''' ||37경기 17골^^([[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 / 1942~1958)^^ || || '''{{{#fff 등번호}}}'''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라과이]]의 [[축구선수]] 출신 [[축구감독]]으로, 시대를 잘못 타고난 [[스트라이커]]로 평가받는다. == 선수 생활 == 아르세니오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에리코는 아버지에게 이탈리아 쪽의 피를 물려받았다. 11살 무렵부터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뛰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보였지만 그의 조국 [[파라과이]]가 [[볼리비아]]와의 전쟁(차코 전쟁) 때문에 파라과이 리그가 중단되었고 나시오날은 외국으로 투어를 나다니게 되었다. 이 무렵 [[아르헨티나]]에서 벌였던 투어 경기를 보고 아르헨티나의 [[CA 인데펜디엔테]]와 [[CA 리버 플레이트]]가 에리코의 플레이에 관심을 보였다. 두 팀이 동시에 비드했지만 에리코의 선택은 인데펜디엔테였고 1934년에 데뷔전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1934-35 시즌에는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는 바람에 시즌의 절반을 날렸지만 회복 후 에리코는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다. 두 팀이 동시에 알아본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아르헨티나 리그]]에서 가장 무서운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떨쳤다. 인데펜디엔테에서 13년간 활약하면서 3번의 득점왕을 차지였고 통산 득점이 293골로 [[리버 플레이트]]의 [[앙헬 라브루나]]와 같은 수치로 역대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아르헨티나 리그]] 통산 득점 1위에 올라있다. 라브루나가 20년간 올린 득점을 에리코는 13년, 325경기 만에 달성해냈으니 에리코의 득점 기록이 더 빛나는 것은 당연지사. 한편으로는 에리코의 통산 득점 기록은 295골로 아르헨티나 리그 역대 최다 득점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르헨티나인]]들이 자국인 라브루나의 위에 외국인 선수의 기록이 올라가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일부러 에리코의 기록을 2골 깎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대단한 기록을 가진 선수임에도 에리코는 공식 A매치 기록이 없는데 그 이유는 조국 파라과이가 전쟁 등을 겪으면서 [[코파 아메리카]] 등 국제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37년 이후에 전쟁을 딛고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 대표팀]]이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였지만 인데펜디엔테가 그의 참가를 만류했다.[* 에리코의 아르헨티나 생활 동안, 특히 1941년에는 봉급 문제로 에리코와 인데펜디엔테 구단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고 이 때 [[리베르 플라테]]와 [[산 로렌소]] 등 여러 팀들이 에리코를 노렸지만 인데펜디엔테는 그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오히려 1938년 즈음에는 아르헨티나 측에서 에리코에게 귀화 제의를 했지만 에리코가 거절했다.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 감독으로 여러 팀을 돌아다녔지만 그리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1977년. 62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그의 점프는 최고의 무기였다. 그의 헤딩은 궁수와 같아서 정확히 원하는 곳에 꽂을 수 있다. 그것을 모두 점수로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정말로 신사였다."''' > ---- >[[프란시스코 바라요]] 당시로서는 183cm의 큰 키를 갖고 있었고 탄력이 발군이었기 때문에 인데펜디엔테는 그를 이용한 공중전으로 상당히 재미를 보았다. 슛 테크닉도 매우 뛰어난 선수라 [[호세 레네 이기타]], [[라파엘 판데르파르트]],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등이 사용해서 유명해진 [[스콜피온 킥]]을 최초로 사용한 선수라고 알려져 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선수 시절 초기에 영향을 준 선수 중 한 명이며, [[브라질]]의 레전드 스트라이커 [[레오니다스 다시우바]], 같은 파라과이 출신이자 [[CA 보카 주니어스|보카 주니어스]] 출신의 공격수 [[델핀 베니테스 카세레스]]는 그를 역대 최고의 공격수로 꼽았다. == 뒷이야기 == * 1937-38년 시즌에 득점왕을 차지할 당시 에리코의 골 수는 43골이었다. 이 골의 기록에는 기묘한 뒷 이야기가 있다. 아르헨티나의 한 담배 회사에서 자사 제품인 'Cigarrillos 43' 담배를 선전하기 위해 43골을 득점하는 선수에게 상금을 지급하는 이벤트를 벌였고, 에리코는 43골에 도달한 후 더 넣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43골에 맞추기 위해 득점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한다. == 수상 == === 클럽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2회: 1938, 1939(이상 [[인데펜디엔테]]) === 개인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3회: 1937, 1938, 1939(이상 [[인데펜디엔테]]) [[분류:1915년 출생]][[분류:1977년 사망]][[분류:심장마비로 죽은 인물]][[분류:파라과이의 축구선수]][[분류:파라과이의 축구감독]][[분류:공격수]][[분류:클루브 나시오날/은퇴, 이적]][[분류:CA 인데펜디엔테/은퇴, 이적]][[분류:CA 우라칸/은퇴, 이적]][[분류:플란드리아/역대 감독]][[분류:클루브 나시오날/역대 감독]][[분류:선수 겸 감독/축구]][[분류:클루브 솔 데 아메리카/역대 감독]][[분류:아순시온 출신 인물]][[분류:1930년 데뷔]][[분류:1949년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