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영국의 군인]][[분류:1887년 출생]][[분류:1966년 사망]][[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하트퍼드셔주 출신 인물]]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베이블레이드 버스트의 등장인물, rd1=아서 퍼시벌(베이블레이드 버스트))] [include(틀:영국군(2차 세계대전)/장성급 장교)] ||<-2> '''{{{+1 아서 퍼시벌}}}[br]Arthur Percival[br]CB, DSO & Bar, OBE, MC, OStJ, DL''' || ||<-2>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Lieutenant_General_Arthur_Percival.jpg|width=100%]]}}} || || '''본명''' ||아서 어니스트 퍼시벌[br]Arthur Ernest Percival || ||<|2> '''출생''' ||[[1887년]] [[12월 26일]]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하트퍼드셔]] 아스펜덴 || ||<|2> '''사망''' ||[[1966년]] [[1월 31일]] (향년 78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 || '''복무 기간''' ||[[1914년]]~[[1946년]] || || '''최종 계급''' ||[[육군]] [[중장#s-3.3]] || || '''지휘''' ||말레이 사령부 (1941~1942) 제 44보병사단 (1940~1941) 제 43보병사단 (1940) 체셔 연대 2대대 (1932~1934) 베드퍼드셔 연대 7대대 (1918) || [목차] [clearfix] == 개요 == 영국의 군인, [[싱가포르 전투]] 당시 영국군 지휘관이었다. == 생애 == 영국 하트포트셰어 아스펜던에서 1887년 목양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그의 집안은 목화재배도 겸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병사로 종군하던 중 1916년의 [[솜 전투]] 당시 소위로 임관했다. 1917년에는 [[대대장]]이 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여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1차대전 후 아일랜드의 반란진압에서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퍼시벌은 미국의 샌드허스트, 러시아, 나이지리아에서 근무하다가 1936년에 영국령 말레이로 파견되었다. 1939년 프랑스 파견군 참모장, 제 43 사단장으로서 1940년 5월의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참전한 후 귀국 후 제 44 사단장으로 영국본토의 연안방어에 전념했다. 1941년 중장으로 영국극동군 사령관(말레이군)이 된 퍼시발은 말레이에 주둔한 6개 사단의 증강과 항공지원을 요청했지만 그의 수하에 있던 부대는 훈련이 덜 된 2개 사단 정도였다.[* 이 당시 영국은 북아프리카에서 [[에르빈 롬멜]]과의 싸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극동에서의 방어태세는 상당히 부족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12월 8일 오후 1시 30분. [[야마시타 도모유키]]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의 제 25군 산하의 18사단이 영국령 [[말레이 반도]] 최북단의 코타마루에 상륙한 것을 계기로 [[싱가포르 전투]]가 개시되었다. 일본군은 도처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기 시작했고 영국군은 항공기와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의 공격에 방어선 조차 구축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개전 이틀 뒤인 12월 10일 [[프린스 오브 웨일스(동음이의어)|프린스 오브 웨일스]]호와 순양전함 [[리펄스]]호가 공습을 받아 격침되었고 1942년 2월 8일 [[싱가포르]]가 포위되었다. 1주일에 걸친 격전 끝에 싱가포르는 함락되었고, 결국 퍼시벌 장군은 항복했다. 싱가포르를 함락한 이후 협상 테이블에서 야마시타가 영국군 총사령관이였던 퍼시벌 장군에게 '예스냐? 노냐?'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 어느 정도 과장된 이야기다. [[야마시타 도모유키]] 항목 참고.] 그 후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만주에 있는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이 당시 처지가 같았던 [[조나단 웨인라이트]] 장군도 수용소에 갇혀있었다.] 만주국의 패망과 [[일본의 항복]]과 함께 포로생활을 하던 퍼시벌은 연합군에게 구출되어 1945년 9월에 도쿄 만의 [[미주리호]] 함상에서 열린 항복조인식에 출석하기도 했다.[* 이 때의 일화로 당시 맥아더가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6개의 만년필을 사용했는데, 항복 문서 서명에 사용된 만년필 중 하나를 기념품으로 선물받았다.] 영국으로 귀환한 퍼시벌은 그 후 퇴역해 1949년에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본국에서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가 1966년 런던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