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아이작 뉴턴]]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뉴턴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뜻, rd1=뉴턴(동음이의어))] ||
{{{#fff '''아이작 뉴턴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대영제국 훈장(기사작위 수훈자들-남자))] ---- [include(틀: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 ---- [include(틀:타임지 선정 지난 세기의 인물)] ---- [include(틀:역대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 ---- [include(틀:역대 왕립학회장)] ---- }}} || ||<-2> [[:틀:역대 왕립학회장|{{{#white '''PRS'''}}}]][* President of The Royal Society, [[왕립학회]]장.][br]'''{{{+1 아이작 뉴턴 경}}}[br][[기사 작위|{{{#white Sir}}}]] Isaac Newto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아이작 뉴턴.jpg|width=100%]]}}} || ||<|2> '''출생''' ||[[1643년]] [[1월 4일]] {{{-2 ([[그레고리력]])}}}[* [[율리우스력]]으론 1642년 12월 25일,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 12월 25일을 역학절이라고도 부르자는 농담도 있다.]||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주 울즈소프[br](現 [[영국]] [[잉글랜드]] 링컨셔 주 울즈소프)|| ||<|2> '''사망''' ||[[1727년]] [[3월 31일]] {{{-2 ([[그레고리력]])}}}[* [[율리우스력]]으론 1727년 3월 20일.] (향년 84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미들섹스]] [[켄싱턴]][br](現 [[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 [[켄싱턴]])||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직업''' ||학자, 연금술사, 탐정|| || '''분야''' ||[[수학]], [[물리학]], [[천문학]], [[철학]][* [[자연철학]]은 그 당시 과학의 다른 이름이며, 뉴턴 사후 1세기가 지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자연과학]]이 확립된다.], [[신학]], [[연금술]]|| || '''서명''' ||[[파일:아이작 뉴턴 서명.svg|height=60&bgcolor=#fff]]||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묘소''' ||[[웨스트민스터 사원]] || || '''종교''' ||[[개신교]]([[성공회]])[* 밑에 자세히 기술되어있지만, 뉴턴을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많다. 뉴턴은 삼위일체를 비롯한 핵심 기독교 교리들을 부정했으며, [[성공회]] 측의 경고에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뉴턴이 신앙적인 문제로 교회와 갈등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고, 당시 [[성공회]]가 국교회로서 뉴턴과 같은 국가적인 위인을 안고 가야 하니까 적당히 경고로 넘어간 것이지, [[가톨릭]]이나 [[장로교회]]였으면 바로 파문을 당했을 사안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성공회]] 교인이었던 것은 맞고, 알려진 바로는 과학보다 성경에 몰두했을 정도로 신학연구에도 열정적이었으며,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성경의 창조섭리를 확신할 정도로 독실한 믿음이 있었다.] || || '''작위''' ||[[기사작위|기사]] (Knight Bachelor)[* 1705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knight)에 서훈되었는데, 이는 과학자가 자신의 학문적 업적으로 작위를 받은 첫 번째 사례였다.] || ||<|3> '''학위''' ||[[https://en.wikipedia.org/wiki/The_King%27s_School,_Grantham|{{{#black,#white 더 킹스 스쿨 그랜섬}}}]] {{{-2 (1655년 – 1659년)}}} || ||[[파일:케임브리지 대학교 원형 아이콘.png|width=18]] [[케임브리지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컬리지#s-5.1.14|트리니티 컬리지]] {{{-2 (1661년 – 1665년 / [[학사|B.A.]])}}} || ||[[파일:케임브리지 대학교 원형 아이콘.png|width=18]] [[케임브리지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컬리지#s-5.1.14|트리니티 컬리지]] {{{-2 (1667년 – 1668년 / [[석사|M.A.]])}}} || ||<|7> '''경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특별연구원 {{{-2 (1667년)}}} || ||[[케임브리지 대학교]] 전임특별연구원 {{{-2 (1668년)}}} || ||[[케임브리지 대학교]]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 역사상 두번째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다. [[찰스 배비지]], [[폴 디랙]], [[스티븐 호킹]], 마이클 그린([[초끈 이론]]의 대표주자) 등도 거쳐간, [[영국]] [[물리학자]]들에겐 가장 영예로운 직위다.] {{{-2 (1669년 – 1702년)}}} || ||[[영국 의회]] [[영국 서민원|서민원]] 의원 {{{-2 (1688년)}}} || ||조폐국 감사 {{{-2 (1691년)}}} || ||조폐국장 {{{-2 (1699년 – 1727년)}}} || ||제12대 [[:틀:역대 왕립학회장|왕립학회장]] (PRS) {{{-2 (1703년 – 1727년)}}} || ||<|2> '''부모''' ||^^아버지^^ 아이작 뉴턴 시니어 {{{-2 (1606년 – 1642년)}}} || ||^^어머니^^ 한나 에이스코 {{{-2 (1623년 - 1679년)}}} ||}}}}}}}}} || [목차] [clearfix] == 개요 == [[영국]]의 [[물리학자]], [[수학자]]. [[과학혁명]]에 가장 큰 공헌을 세운 [[과학자]]이다. 2대 [[케임브리지 대학교]]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 초대 석좌교수는 아이작 배로. 그 유명한 [[스티븐 호킹]]도 1979년부터 2009년까지 30년간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직을 역임했으며, 이 외에 [[찰스 배비지]]와 [[폴 디랙]]도 거쳐간 자리다.], [[신학자]]이며 [[종교학|종교학자]]이다. 그리고 마지막 [[르네상스]]인이자 최후의 [[연금술사]]이다. 역학의 체계를 확립한 근대 과학의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942286&cid=47323&categoryId=47323|시조]]이다. 사후 [age(1727-03-31)]년 된 지금까지 단순 과학자를 넘어 '''인류 역사의 가장 위대한 지성인''' 중 하나로[* 물론 이런 식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누군가는 [[플라톤]]을 최고로 꼽고, 어떤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최고로 꼽는 등 여러 후보가 있겠지만, 아무튼 뉴턴도 손에 꼽을 만한 거인인 건 분명하다.] 꼽을 수 있는 인물이다. [[수학]]에서 [[미적분]]법 창시, [[물리학]]에서 관성질량, 중력질량 같은 [[질량]]이라는 비례상수 개념을 처음으로 제대로 확립하며 후대 과학을 파격적으로 발전시킨 [[뉴턴 역학]] 체계 확립, 이것에 표시된 수학적 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었고, 사상면에서도 역학적 자연관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후 뉴턴 역학(고전역학)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등장 전까지 과학계의 가장 큰 거목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업적으로 고금 3대 수학자 중 한 사람[* 나머지 두 명은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와 [[아르키메데스]]다.]으로 꼽힌다. 좀 더 설명하자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아인슈타인]]은 절대로 [[뉴턴 역학]]을 뒤집지 않았다. 다만 질량과 시간, 공간의 정의를 다시 함으로써 뉴턴 역학을 보완하였다. [[상대성 이론]]의 내용은 질량과 시공간의 정의를 자기가 말하는 방식대로 다시 하면 뉴턴 역학과 [[맥스웰]] [[전자기학]]의 결과를 모순 없이 합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물리학]]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시공간과 물질은 바로 물리학의 주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을 한바탕 뒤집은 것이 맞다. 정리하자면,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을 뒤집기는 했지만 뉴턴 역학을 뒤집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이는 물리학 [[교과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물리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고등학교, 대학교에서는 먼저 뉴턴 역학을 배운다. 아직까지도 실생활에 관련된 계산은 대부분 [[뉴턴 역학]]에 근거한다. 심지어는 미시 세계인 분자 계산에서도 거대 분자를 다룰 때에는 [[양자역학]]보다는 뉴턴 역학을 쓴다. 일단 양자역학은 계산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거대분자에서는 뉴턴 역학과 별 차이도 없다. 우리의 생활에 가장 영향을 끼친 [[물리학자]]를 들라면 아인슈타인보다는 뉴턴이 더 적합하다. 극도로 적은 오차도 문제를 일으킬 만큼 정밀하게 계산해서 띄워야 하는 인공위성이나 우주 정거장도 어지간하면 그냥 뉴턴 역학 돌린다.[* 물론 '''[[지구접근천체]]''' 같은 경우는 반드시 상대성이론을 사용해야 한다. 약간의 오차로 인류가 멸망하는 일이 없어야 하므로.] 만약 뉴턴을 능가하는 자가 후에 나온다면, 그 인물의 업적은 이론 물리학의 궁극적인 목표인 [[모든 것의 이론]]을 단신으로 완벽히 정립하는 수준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죽기 직전까지 일생을 다 바쳐 연구했음에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이외에도 뉴턴은 고전 [[광학]]의 확립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그로 인해 광학이 [[물리학]]의 영역에 포함되게 된다. 그는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아인슈타인은 영국인이 아니고, 영국인인 뉴턴이 왕립학회의 회장까지 역임한 선배 과학자라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뉴턴의 물리학 체계를 집대성한 명저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가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단위로 힘 (force)의 단위인 뉴턴(N)이 있다. 1kg의 물체를 1m/s^^2^^으로 가속시킬 때 드는 힘이 1N. 간단하게 느낄려면 100g짜리 물건을 들어올렸을때 손에 느껴지는 힘이 약 1N[* 정확히는 0.98N]이다. 17~18세기에 살았음에도 84세까지 매우 오래 살았으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는데, 심지어 취미도 없이 연구에만 매진했다고 한다. 뉴턴의 [[친척]]이자 조수였던 험프리 뉴턴은 "내가 알기론 그는 어떤 오락을 즐기거나 취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연구 외에는 그 어떤 생각도 헛된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긴 생애 만큼이나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친구 [[에드먼드 핼리]][* [[핼리 혜성]]으로 유명한 그 핼리가 맞다.]도 뉴턴보다 1살 더 많은 85세까지 장수했다. == 생애 == 유년기는 불행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세상을 떠난 그 다음 해[* 서기로는 같은 해로 기록되었지만, 당시 영국은 [[그레고리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즉, 그레고리력을 적용하면 해를 넘기게 된다. 그래도 바로 그 다음 해에 또 하나의 위대한 과학자가 뒤를 이었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깊은 감명을 받고, 가끔 혹자는 갈릴레이 전생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사이 밤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미 죽어 [[유복자]]였고 1개월 일찍 태어난 미숙아라 몸이 양말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고 한다. 3살에 어머니 해나 애스큐(Hannah Ayscough)가 재혼을 해 집을 떠나는 바람에, 뉴턴은 외할머니 마저리 애스큐(Margery Ayscough)의 집에 남겨지게 되었다. 외삼촌인 사제 윌리엄 애스큐(William Ayscough)도 그를 자주 돌봐주었다. 새아버지 바너버스 스미스(Barnabas Smith)는 뉴턴의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교구 사제였는데 의붓 아들인 뉴턴과 갈등이 심했다. 이러한 점이 뉴턴의 괴팍한 성격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다만 2000년대 이후의 뉴턴 연구에서는 그를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현대의 정신과 의사가 당대로 [[타임슬립]]해서 뉴턴을 진단하지 않는 이상은 모를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새아버지를 매우 증오하여 때때로 그를 죽이는 상상을 하고, 집을 불태우겠다고 협박과 폭언도 일삼았으며, 10살에 새아버지가 죽자 매우 기뻐했다는 말도 있다. 다만 이부동생들인 메리(결혼 후 성은 필킹턴), 벤자민, 해너와의 사이는 좋아서 자주 놀아주곤 했다고 한다. 뉴턴은 처음부터 공부에 두각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처음 입학하였을 때 뉴턴의 성적은 중하위권이었는데, 당시 뉴턴보다 조금 더 성적이 나았던 아서 클라크라는 한 학우와의 다툼 후에[* 이 학우가 학교에서 알아주는 [[일진]]이었는데, 얌전히 책을 읽고있던 뉴턴에게 고의로 [[사과]]를 던지는 등으로 시비를 털었다가, 이에 빡친 뉴턴에게 [[역관광|먼지나도록 두들겨맞았다고 한다]].], 그에게 경쟁심을 가져 공부를 진지하게 시작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학우는 따라잡았으나, 이미 뉴턴은 공부에 재미를 붙여 그 뒤로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고, 케임브리지를 다녔던 삼촌의 조언을 따라 케임브리지 입학 시험을 보고 1660년에 18살의 나이로 케임브리지에 입학하게 된다. 이후 광학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망원경#s-3.3.1.2.2|새로운 반사 망원경]]을 발명해낸 업적을 인정받아, 1669년에 신학에 투신하기로 뜻을 굳힌 아이작 배로우의 후임으로서 입학 후 약 10년 만에 케임브리지의 루커스 수학 석좌 교수직으로 올라서게 된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그런데 뉴턴이 평생 독신이었던 이유는 당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교수가 되려면 카톨릭 성직자처럼 독신 의무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뉴턴만이 아니라 과거 [[옥스브리지]] 교수들은 그래서 모두 독신이었다. 옥스브리지 교수진의 독신 의무가 해지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말년에 성질이 더러워져서 성질 괴팍한 노인네라고 불렸다고. 그래도 전해오는 말로는 제자들이 "선생님이 한 업적이 많습니다."라고 말하자 피식 웃으면서 하던 명언이 있다. (하기 [[#명언|명언]] 문단 참조) 죽은 뒤에는 영국의 위인들이 잠든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안장되었다. 함께 사원에 안장된 과학자로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찰스 다윈]], 찰스 라이엘 등이 있다. 석관 위에는 그가 자신이 쓴 저서들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몸을 기댄 모습이 조각되었으며, 연구에 사용했던 망원경과 프리즘 등의 기구가 묘사되었다. [[라틴어]]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http://westminster-abbey.org/our-history/people/sir-isaac-newton|#]] ||<|2> [[파일:attachment/아이작 뉴턴/뉴턴묘비명.jpg|width=100%]] || H. S. E. [br] ISAACUS NEWTON Eques Auratus, [br] Qui, animi vi prope divina, [br] Planetarum Motus, Figuras, [br] Cometarum semitas, Oceanique Aestus. [br] Sua Mathesi facem praeferente [br] Primus demonstravit: [br] Radiorum Lucis dissimilitudines, [br] Colorumque inde nascentium proprietates, [br] Quas nemo antea vel suspicatus erat, pervestigavit. [br] Naturae, Antiquitatis, S. Scripturae, [br] Sedulus, sagax, fidus Interpres [br] Dei O. M. Majestatem Philosophia asseruit, [br] Evangelij Simplicitatem Moribus expressit. [br] Sibi gratulentur Mortales, [br] Tale tantumque exstitisse [br] HUMANI GENERIS DECUS. [br] {{{-1 NAT. XXV DEC. A.D. MDCXLII. OBIIT. XX. MAR. MDCCXXVI}}} || ||이곳에 아이작 뉴턴 경이 묻혀 있으니, [[하느님]]과 같은 정신력에 의하여 그가 발견한 수학적 원리로 행성의 운행, 혜성의 경로, 바다의 조석을 처음 밝혔으며, 일찍이 어떠한 학자도 의심하지 않고 있던 광선의 본성을 발견하였다. 또한 자연, 고대, 성서에 관하여 세밀하고 예민하며 확실하게 해명하여 전능하신 하느님이 존엄하심을 철학적으로 증명하였다. 인류가 하느님 곁에 이토록 가까이 있었다는 것은 실로 우리의 큰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 1642년 12월 25일 출생, 1727년 3월 20일 사망.}}}[* 현대 날짜 기준으론 1643년 1월 4일 출생, 1727년 3월 31일 사망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뉴턴의 묘비명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알렉산더 포프가 뉴턴을 칭송한 글귀다.[* 사원 내부의 기념물에 새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 과학적 업적 == > '''[[우주]]에서 위대한 설계를 찾는 그의 과학적 탐구는 고대의 가설들을 뒤엎었습니다.''' > His scientific search for a grand design in the universe overturned ancient assumptions. >---- >[[타임지]], 1999년 송별호에서 [[올해의 인물|각 세기의 인물]] 선정 중 17세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아이작 뉴턴]]을 꼽으며. [[http://content.time.com/time/subscriber/article/0,33009,993035,00.html|기사 원문]] === 고전물리학의 정립 === 우선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고 알려진 [[만유인력]]의 존재 자체를 뉴턴이 발견한 것은 아니다. 지구 상에서 측정되는 중력과 천체운동에 필요한 [[구심력]]이 같은 것이라는 정도의 개념은 당시 학자들도 다들 알고 있었으며, 문제는 그 끌어당기는 힘의 크기가 얼마이며, 그것이 행성 운동에 어떤 식으로 작용하느냐였다. 행성의 공전 주기니 궤도니 하는 것은 이미 전에 [[요하네스 케플러]] 등에 의해 관측되어 케플러의 3대 법칙으로 정립되었는데[* 뉴턴 이전에는 이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해 "케플러의 3현상"이라고 불렀다. 법칙으로 불리게 된 것은 뉴턴이 프린키피아로 그 많은 걸 전부다 수식으로 만들어 설명해버린 이후이다.], 뉴턴이 한 것은 이를 갈릴레이 역학으로부터 발전시킨 [[뉴턴 역학]]([[뉴턴의 운동법칙]])과 [[미적분]]이라는 수학적 도구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만유인력을 수학적 표현으로 정립'''해낸 것이다.[* 그러나 일견 작아 보이는 이 업적이 인류 지성사를 새로 쓰게 만든 것이다. 서양 전통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우주관에서 천계는 지상계와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케플러 등은 이러한 생각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의구심만 던져놓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한방에 정리한 것이 뉴턴의 역학이다. 캐플러의 법칙(천상계의 원리)과 갈릴레이의 역학(지상계의 원리)이 완벽히 동일한 수식을 통해 작동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천계와 지계의 원리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라고 증명해낸 것이다! 장장 2천 년 가까이 인류를 지배해오던 우주관을, 뉴턴은 수학이라는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반박한 셈이다. 이후의 모든 과학자는 "수학으로 과학을 증명"함으로써 뉴턴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수학적 계량을 도입해 연금술을 현대 화학으로 발전시킨 [[앙투안 라부아지에]] 역시 뉴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16세기 잉글랜드의 천문학자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원 모양으로 돈다는 것을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수학으로 계산하려들면 이상하게도 공전주기 계산이 맞지 않아 당대 수학계의 난제로 유명했었다. 그러다 [[에드먼드 핼리]], 크리스토퍼 렌(1632~1723, Sir Cristopher James Wren)[* 천문학자인데, 영국의 [[세인트 폴 대성당]]을 설계한 건축가로 더 유명하다.], 그리고 아이작 뉴턴의 최악의 라이벌 [[로버트 훅]], 이렇게 셋이 누가 먼저 지구의 공전주기 계산을 정확히 해내나 내기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별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핼리는 같은 왕립협회 회원이던 아이작 뉴턴을 캠브리지 대학에서 만난 자리에서 우연치 않게 이 문제를 털어놓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뉴턴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20년 전에 계산해 봤더니 [[케플러의 법칙|원이 아니고 타원이던데?]]" 말 그대로 핼리는 정줄을 놨고, 뉴턴에게 이걸 왜 발표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은 20년 전에 왕립 협회에서 로버트 훅과 크게 다툰 이후로 침묵하게 됐다는 것.[* 뉴턴의 광학 연구는 훅의 연구를 일부 참고했으나 뉴턴은 이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 훅의 업적은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무시했으며(1679년 훅은 두 물체 사이의 인력이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출판하며 이 내용을 참고했지만 훅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이에 훅이 반발한 것이다.), 훅과 뉴턴의 이러한 관계는 당대에도 유명했는데 왕립 협회가 이전할 때 회장이 뉴턴이었는데, 역대 협회장의 초상화 중 로버트 훅의 초상화만 사라지는 일이 있어서 뉴턴이 몰래 치워버렸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 결국 1684년에 핼리의 권유로 [[프린키피아]]를 발표한다. [* 사실 핼리가 물어봤을 때 계산한 종이를 찾지 못해 그를 집에 돌려보내고 수 개월에 걸쳐 산뜻한 풀이방법을 찾아 보낸 것이 '회전하는 물체의 운동에 관하여'라는 9쪽짜리 논문이고, 이 논문을 출판한 것이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 즉 [[프린키피아]]이다.] 거두절미하고 이론의 전개에 대해서 살펴보면, 뉴턴은 물체의 운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의 연구결과를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정리하고, 이를 통해 구심력을 정의했으며, 행성의 궤도가 원뿔곡선이고 태양이 초점 중 하나에 있으며, 궤도에서 케플러 제3법칙이 성립하면 중력은 거리의 역제곱꼴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도출해냈다. 현재의 고등학교 [[물리Ⅰ]] 수준에서는 케플러 제1법칙에 의해 행성의 궤도는 타원 궤도이고, 케플러 제2법칙에 의해 행성의 공전 속도는 태양에 가까울수록 빨라지지만, [[물리Ⅱ]]에서는 그냥 등속 원운동 취급한 상태로 역제곱꼴이라면 궤도에서 케플러 3법칙이 성립한다는, 진행방향이 다른 전개나마 경험해 볼 수 있다. 그렇게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요하네스 케플러]]를 거친 고전 물리학은 뉴턴에서 집대성되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공로 때문에 지금까지도 뉴턴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제임스 맥스웰]]과 함께 [[물리학]]의 3대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물리학의 1/3([[고전역학]])은 뉴턴이, 1/3([[전자기학]], 통계물리)은 맥스웰이, 1/3([[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완성했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양자역학을 반대하는 반대파 수장이었다. 양자역학 지지파 수장 [[닐스 보어]]와 세기의 논쟁을 여러 차례 벌이며 양자역학의 오류를 찾기위해 오랜시간 연구하였고 [[닐스 보어]]에게 날카로운 지적을 수차례 던졌지만 [[닐스 보어]]가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슬기롭게 반박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양자역학이 더욱 지지를 받고 과학계 표준으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즉, 아인슈타인이 본인이 직접 [[양자역학]]을 완성했다기보다는, [[양자역학]]을 부정하기 위한 아인슈타인의 노력이 오히려 이제 막 뜨기 시작한 [[양자역학]]에 논쟁거리를 만들어주며 과학자들 사이에서 핫한 이론으로 급부상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 [[망원경#s-3.3.1.2.2|뉴턴식 망원경]] === 기존의 볼록렌즈 두 개를 합쳐 증폭시키는 방식과 다른, 반사경을 이용한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지금도 반사경을 이용한 망원경을 뉴턴식 망원경이라 부른다. 뉴턴이 반사망원경을 실제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광학]] 분야의 당대 최고의 전문가였기 때문. 실제로 반사 망원경은 뉴턴식 이전에 그레고리식 반사 망원경이 설계 개념으로 먼저 나와 있었는데, 당시 광학기술로는 만들 수 없는 곡면거울을 요구했기 때문에 뉴턴은 당시의 기술로 만들수 있는 방식을 계산, 제시한 것이다.[* 렌즈보다는 반사경을 만드는 것이 훨씬 어렵다. 반사경은 볼록렌즈와 같은 수준의 성능을 얻기 위해 6배는 더 정밀하게 가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결이 이는 연못을 들여다보면 연못에 비친 상은 크게 일그러지지만 연못 바닥은 비교적 잘 보이는 현상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당대 '빛은 순수한 백색이다'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을 때, 그는 프리즘 연구를 통해 다양한 색의 빛의 굴절과 반사 등을 실험해보았고, 다른 색의 빛은 다른 굴절률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굴절 망원경이 색수차가 발생한다는 것을 예측했다.[*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무지개를 만드는 것을 떠올려 보자. 빛이 혼합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바로 이 실험에서였다.] 하지만 반사는 이에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색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반사 망원경을 발명하게 된다. 상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점[* 굴절 망원경과는 달리 개방된 경통 구조를 가지므로, 개방된 공간 내 공기의 대류에 의해 상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현상이 있다. 내부가 밀폐, 진공처리된 굴절 망원경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이 불안정하다.]과 같은 구경의 굴절 망원경보다 상이 어둡다는 점[* 이는 당시 기술의 한계 때문이다. 유리 표면에 반사율이 높은 은이나 알루미늄을을 입혀 만든 현대의 반사경도 두 번 반사되면 빛의 양이 처음의 80~90% 정도로 줄어들어서 상이 약간 어두워지는데 그 당시에는 반사율이 낮은 청동거울로 반사경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같은 현상이 더 심하게 나타났다. 때문에 같은 구경의 굴절망원경보다 집광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이 같은 문제는 후대에 은을 이용한 유리거울 반사경이 도입되면서 거의 해소될 수 있었다.]을 제외하고는 제작하기도 훨씬 쉽고 싸다는 장점이 있다.[* 어두운 별을 볼 수 있도록 더욱 많은 빛을 모을 수 있는 망원경을 제작하려면 망원경의 구경이 커져야 한다. 그러나 렌즈는 유리를 연마하여 제작하므로, 대구경의 구면을 가공하는 것은 어렵다. 반면 금속 반사경은 그냥 붙이거나 작은 평면거울을 다닥다닥 붙이는 방법으로 크게 만들 수 있다.] 망원경 중앙에 반사용 평면거울, 즉 반사경이 있어 상을 가릴 것 같은데, 반사경이 상을 가리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반사경이 "가리는" 빛의 구간이 확대되기 이전의 부분, 즉 빛을 모으는 부분이기 때문. 개구면의 일부를 가린다 해도 가려지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통해 들어온 빛만 모아 상 전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반사용 평면경이 개구면의 일부를 가리더라도 상의 전체적인 밝기가 줄어들 뿐, 상의 일부가 가려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단, 반사 망원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초점이 맞지 않는 부분의 상 흐려짐 현상이 도넛 모양이 되는 특성이 있다. 소위 '도넛 보케[* [[일본어]]이다.]'라고 하며, '보케'가 개구면의 형상대로 형성되는 광학적 원리 때문에 생긴다. ===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라이프니츠]]와의 [[미분]] 논쟁 === [[미분]]법[* 적분은 고대 이집트까지 올라가는, 미분과는 별개로 전혀 상관없는 학문으로 발달한 것이다. 하지만 미적분학의 기본정리가 발견되면서 미분과 적분이라는 학문이 서로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고 서로 연관성이 있는 학문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이다.]을 누가 먼저 발명했나 하는 문제로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라이프니츠]]와 크게 싸웠었다. 라이프니츠는 이 문제를 [[잉글랜드]] 왕립과학협회에 제소하여 공정한 판결을 받고자 했고 뉴턴은 회장 권한으로 이 문제를 '공정한 위원회'를 구성해서 조사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독일 출신 위원에게는 아예 의견 개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게다가 '''위원회 최종보고서는 남몰래 뉴턴이 직접 썼으며, 이 보고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글을 써서 익명으로 왕립과학협회 회보에 싣기까지 했다.'''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죽었을 때는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뉴턴이 여러 외압을 넣은 결과와 동일하게, 실제로도 뉴턴 쪽이 라이프니츠보다 명백하게 먼저 발명했다. 그가 [[미분]]을 발명한 것은 1665~6년으로, 1676년에 발명한 라이프니츠보다 10년이나 빠르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주거나 연구에 사용하기만 했으며, 1671년 작성한 미분에 대한 논문도 발표하지 않았다. 논문이 정식으로 발표된 것은 60년 후였는데, 이때는 이미 뉴턴이 사망하고도 10년이 지난 후였다. 사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분쟁에는 매우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미분 자체를 발표하기 전에 서로에게 자기 결과를 자랑했다는 점. 두 명 모두 미분을 발명했지만 서로 그것을 모르던 상태에서 먼저 뉴턴이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분의 기본 개념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 막연한 개념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를 본 라이프니츠는 답장에서 뉴턴에게 자신의 미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편지를 보냈다. 따라서 누가 미분을 발명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뉴턴은 라이프니츠가 자기 지도를 받아서 미분을 재구성한 주제에 자기가 먼저 미분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배은망덕한 찌질이라고 생각했고, 라이프니츠는 기껏 존경하는 과학자에게 자기 결과를 설명했더니 그걸 싹 빼앗아가고는 오히려 자기를 악당으로 모는 파렴치하고 권위적인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는 단순히 누가 진정한 발명자인가를 넘어선 깊은 감정의 골이 패이게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라이프니츠도 뉴턴의 편지를 받기 전에 이미 미분을 생각해낸 것으로 보지만,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편지에서 영감을 얻어서 불완전한 상태이던 미분을 완성했을 수도 있기는 하다. 뉴턴도 이때까지 미분을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므로, 사실 라이프니츠의 연구 결과를 보고 자신의 미분을 다소 손질했을 가능성도 있다. 혹자의 말에 따르면, 애초에 뉴턴이 먼저 발표를 냈고 그 뒤로 라이프니츠가 자신이 발견한 미분을 발표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뉴턴이 먼저 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미분과 뉴턴의 미분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했다. 그런데 후에 어느 잉글랜드 수학자가 '이것은 뉴턴의 표절이다'라는 의견을 내며 일이 커졌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저 둘은 가만히 있었는데 제3자가 일을 크게 만들었다는 소리. 저 의혹이 생기기 전까지는 둘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표절 의혹으로 [[잉글랜드]] 학계와 [[독일]] 학계는 대판 싸움이 났다. 추가로, 뉴턴이 단순히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고 있던 당대의 대학자라서 라이프니츠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욕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 이전에 흔히 라이프니츠는 라이프니츠 급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e804b8a1a11e442be93fed1d52205a9.png]]]라고 불리는 식을 1674년에 발견했는데, 문제는 이미 제임스 그레고리라는 당대의 영국 수학자가 1671년에 발견했던 식이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그레고리가 발견한 식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0045c226e7d06865ca4d0302a629c6.png]]였는데, z에 1을 넣으면 라이프니츠 급수가 나오기 때문에 의심받을 만했다.] 라이프니츠가 이 식을 독자적으로 발견했음에도 이때 잉글랜드인들의 뇌리에는 '라이프니츠=표절범'이라는 의심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뒷배경과 뉴턴의 언플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당시의 잉글랜드인들에게 라이프니츠는 표절이나 일삼는 파렴치한이 되었다. 사실, 이미 madhava라는 인도의 수학자가 약 200년쯤 전에 아크탄젠트 급수를 먼저 발견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촉발된 논쟁은 예상치 못하게 큰 여파를 불러일으켰는데, [[잉글랜드]] 학회와 [[독일]] 학회의 싸움으로 인해 양국간의 학문적 교류가 중단되었다. 그래서 영국의 수학계는 얼마간[* 100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대륙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었다고.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표절 문제를 명확히 한 현대의 논문 체계가 등장하게 된다.[* 헬 헬먼, '과학사 속의 대논쟁', 이충호 역, 가람기획, 2000, p74-75] [[미분]]의 발명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사실관계는 비교적 분명하지만 해석에서는 다소 의견이 갈린다. 뉴턴이 먼저 발견하기는 했지만, 많은 수학자들의 견해는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각각 독립적으로 발명했으니 두 사람 모두 발명자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미분법이 완전히 무에서 독자적으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 [[페르마]]가 접선의 기울기를 구하는 불완전한 방법을 연구한 적이 있고, 뉴턴의 스승인 아이작 배로는 '미적분학의 기본정리'의 일반화된 형태를 증명했다. 당대에 나름 싹이 틀 만한 토양이 갖춰져 있던 셈이며, 따라서 두 사람이 각자 독립적으로 개발했다 하더라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뉴턴의 각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승자는 라이프니츠가 되었다. 물리학자인 뉴턴의 방식보다는 수학자인 라이프니츠의 방식이 더 수학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어서 현대의 [[미분]]은 거의 라이프니츠의 기호 방식을 따르고 있다. 뉴턴은 물리학자답게 속도와 가속도의 개념을 연구하다가, 라이프니츠는 기하학에서 접선을 연구하다가 각각 미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흔히 알려진 dy/dx 방식이 바로 라이프니츠 방식이고, 뉴턴의 방식은 \dot y처럼 함수(변수) 위에 점을 쓰는 방식이다. 흔히 말하는 dot notation. 다만 f(x)라는 기호를 처음 쓴 것은 [[오일러]]이므로, 뉴턴이 현대처럼 f'(x)라고 썼을 리는 없다.[* 점 대신 y'으로 prime 기호를 넣은 것은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라그랑주]] 방식이며, 오일러는 미분이 선형변환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Df(x)으로 썼다. 실제 수학을 할 때는 1변수의 경우 라이프니츠와 라그랑주 방식이 선호되고, 고차원을 다루거나(편미분이 필요하니까) 해석적 분석을 할 때는 오일러 식과 [math(\partial)]를 이용한 라이프니츠-[[니콜라 드 콩도르세|콩도르세]] 식, [[델(연산자)|[math(\nabla)]]]을 이용한 [[윌리엄 로원 해밀턴|해밀턴]] 식을 꽤 섞어 쓰는 편이다. 뉴턴 방식은 수학에서는 보기 힘들고 [[역학]]에서 자주 본다.] 고등학교에서 미분을 배워 본 학생이라면 합성함수의 미분[* ( f ∘ g )′(x) = ( f( g(x) ) )′ = f′ ( g (x) ) g′(x)]을 할 때 라이프니츠와 라그랑주 방식이 얼마나 편리한지, 그리고 뉴턴 방식이 얼마나 결과가 더럽게 나오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뉴턴 방식으로 쓴 공식을 볼 기회는 거의 없지만 외국, 특히 영국에서 쓴 미적분 책에는 간혹 나오고, 물리학을 한다면 시간에 대해 미분한 양으로 다른 양을 미분해야 하는 경우[* 라그랑지안 역학. F= 꼴의 운동방정식을 에너지(정확히는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의 차이)에 최소작용원리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구하는데, 이 원리의 표현에 변수를 시간에 대해 미분한 값으로 전체를 미분하는 항이 포함된다.]처럼 역학 문제에서 시간에 대한 미분이 잔뜩 들어 있는 미분방정식을 풀어야 할 때 쓰는 양을 줄이려고 쓴다. ==== [[변분법]]과 최속강하곡선 ==== 미분과 관련한 뉴턴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바로 [[변분법]]이다.(뉴턴만의 업적은 아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방정식]]이 조건을 만족하는 변수를 구한다면, 변분법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함수를 구한다. 좋은 예시가 바로 최속강하곡선([[사이클로이드]]) 문제로, "어느 고정된 두 지점을 연결된 궤도 위를 물체가 중력 가속도에 의해 이동할 때, 가장 빨리 도착점에 도달하는 궤도는 무엇인가?"를 구하는 문제다. 쉽게 설명하자면, 출발점과 도착점이 정해져 있을 때, 가장 빨리 도착점에 도착하는 미끄럼틀 모양을 구하는 문제로도 볼 수 있다. 뉴턴은 이 문제를 하위헌스의 법칙과 논증 기하학을 이용하여 답을 구했다. 당시 라이프니츠는 뉴턴과 미적분학 관련 논쟁이 있었고 베르누이는 뉴턴을 시험해보기 위할 겸 이 문제를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들에게 답을 구하라고 한 것이다.(라이프니츠와 베르누이의 풀이를 보면 미적분학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뉴턴은 이런 의도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미적분학으로 풀지 않고 기하학적 기법으로 답을 구하였다.([[프린키피아]]도 스스로 고안한 미적분학 기법보다는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자신의 이론을 증명해나간다.) 이때 뉴턴은 익명으로 답을 제출했지만, 풀이가 워낙 뛰어나고 독창적이라 이름이 저절로 밝혀졌다. 베르누이는 해답을 보자 '''“발톱 자국을 보아하니 사자가 한 일이다.”'''라고 평했을 정도. 변분법은 [[라그랑주 역학]]으로 이어지게 되며, 라그랑주 역학은 [[해밀턴 역학]]을 거쳐 [[슈뢰딩거 방정식]], [[양자역학]]까지 이어지게 된다. === 기타 / 역설 === * 구멍-반점 이론 뉴턴은 빛의 부분 반사에 관한 이론중 하나인 '구멍-반점 이론'이 틀렸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구멍-반점 이론이란, 유리나 물 등의 물체에서 빛이 일부는 투과되고 일부는 반사되는 부분반사현상을 구멍에서 빛이 통과되고 반점에서 빛이 반사된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뉴턴은 "어떤 유리라도 깨끗하게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간단하게 설명하였는데, 이는 뉴턴이 유리를 '닦는다'라는 행동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유리를 닦는다는 것은 미세한 가루들을 문질러 유리면을 긁어내는 것으로 미세한 흠집이 생기는데, 이 미세한 흠집을 빛이 통과한다는 것은 구멍-반점 이론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 [[뉴턴-랩슨 방법]] * [[유율법]] ---- * 역설 뉴턴을 골치아프게 한 역설 두 가지가 있었으니, [[벤틀리의 역설]]과 [[올베르스의 역설]]이 그것이다. == 초상화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odfreyKneller-IsaacNewton-1689.jpg|width=400]] || [[파일:external/images3.wikia.nocookie.net/481px-Isaac_Newton.jpg|width=440]] || || 1689년. 가장 잘 알려진 초상화. || 1702년.[* 가발이다. 이 시대 고위층 유럽인들은 전부 가발을 쓰고 다녔다.] || 사실 뉴턴 본인은 1689년에 그려진 초상화를 싫어했고, 1712년의 초상화가 [[로마]] 시대의 [[귀족]]처럼 그려졌다며 좋아했다. 하지만 1689년작 초상화는 뉴턴의 천재적 이미지를 극대화한 모습 덕분에 그의 사후에 아이작 뉴턴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습이 되었다. [[https://dl.dongascience.com/magazine/view/S200402N042|출처]] 뉴턴이 장수한 인물임에도 이 초상화로 인해 젊은 모습이 더 각인된다. 젊은 시절에 상대성 이론을 정립한 아인슈타인이 노년에 사진을 주로 찍은 까닭에 늙은 모습으로 각인되는것과 대조된다. 1980년대 초반의 금성사 위인전기는 1702년작 초상화를 표지로 사용하여 뉴턴하면 이 초상화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 [[파일:external/www.1st-art-gallery.com/Portrait-Of-Sir-Isaac-Newton-1642-1727-C.1710.jpg|width=400]] || [[파일:external/www.1st-art-gallery.com/Portrait-Of-Sir-Isaac-Newton-1646-1727-1726.jpg|width=420]] || || 1712년. || 1726년.[* 사망하기 1년 전의 마지막 초상화이다.] || == 일화 == * 여러모로 독특한 행동으로도 유명한데, 학생 시절 돈이 없어 부유층 자제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동전 몇 닢을 모아 생활했다든가[* 정말로 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새아버지가 의붓아들에게 유산으로 대학 등록금을 내라고 막대한 액수의 돈과 토지를 주었지만, 뉴턴 본인은 새아버지를 싫어해서 그 돈을 방구석에 처박아두고 없는 돈 취급해서 수중에 돈이 모자랐던 것이다. 그럼 등록금을 어디서 마련했냐면, 부잣집 애들의 뒤치다꺼리로 번 돈으로 '''[[사채|사채업]]'''을 해서 마련했다고 한다. 주 고객은 뉴턴 자신처럼 돈이 없는 학생들이었다고.], 어렸을 때 자기를 괴롭혔던 이웃집 애를 딱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서 다시는 건드리지 못하게 본보기를 보여줬다든가, 근육 사이를 탐험한답시고 [[바늘]]로 눈구멍과 눈알 사이를 깊숙이 찔렀다든가,[* 기적적으로 눈에는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더러운 바늘로 쑤신 덕분에 감염으로 한동안 앓아누웠다고는 하지만, 눈을 잃지 않은 것 자체가 기적이다.] 평생 [[연금술]]에 심취해 있었다는 일화부터 정말 특이한 일화가 많다. * 크롬웰이라는 이름을 가진 폭풍이 잉글랜드를 덮쳐서 큰 피해가 난 적이 있는데[* 그 유명한 [[올리버 크롬웰]]의 이름에서 따온 것 맞다. 크롬웰이 집권했을 때 당시만 해도 [[잉글랜드]]는 공화정이었는데, 그가 죽고 [[찰스 2세]]가 즉위하면서 [[왕정복고|왕정이 부활하자]], 이를 원통하게 여긴 크롬웰의 원혼이 잉글랜드에 강력한 폭풍을 일으켰다는 미신이 민중들 사이에서 퍼졌다.], 고향에 있던 10대 후반 뉴턴이 살던 곳에서도 폭풍우로 강한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뉴턴은 바람이 부는 바깥으로 나와 널뛰기를 하면서 바람의 강도를 측정했다고. 이웃 사람들은 "바람이 마구 부는데 홀로 널뛰기나 하고 미쳤나?"라며 어이없어 했던 일화도 있다. * 밤하늘을 관측하려고 연에 등불을 달아 올렸다가 난데없이 밤중에 [[혜성]]이 떨어지네 뭐네 이웃들이 놀라[* 뉴턴이 어릴 적인 17세기만 해도 혜성은 불길한 존재였다. 하물며 작은 시골마을인 고향이라면 더더욱.] 난리를 피웠다가, 자세히 보고 혜성이 아니라 누가 [[연]]에 등불을 매달아 올린 곳임을 알아차려 연을 날린 뉴턴은 호되게 혼난 적도 있다. * 평생 [[동정]]이었다. 뉴턴의 임종을 지켰던 주치의 리처드 미드 (Richard Mead)가 후에 프랑스의 철학자,[[볼테르]]에게 전한 바에 따르면, 그가 자신의 임종 때에, 자신은 동정이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고 밝혔다.[* Iliffe, R. (2007, January 25). Newton: a Very Short Introduction.]. 1693년경 뉴턴이 그의 친구, 철학자 [[존 로크]]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선생님께서 여자들과 그 밖의 수단으로 자신을 곤란한 일에 끌어들이려 했다는 생각에 그만 마음이 상했다" 라고 밝힌 바 있다.[* Newton, I. (1966). The Correspondence of Isaac Newton (H. Turnball,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이렇게 된 원인은 모친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뉴턴의 아버지가 죽은 뒤 뉴턴을 낳고 3살 무렵에 집을 나가 11살에 새아버지와 동생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모친, 새아버지와 평생 사이가 소원했다고 전해지며[* 뉴턴의 새아버지는 사이가 소원하다던 의붓아들을 위해 땅을 상속해주기도 했고, 종교적으로도 뉴턴에게 무지막지한 영향을 끼쳤긴 했다. 뉴턴 본인은 새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아내에 대한 책임감이든 사회적 도덕감에 의해서든 어쨌든 뉴턴을 꽤나 챙기긴 했다고 한다.], 자식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행복만을 찾는 어머니를 보고 결혼 제도 자체를 혐오했을 가능성도 높다. 다만 여자를 싫어했지만 자신의 조카가 집안일과 빨래를 도와주는 건 흔쾌히 찬성했다고 한다. 위에 언급했듯 이부 여동생들과의 사이도 좋았다. * 물리학보다 [[연금술]], [[성경]]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연구했다고 한다. 사실 그것들이 본업이고 물리학은 취미 생활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는 후대에 소위 이단으로 간주되는 학자로 고대에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톨릭]]이 전부 없애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연금술, 성경 연구로 그것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들을 왕창 연구했다. 실제로 그의 연구 노트 90%는 그쪽 주제였다.[* Alan Sokal, 'Fashionable Nonsense: Postmodern Intellectuals' Abuse of Science', picador, 1999.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그 노트를 연구하고 뉴턴을 '''중세의 마지막 마법사'''라고 한 바 있다.] 덕분에 친구인 [[에드먼드 핼리|핼리]]가 뉴턴의 관심을 물리학으로 돌려놓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한다. 사실 [[연금술]]을 연구하고도 장수한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연금술에서는 [[수은]]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시절에 물질의 특성을 확인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냄새를 맡거나 직접 먹어보는''' 방식이었다. 뉴턴은 특별한 부작용은 겪지 않았던 것 같지만, 말년에 [[우울증]]에 걸린 것이 수은 중독 탓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 시기는 사실상 연금술이 유행한 마지막 시기로, 과학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찰스 2세]]도 열심히 연구하다가 수은중독으로 사망했다는 말이 있다. * [[명예혁명]] 직후(1688) 대학 대표로 [[국회의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제임스 2세]] 통치 시기 꽤나 살벌하던 제임스 2세에게 직언을 자주 해 꽤나 인기가 높았다.] 투표에는 빠짐없이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은 당시 속기록에 딱 하나만 있다고 한다. '''"거, 바람 들어오니 창문 좀 닫아주시오."''' *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그는 [[고양이]]를 길렀는데, 지나다니기 쉬우라고 문아래 작은 여닫이문을 하나 달아 놓았다. 그런데 새끼를 낳으니까 [[뻘짓|옆에 작은 문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걸 본 친구가 '''"어미가 문 연 거 그대로 따라가게 하면 되잖아."'''라고 하니까 당황했다는 일화. * 그 밖에 연구에 열중하는데 배가 고파 간식으로 [[달걀]]을 삶아서 먹으려고 주섬주섬 책상을 손으로 더듬어보다 손에 잡힌 대충 둥근 걸 펄펄 끊는 냄비에 넣고, 나중에 달걀이 다 삶아졌나 하여 꺼내 보니 달걀은 온데간데없고 책상에 두었던 [[회중시계]]가 냄비에서 나오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시계는 꽤 비싼 물건. 배터리가 아니라 테엽을 사용해서 전부 수제품인지라 싼 것도 지금으로 치면 수십만원이 넘어갔다.] * 페스트 치료를 연구하려고 [[두꺼비]]를 이용해서 약으로 만들려는 기록이 있다. * [[케임브리지 대학교]] 가이드에 의하면 뉴턴의 방 창문 밖의 토양을 검사해본 결과, 수은을 비롯한 화학 물질의 농도가 굉장히 높게 나왔다고 한다. 뉴턴이 장기간 꾸준히 미처리 화학물질을 창 밖으로 투척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예상되는 원인은 게으름이라고 === 사과에 관한 일화 === [[페스트]]가 [[런던]]에 퍼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피난하던 시기(1664~1666)의 산책 중에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 더 나아가서 왜 달은 사과와 달리 안 떨어질까를 생각했다고도 한다.][[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여기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프린키피아 원문에 사과나무 언급이 있고 인생 말년에 떨어지는 사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뉴턴 본인이 직접 언급한 바가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이론적 영감을 받았는지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학자들의 연구가 중력의 발견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게 통설이다. 그래도 사과나무 언급이 프린키피아 원문에도 실려있고 사과나무 이야기를 뉴턴이 직접 말한 것도 사실이기도 해서, 그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는다. 실제로, 뉴턴의 전기 작가이자 동시대인이었던 윌리엄 스터클리는, 1726년 4월 15일에 뉴턴이 사과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뉴턴에 대한 그의 전기에 쓴 바가 있다. 또한, 1727년에 뉴턴이 [[왕립학회]]장이었을 당시 부원장이었고, 후에 원장이 된 마틴 포커스(Martin Folkes) 가 후에 전한 말을 토대로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 은 이에 대해 상당히 비슷한 주장을 한 바 있다.[* Westfall, Richard S. “Chapter 5, Anni Mirabiles.” Never at Rest: A Biography of Isaac Newt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10.] 역사적으로 보면 [[볼테르]]가 사과 이야기로 뉴턴을 칭송한 것이 널리 퍼지면서 일종의 전설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볼테르가 영국 유학을 갔을 때 뉴턴의 질녀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사과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볼테르는 당대 가장 유명한 계몽사상가이자 작가였는데, 볼테르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의 책에 거듭 소개함으로써, 사과 일화는 순식간에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고 뉴턴을 대표하는 일화로 등극했던 것.[* "그는 아마 이 이야기를 뉴턴의 질녀에게서 들은 듯한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것이 중력에 대한 뉴턴의 설명이 지닌 명쾌한 단순성을 표현하기에 완벽한 소재라는 점을 깨달았다. 볼테르는 이 이야기를 1727년 『고찰』에 처음 썼고 『편지』에 다시 삽입했다." (니컬러스 크롱크 『인간 볼테르』 후마니타스. 2020. p.58)] 사과 이야기가 진짜 사실인든 아니면 뉴턴이 말년에 창작해낸 이야기든 간에, [[만유인력]]과 사과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져서 이제는 진위 여부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지긴 했다. 심지어 그의 모친의 자택에 있던 사과나무를 여러 번 옮겨 심은 사과나무가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기증받아 심어져 있다. 국내에만 11곳 이상에 심겨졌으며[* 다만 일부는 고사했다.], 접목이므로 종자는 원본과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https://www.nationaltrust.org.uk/woolsthorpe-manor/features/the-story-of-our-apple-tree-at-woolsthorpe-manor|링크]] 참고로 원본 나무도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다.'''[* 다만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니고, 1820년에 한 번 쓰러졌다가 남은 뿌리에서 다시 자란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고 한다.] === [[신학자]] 뉴턴 === 뉴턴은 과학 분야보다 오히려 더 많은 분량의 신학 관련 문헌을 남겼다. 그는 당대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전문 신학자로 간주될 정도로 신학 전문가로 인정받았고, 많은 사상가들과 신학이나 종교에 관한 의견을 지속적으로 주고받았다. 뉴턴은 표상과 이데아 사이의 일치성을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어받았고, 이것은 고전~중세 신학의 연구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일화가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본인이 종교에 대한 의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삼위일체론]]을 부정하였고''', 더 나아가 기독교가 삼위일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서 본문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삼위일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후 [[요한의 콤마|요한 1서 5장 8절]]에 의도적으로 첨가된 구절도 뉴턴이 증명한 것들 중에 하나이다. 이는 [[성공회]]의 견해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고, 당시 이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행위는 사회적 지위를 잃는 것은 물론이고 감옥에 갇히거나 까딱하다가는 사형까지 당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뉴턴은 자신이 공들여 쓴 '삼위일체 반박 논문'의 출판을 생이 끝날 때까지 주저하였다.[* 하지만 성공회 측도 뉴턴의 신학 이론이 자신들의 견해와 불일치한다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다만 이전에 존경받던 대과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황청의 총애를 받다가 단 한 번 교회의 견해와 반대되는 저작을 썼다는 이유로 한 번에 매장된 일이 워낙 사회적으로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똑같은 일이 자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막고 자국이 낳은 걸출한 천재를 자기들 스스로 매장해버리는 헛짓거리를 하지 않으려고 그에게 경고만 주고 눈감아줬을 뿐이다.] 결국 그가 죽은 후에 방대한 종교 문헌 중 4가지만 사후에 출판되었고, 나머지 원고는 20세기 들어 경매를 통해 비로소 세상으로 나오게 됐다.[* 이때 산 사람이 경제학자 [[케인즈]]다.] 경매 이후 뉴턴의 신학과 종교, 연금술에 관한 원고는 전 세계에 분산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측정과 연구가 어려운 상황이다. 뉴턴이 남긴 기록을 단어 수로 본다면 과학과 수학에 관해서는 100만 단어, 연금술에 관해서는 55만 단어, '''신학과 종교에 관해서는 140만 단어'''로 추정된다. 양으로만 따지면 과학자가 아니라 신학자라 불러야 할 수준. 뉴턴의 학문적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어서 과학, 신학뿐 아니라 철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경제학자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도덕 철학자였던 [[아담 스미스]]가 있다.] 성경에 근거해 종말을 계산하기도 했다. 그는 세상의 종말이 [[2060년]]에 일어난다고 보았는데, 당시 온갖 [[종말론]]자들이 이런 저런 소리를 하는지라 성경 말씀의 권위가 훼손되는 게 통탄스러워 직접 나섰다고. 이하는 그의 추론. 1. [[다니엘서]] 7:25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에 근거함. 1. '한 때'를 1년, 즉 12개월로 보면 '한 때+두 때+반 때=12개월+24개월+6개월=42개월'임. 1. 42개월은 [[요한 묵시록]] 11:2의 "마흔두 달"과 요한 묵시록 11:3의 "천이백육십 일"과 도 일치함. 1. 1일을 1년으로 계산하면 '''1260년'''이 흐른 후 종말이 옴. 1. 기산 연도를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 자리를 받은 서기 '''[[800년]]'''으로 잡음. 1. __800+1260=2060년__ 사실 뉴턴의 진의는 2060년이 되기 전까지는 종말 같은 거 안 오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말자는 것에 가까웠고, 엄밀히는 종말이 아니라 성경에 일렀듯 새 세상이 열린다고 보았다. 사실 기독교적 입장에서만 본다고 한들 예수부터가 [[마태오 복음서]] 25장에서 마지막 때를 알지 못한다고 한 바 있으니, 괜히 호들갑 떨거나 흑화하지 말고 그냥 뉴턴이 이런 것도 연구했구나 정도로만 보자.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99359|#]]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는 미적분을 누가 먼저 발명했느냐를 놓고서 뉴턴과 다툼을 벌인 인물이다. 그는 뉴턴의 ‘숨은 인력적 속성’이 ‘진정한 철학의 여러 원리들과 어긋날’ 뿐 아니라 ‘무지의 낡은 도피처’로 되돌아가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뉴턴 옹호자들은 중력은 단지 물질의 근본적인 성질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서, '''뉴턴 자신은 정말로 중력의 원인을 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해답을 찾기 위한 그의 방법을 본다면, 뉴턴은 17세기에 우연히 태어난 ‘근대과학자’가 아님이 드러난다. 뉴턴은 평소답지 않은 겸손한 태도로 자신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재발견했을 뿐이라고 여겼다. 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던 법칙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뉴턴은 프리스카 사피엔티아{{{-2 (prisca sapientia)}}}를 믿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이 개념은 ‘고대의 지혜’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타락했다고 여겼다. '''뉴턴은 그리스신화, 성경 구절, 그리고 『헤르메티카』를 해석하여, 그 속에 자신의 중력 법칙을 포함한 세계의 숨겨진 구조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음을 밝혀내려고 애썼다. 뉴턴의 생각으로는, 중력이란 신이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관여해서 생긴 결과였다{{{-2 (그리고 고대인들도 같은 생각이었으리라고 뉴턴은 믿었다)}}}.''' 신의 기하학적 청사진을 밝혀냈다고 여긴 케플러처럼 뉴턴도 자신을 {{{-2 (단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고대의 지식을 복구하기 위해 선택된 사람이라고 여겼다. >---- >-Lawrence M. Principe[* 존스 홉킨스 대학의 과학기술사학과 및 화학과 교수. 주요 연구 분야는 중세 말-근대 초 과학사이다.], 『과학혁명』 {{{-2 ''THE SCIENTIFIC REVOLUT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노태복(역) 물론 뉴턴에게 신학적 동기가 강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사와 달리 신학사의 관점에서 뉴턴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신학사의 관점에선 동시대의 [[라이프니츠]]가 훨씬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의 신학적 동기가 새삼스럽게 주목 받는 이유는, 오늘날의 과학자 이미지를 과학혁명의 시대로 소급하여 "현대 과학자도 이러하니 옛날 과학자도 이러할 것이다"라고 넘겨짚는 오류를 정정하는 가장 강력한 예시이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의 시대에 과학자 집단은 반종교적인 집단도 아니었고, 회의론적인 집단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신학적 동기는 세계에 대한 탐구의 강력한 추진력이었다. 이는 과학혁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뉴턴에게도 적용된다. >가령, 당대의 모든 사상가들은 인간, 신, 그리고 자연계 사이의 긴밀한 관련성을 확신했으며, 이로써 신학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 사이에 상호관련성이 있음을 확신했다. 따라서 '''당시에 논의된 주제들은 과학과 신학/종교가 뒤섞인 복잡한 성격을 띠었다. 근대 초기의 자연철학을 이해하려면 오늘날의 여러 가지 상식적인 가정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첫째, 거의 모든 유럽인, 특히 이 책에서 거론된 모든 과학사상가는[* (발췌자 주석) AD 1500-1700년의 과학사상가들.] 기독교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현대적이든 아니든 간에 과학 연구에는 무신론—에둘러 표현하자면 ‘회의론’—이 필요하다는 개념은, 과학 자체를 종교로 삼길 바라는 {{{-2 (대체로 자신들을 그러한 종교적 위계질서에 포함시키는)}}} 이들이 제안한 20세기의 신화다.''' 둘째, 근대 초기의 경우 기독교 교리는 의견이나 개인적 선택이 아니었다. 당시의 기독교 교리는 자연계의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에 맞먹는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신학적 이론이나 예배 관행의 고차원적인 지점을 놓고서는 교파 간에 분명 이견이 존재했다. 마치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중력의 실재성이나 원자의 존재 또는 과학적 연구의 타당성을 의심하지는 않으면서 아주 미세한 지점을 놓고 서로 논쟁을 벌이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이 결코 ‘개인적 믿음’의 지위로 전락한 적은 결코 없었다. 오늘날의 과학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신학은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들의 요체이자 존재에 관한 진리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탐구 행위였다. 그렇다보니 '''신학적 교의들은 근대 초기 자연철학자들이 연구 자료로 쓴 데이터 집합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신학적 사상들은 과학 연구와 추론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단지 과학 연구의 바깥에서 얼마간의 ‘영향력’을 미친 정도가 아니라, 신학적 사상은 자연철학자들이 연구하던 세계의 필수적이고 중요한 일부를 차지했다.''' >---- >-Principe, 같은 책 === 조폐국 감사, 국장으로서의 뉴턴 === 1696년 조폐국 감사 자리를 시작으로[* 이 직위는 정부에서 발행한 통화를 감독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위조화폐]]를 통해 경제를 혼란케 하는 위조범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형사]]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감사 직위를 얻은 까닭에 뉴턴의 경력에 [[탐정]]이 추가되었고, 당대 최강의 화폐 위조범이었던 윌리엄 찰로너(William Chaloner, 1650~1699.3.22.)라는 사람은 이 당시 뉴턴과 치열한 추격전과 법정 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였던지라 결과는 뉴턴의 압승으로 끝났으며 찰로너는 감옥에 갇힌 뒤 1699년 3월 22일에 교수형을 당했다. [[http://google.com/amp/s/m.sedaily.com/NewsViewAmp/1ODHDF5HHH|여기]]에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1699년부터 조폐국장의 자리를 25년이나 맡았는데, 임기 중에 금속 비율 등을 바꾸어 화폐를 개혁하기도 했다. 특히 [[동전]]의 테두리를 깎아 팔아먹거나 동전을 하나 더 만드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이른바 클리핑(clipping)이라고 한다. 여기서 클립은 종이 클립이 아니라 손톱깎이(nail clipper)의 그 클립이다. 동전의 테두리를 조금씩 깎아 이득을 취하는 방법으로, 실제 옛날에는 동전을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으로 만들었고, 이런 금속들은 상대적으로 무른 종류였기에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이 외에도 동전을 자루에 넣고 흔들어 떨어져 나오는 금속 부스러기들만 긁어모으는 스웨팅(sweating. 땀을 흘린다는 뜻이 있다.) 등의 수법이 성행했다. 관련 내용은 [[늑대와 향신료/실제 중세시대와의 비교#화폐|이곳]]도 참고하는 것이 좋다.] 동전에 테두리와 톱니를 만들어 넣은 것은 이 사람의 업적. 또한 조폐국장이 되고 2년 뒤인 1701년에 [[아마인유]]를 이용한 아날로그 온도계를 개발하여 [[뉴턴온도|역사상 최초의 온도 체계]]를 고안하기도 했으나, 순금속([[주석(원소)|주석]], [[납]], [[비스무트]] 등)과 간단한 합금의 녹는점을 측정한 값이 포함되어있는 등 조폐국의 업무와 관련이 있을 법한 내용의 특성상 본인의 안위를 걱정해서인지[* 한편으론 뉴턴의 온도계는 고온에서 오차가 커지는 문제가 있어 금속의 녹는점을 정확하게 알아보는 데 쓰기엔 부적합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익명으로 연구를 발표[* 영국 [[왕립학회]]의 학술지 '왕립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에 발표했을 때 본인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훗날 뉴턴 사후 그의 업적을 모아 편찬한 서적이 발간되면서 해당 논문이 그의 것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하여 이 온도 체계는 생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뉴턴이 조폐국장을 맡은 일화 또한 흥미롭다. 원래 뉴턴과 친분이 있던 재무대신 찰스 몬태규가 월급 많이 주는 대신 할 일 별로 없는 명목상의 자리로 조폐국 감사 자리를 하나 줬는데, 그가 조폐국 감사 자리에 엄청난 열의를 보이게 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아예 거처를 [[케임브리지(영국)|케임브리지]]에서 [[런던]]으로 옮기고는 자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조폐국 업무에 몰두했다고 한다. 당시 유명했던 화폐 위조범 윌리엄 챌로너를 잡기 위해 정보원을 고용하고, 이러한 정보원과 만나기 위해 변장을 하고 술집에서 접선을 하기도 했다고. 또한 조폐국장이 되고 싶어 이런저런 정치적 뒷공작도 했다고 한다. 결국 전임 조폐국장이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자 후임 조폐국장에 임명되었다. 다만 조폐국장으로서의 업적은 후세에 긍정적으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당시 영국은 금과 은을 모두 본위금속으로 사용하는 이중본위제였다. 이 경우 금과 은의 법정 교환비가 실제 시장에서의 교환비와 다르면, 실제 가치보다 고평가된 금속만이 유통되게 된다. 당시 영국은 실제 시세보다 법적으로 [[금]]을 고평가하고 있었다. 결국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금화가 은화를 구축하여]] 이후 [[영국]]의 화폐 제도가 한참 동안 꼬여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당연히 뉴턴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환비율 조정을 시도했지만, 이는 금화를 소유하고 있던 자산가들의 자산 가치를 줄여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반발을 사 실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뉴턴은 위조화폐 방지 업무에만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에서는 금화만이 유통되게 되었고, 법적으로 저평가된 은화는 외국에서 금화로 바꿔오게 된다. 문제는 금이 그 가치가 너무 컸기 때문에 소액화폐 수요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폐 활성화로 해결하기 전까지는 영국 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다만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힘든 것이, 역설적으로 지폐 도입을 앞당기는 효과를 가져왔고 지폐를 사용하면서 신용화폐로의 발전이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뉴턴 시기에 금을 고평가하여 사실상 금은 이중본위제를 포기하고 [[금본위제]]를 채택하였는데, 이중본위제 자체가 유지/관리하기 너무 어려운 체제이다 보니 단일 본위제를 채택한 것이 결국 금융업에 긍정적인 효과를 주게 된다. 또한 [[은본위제]]를 채택하여 국제 시세보다 은을 고평가하고 있던 [[중국]]과의 국제무역이 촉진되는 효과를 발휘하였다. 어차피 영국 국내에서는 은이 저평가되는데, 중국에서는 오히려 국제 시세보다 은이 고평가되다 보니, 중국과의 무역이 수지타산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이는 [[아편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중국이 엄청난 규모의 무역을 하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시대가 지나 영국이 세계 최강국이 될 무렵이 되면 영국 중심의 금본위제가 세계 금융시장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된다. 뉴턴의 조폐국 감사와 국장 시절을 다룬 책인 <뉴턴과 화폐위조범: 천재 과학자, 세기의 대범죄를 뒤쫓다(Newton and the Counterfeiter: The Unknown Detective Career of the World's Greatest Scientist)>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 [[남해회사 거품 사태|남해 거품 투자 손실]] === >I can calculate the motion of heavenly bodies, but not the madness of people. >'''나는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계산할 수 없다.''' >---- >이익실현 후에도 남해회사의 주가가 더 오르는 것을 보고, 전 재산을 주식 투자에 꼴아박기 직전에 남긴 말 뉴턴은 [[1720년]]에 역사상 최초로 발생한 [[버블경제]]인 남해거품사건에서 합계 5만 파운드(약 '''50억''')에 달하는 [[주식]]을 단타 매매 형식으로 투자했다가 '''[[떡락|몽땅 날려버린]]''' 흑역사가 있다. 이 때 잃어버린 금액은 자기 재산의 '''80~90%'''라고 한다. 초반엔 막 오르고 있는 사우스 시 주식을 매입하고 더 오르자 처분해, 주식 투자에 적절히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서 [[존버]]하고 있던 주변인들이 쾌재를 부르자,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 불안하고 배가 아파서''' 다시 주식에 도전한다. 하필 그가 다시 주식 투자를 시작한 시기는 주가가 피크였던 시점이었고, 이후 거품이 꺼지며 주가가 폭락하여 가진 전 재산을 날려먹었다. 그는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여 주가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음에도 [[손절매]]를 하긴 커녕 저점매수를 시도하다 큰 낭패를 보았다. 재산을 몽땅 투자하고도 부족해 대출까지 동원해 자금을 끌어모아, 떨어지고 있는 주식에 [[물타기]]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메피스토]]에게 현혹당한 [[파우스트(희곡)|파우스트]]나 다름없다. 역사상 다시 없을 것 같은, 하늘이 내려주셨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천재가, 주변인들에 대한 질투로 다시 주식에 손을 대고, 주식이 떡락 중일 때 거의 전 재산을 주식에 넣고 버티다가 [[한강 정모|템스강 정모]] 각을 봤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적이고 황당하면서도 기이한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또, 인류 최고의 지성으로 칭송받는 뉴턴도 결국 주식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건 뉴턴이 말년에 벌인 일이고, 당시 평균 수명상 이미 죽었어야 할 나이였음을 고려해야 한다. 뉴턴은 현대 장수 국가 평균 나이 이상으로 살았다. 이 일로 인하여 아이작 뉴턴이 폭망했다는 이야기가 국내에 나돌고 있다. 실제로 이 사건으로 가진 재산의 상당수를 날려먹은 건 사실이지만 이후 아이작 뉴턴이 사망하기까지 7년만에 본인의 재산을 원래대로 복구해내는데[* 사실 생애 후기의 뉴턴은 고정적인 수입원이 많았다. 먼저 물려받은 토지 자체가 많았다. 뉴턴은 부계로부터 쓸만한 장원과 농장을 많이 물려받았다. 게다가 양부 바너바스 스미스 사망 이후 뉴턴의 어머니 해나 에이스코는 현대의 추산에 따르면 잉글랜드에서 토지를 가장 많이 보유한 1500명 안에 들었다. 해나 사후 대부분은 스미스의 아들 벤자민에게 돌아갔으나 워낙 땅이 많았다보니 뉴턴에게도 상당량의 토지가 돌아갔다. 출판물의 인세도 워낙 많았다. 프린키피아는 현재 거의 물리학계의 성경이고, 당시에도 엄청난 평가를 받았으며, 다른 책들도 잘 팔렸다. 조폐국장으로서 찍어난 주화에 비례해 받는 성과급도 어마어마했다. 사실 투자 같은 건 안 했어도 상관없는 부자였는데 괜히 욕심부리다가 날린 것이었다.] 성공하었다.~~역시 예나 지금이나 유명인 걱정은 하는게 아니다~~ == 명언 == >"나는 세상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이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진리라는 거대한 대양이 펼쳐져 있고, 가끔씩 보통 것보다 더 매끈한 돌이나 더 예쁜 조개 껍질을 찾고 즐거워하는 소년 말이다." >"I do not know what I may appear to the world, but to myself I seem to have been only like a boy playing on the sea-shore, and diverting myself in now and then finding a smoother pebble or a prettier shell than ordinary, whilst the great ocean of truth lay all undiscovered before me." >---- >[[https://en.wikiquote.org/wiki/Isaac_Newton|출처]]. 상술한 제자들에게 하던 말로서 내가 해낸 업적이라는 건 고작해야 바닷가에서 뛰어노는 아이가 찾은 조개껍질이나 돌 밖에 안된다는 겸손을 담은 명언이다. 오래전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바 있다.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 편지 내용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거인은 훅과 [[데카르트]]다. [[https://www.cambridge.org/core/publications/collections/the-correspondence-of-isaac-newton|뉴턴 서간집 1권 154번 편지 참조]] 일각에서는 꼽추였던 훅을 돌려까려고 일부러 이렇게 적었다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사실 뉴턴은 이때까지 훅과 사이가 좋았다.]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격언은 뉴턴이 최초로 한 말이 아니다. '''"거인의 목말을 탄 난쟁이"'''{{{-2 (nani gigantium humeris insidentes)}}}는 중세의 스콜라학자들이 선학들을 의식하여 존경과 겸손을 담아서 하던 말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12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인 샤르트르의 베르나르두스(Bernard de Chartres)가 처음이다. 정확히는 잉글랜드의 철학자인 솔즈베리의 요한(John of Salisbury)이 그의 저서에서 샤르트르의 베르나르두스가 한 말이라고 소개한 것이 원조다. 이것도 베르나르두스의 기록이 지금 남은 가장 오래된 사료일뿐 어쩌면 더 옛날부터 있던 말일 수도 있다. 뉴턴은 유명한 문구를 편지에 인용한 것뿐.] >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lders of Giants. >---- >- [[로버트 훅]]에게 보내는 1675년 2월 5일자 편지 中 >난 겨우 꼬맹이에 지나지 않고, 내가 한 업적이라는 건 그 꼬마가 바다에서 주운 조개껍질 한 줌에 지나지 않는다네. 바다에는 더 많고 더 엄청난 업적이라는 게 많으니 자네들도 그 꼬마의 조개껍질을 덮는 엄청난 발견을 할지 누구도 모르는 일 아닌가? >---- >- 말년에 제자들이 "선생님이 한 업적이 많습니다."라고 말하자 피식 웃으면서 한 말. >난 진리를 찾아 다니는 꼬맹이였지만, 내가 찾은 건 고작해야 바다에서 조개껍질 한 줌을 주웠을 뿐, 결코 진리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진리를 찾아 바다에서 더 크고 더 많은 무엇을 줍거나 발견할지 모른다. 그것이 뭔지 나도 모르지만 이 바다에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넘치고 많은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 >- 다른 버전으로 이렇게 유언을 책자에 쓴 경우도 있다. >I can calculate the motion of heavenly bodies, but not the madness of people. >'''내가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계산 못 하겠다.''' >---- >이익실현 후에도 남해회사의 주가가 더 오르는 것을 보고, 전 재산을 주식 투자에 다시 꼴아박기 직전에 남긴 말 == 후세 인물들의 평가 ==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대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주께서 "[[빛이 있으라|뉴턴이 있으라]]!" 하심에 [[고전역학|모든 것이 밝아졌다.]] >---- >- [[알렉산더 포프]], 아이작 뉴턴의 묘비명으로 쓴 글.[* "It did not last: the Devil howling 'Ho, Let Einstein be,' restored the status quo.” (그러나 ‘호!’하고 소리치며 악마가 말하길, '''"[[상대성 이론|아인슈타인이 있으라!]]"''' 그러자 모든 것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으니.)라는 존 콜링즈 스콰이어 (John Collings Squire)의 패러디 시가 있다.] >뉴턴은 광학에 종사하는 동안 거의 전적으로 빵과 [[포도주]]와 물을 먹고 살았다. >---- >- 현대 [[생리학]]의 창시자인 Haller의 증언. 또한 [[볼테르]]는 뉴턴의 동물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http://ivu.org/history/renaissance/newton.html|#]] >뉴턴은 이성의 시대를 연 최초 사람이라기보다는 최후의 [[마법사]], 마지막 [[바빌로니아]]인이자 [[수메르]]인, 약 1만 년 전에 인류의 지적 유산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던 사람들과 같은 눈으로 가시적이고 지적인 세계를 바라보았던 마지막 위대한 정신. >---- >- [[존 메이너드 케인스]][* [[경제학자]]로서 가장 유명하지만 아이작 뉴턴 재조명의 선두 주자이기도 하다. 그는 경매에 나온 아이작 뉴턴의 미출간 저작을 구매하여 읽을 정도로 뉴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를 검토한 끝에 케인스가 내린 평가가 바로 이것.] >“그(뉴턴)는 [[과학혁명|인류 지성사의 전환점]]이었다. 뉴턴 이전에는 경험 세계의 심오한 특성들을 표현해줄 수 있는 물리적 인과율의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서양식의 사유와 연구, 실험방법을 결정해준 사람은 뉴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으며 오직 뉴턴이 그 길을 제시했다. 그는 핵심이 되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 뛰어났을 뿐 아니라 그 시대에 이용 가능했던 실험 데이터를 독창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세세한 증명방법에 대해서도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했다.” >----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뉴턴의 생애는 과학과 더불어 신학과 연금술이 평생 동안 함께 얽혀 있었다. 오히려 분량으로만 따지면 신학 관련 저술이 더 많다. 오늘날 알려진 여러 자료들을 취합해보면 신학적 연구를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천문학에 손을 댔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 이전에는 점성술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물론 뉴턴이 관심을 가진 이 시기의 점성술은 윌리엄 릴리로 상징되는 고전 르네상스 점성술로, 현대의 별자리 점 같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복잡한 수학적 기법이 필요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없어서 점을 칠 때마다 밤하늘의 지도를 다 관측, 계산해서 그려야 했다.] 천문학을 위해서 물리학 연구를 했고, 물리학을 위해 수학을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진지하게 본업이 뭔지 따지면 오히려 종교와 신학 쪽이 더 맞는 것. 이것은 케인즈가 거시경제학 이론을 만들다 여름에 심심해서 뉴턴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알려지고, 유명해진 내용이다. == [[대중문화]]에서의 뉴턴 == 영화《[[다빈치 코드]]》의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사과]]도 같이 등장. 드라마 《[[닥터후]]》에서도 언급이 된다. 거기서 [[4대 닥터]]가 그에게 [[중력]]을 발견하도록 나무 위로 올라가 사과를 떨어뜨렸는데, 뉴턴은 그걸 보더니 닥터 보고 나무에서 꺼지라고 했고, 결국 같이 저녁 먹으면서 말로 설명해 줬다고 한다. 《[[록맨 X 시리즈]]》 중 하나인 <[[록맨 X6]]>에 등장하는 과학자 [[아이조크]]의 모티브가 아이작 뉴턴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불타는 성전]]》에 등장하는 [[나그란드]] 지역에서는 공중에 떠 있는 섬들 중 한 곳에 나무에 기댄 상태로 죽어있는 [[해골]]과 사과 나무, 근처에 떨어진 사과가 있다. [[중력]]을 무시하고 [[부유도|공중에 뜬 섬]]이나 사과 나무 등으로 미루어 봐서는 아이작 뉴턴에 관한 짓궂은 [[이스터 에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의 최종보스인 [[도른커크]]의 본명이 '''아이작'''이며 지구에 있을 때의 직업은 '''과학자 겸 철학자'''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봐서는 아마 이 인물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아이작 뉴턴 본인'''이라거나. 《[[타임보칸]] 시리즈》에서도 나왔다. 도론죠 일행과 아웅다웅하다가 사과나무를 걷어차는 바람에 우루루 떨어진 사과에 파묻히면서 진리를 깨달았다. [[제임스 대시너]]의 SF소설 《[[메이즈 러너]]》의 등장인물 '''뉴트'''의 이름은 뉴턴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서 이름의 유래를 언급했다. 《[[천재소년 지미 뉴트론]]》의 주인공 [[지미 뉴트론]]도 뉴턴을 [[오마주]]한 캐릭터다. 키가 작다는 것하고, 뉴트론이라는 성도 뉴턴과 비슷한데다 지미 뉴트론의 미들네임(middle name)도 아이작(Issac)이다. [[NELL]]의 정규 6집 [[앨범]]의 제목이 《Newton's Apple》이다. 천문학자 이강환 박사의 《뉴튼과 뉴튼역학》 오디오강의 [[http://file.ssenhosting.com/data1/scienceppl/1373098170422.mp3|PLAY]] 《[[가면라이더 고스트]]》의 주인공 라이더 [[가면라이더 고스트(가면라이더)|고스트]]가 사용하는 [[고스트 아이콘]] 중 하나로 등장. [[파일:1495720942.jpg|width=250]] [[파일:1495720943.jpg|width=550]] [[마블 코믹스]]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이어온 지구를 지키는 과학자들이 모인 비밀 조직의 수장이자, [[에인션트 원]]의 부재 시에 소서러 슈프림이었으며, [[하이드라]] 멤버인 괴상한 인물이다. 그 외에 스승인 [[갈릴레오 갈릴레이]], 라이벌인 [[로버트 훅]], [[라이프니츠]], [[블레즈 파스칼]], [[존 로크]] 등을 본인이 직접 살해하고, [[노스트라다무스]]에게 죽지 않는 약을 주사해서 고문까지 할 뿐만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전쟁까지도 벌였다.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sphero&no=592961|#]][* [[마블 코믹스]] 내에 나오는 위인들은 대체로 스펙이 뛰어난 위인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곤충형 외계 종족인 브루드의 침공을 막아낸 [[임호텝]], [[센티넬(마블 코믹스)|크리 센티널]]을 거대 로봇으로 조종해 부순 [[아르키메데스]], [[셀레스티얼]]을 [[아가리 파이터|말빨]]로 처리한 [[장형(후한)#s-1|장형]], [[소서러 슈프림]]이었던 [[장각]] 등.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sphero&no=592991|#]][[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typemoon&no=5799117|#]]] 포켓몬스터 소드 · 실드에 등장하는 포켓몬인 [[애프룡]]의 전용기 [[G의힘]]도 뉴턴의 사과를 모티프로 만든 기술이다. 높은 나무에 매달린 사과가 떨어지면서 적을 때리는 기술이다. 그리고 중력이 강할 수록 위력이 늘어나는 점도 해당 일화를 참고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