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사건사고)] [include(틀:일본군의 전쟁범죄)] {{{+1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九州大学生体解剖事件)}}} {{{+2 {{{#808080 |}}}}}} {{{+1 아이카와 사건(相川事件)}}} [목차] == 개요 == 아이카와 사건은 [[규슈제국대학]] 의대에서 일어난 전쟁포로 생체실험 사건이다. == 사건 경위 == >수술대에 눕혀진 포로들에게 마취가 진행됐고 옷이 벗겨졌다. 팔에 꽂은 주사기를 통해 투명한 액체가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노 옹은 “나중에야 그게 바닷물이었으며 혈액 대용으로 주입됐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 다음 광경은 더 끔찍했다. 포로 몸에서 장기가 하나씩 적출되는 것이 아닌가. 지켜보고 있던 일본 군인 한 명이 갑자기 “이놈은 일본을 무차별 폭격했다. 총살을 당해야 할 놈이란 말이다”라고 외쳐댔다.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이 정당한 일이라는 변명이었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0&aid=0002846768|1945년 일본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 목격자 도노 도시오의 인터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5월]], [[일본]]을 공습하던 [[미합중국 육군]] [[육군 항공대#s-3|항공대]]의 초대형 [[폭격기]] [[B-29]] 한 대가 [[오이타현]]과 [[구마모토현]] 경계 근처에, 19살짜리 [[학병]]이 조종하던 [[일본 육군]] [[전투기]]의 공격에 의해 불시착했다. [[규슈]] 지구를 관할하던 [[육군]] 서부군사령부는 탑승원이었던 윌리엄 프레드릭 미 육군 항공대 [[소령]]을 포함한 12명을 [[포로]]로 잡고 [[재판(법률)|재판]] 없이[* 실제로 이 시기에 재판없이 개발살난 포로들도 꽤 많았다.][* [[조종사]]였던 마빈 S. 왓킨스 [[소위]]는 [[도쿄도|도쿄]]로 압송되었다.] 12명의 탑승원 중 8명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때 [[규슈제국대학]] 제일의 이시야마 후쿠지로 외과 교수와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외과 출신의 코모리 타쿠 육군 [[군의관]]은 [[생체실험]]을 서부군사령부에 제안하여 사토 요시나오 육군 [[대좌]]의 허가를 받은 후 [[규슈제국대학]] 의학부는 사형이 선고된 포로 8명을 서부군사령부로부터 인수했다. 이동된 수용지가 병원임을 깨닫자 8명의 미군 포로들은 사형의 공포에서 벗어나 안도했으며 그 중에는 웃는 얼굴로 의사들을 향해 'Thank you'라고 말하는 포로도 있었다고 한다.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의 이시야마 교수를 포함하여 토리스 타로 교수, 히라오 켄이치 [[조교수]] 외과 의사, S 교수, 의학부 학생, 간호사 등 50여 명이 동원되어 미 육군 포로를 수술실로 연행하여 산 채로 [[간]], [[심장]] 등의 기관을 없애거나 혈액 대용으로 개발 중인 [[생리식염수]]를 해수로 대체 가능한지 등의 실험을 했다. 이때 이시야마 교수는 수술대를 둘러싼 제자들에게 "심장은 자르는 것도 꿰매는 것도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다." 등의 교육을 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포로수용소]]에서 행방불명된 [[연합군]] 포로의 행방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원자폭탄]] 공격으로 인해 사망하거나 학대 등으로 사망한 포로들 이외에 미심쩍은 이유로 사라진 포로들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해당 지역에서의 B, C급 [[전범]]들에 대한 재판 및 처벌을 시행하였다. 이때 포로 학대 혐의로 상당히 많은 조선인, 대만인 [[군무원]]들이 처형되었다. [[후쿠오카현|후쿠오카]]에서 '''실종된''' 포로의 행방에 대해 의문을 품은 총사령부 법무국의 알버트 카펜터 육군 [[대령]]은 5개월간에 걸쳐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그들이 병원에서 산 채로 해부되었고 일설에는 해부와 실험이 종료된 후 제거된 심장이나 간 등의 내장 기관과 근육, 피부 등은 그대로 잘게 썰려져 회가 되거나 불로 조리되어 육군 [[장교]] 집회소 연회에 제공되었다는 진술도 확보했다.[* 단 이 부분은 유력한 소문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에 이 혐의로는 [[불기소처분]]되었다. 실제로 [[무타구치 렌야|고위 일본 장교]] 한 사람도 이런 소문으로 꽤 욕을 먹은 바 있지만 사실과 무관한 것으로 판명났다. 애초에 그랬으면 그도 처벌을 받았지 2년 만에 나오는 일은 없었을 거다. 오히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은 군사적으로 매우 무능했지만 싱가포르 화교 학살 당시 주민들을 보호하려 했다.] 결국 의학부의 이시야마 교수, 토리스 교수, 히라오 조교수, 수간호사 츠츠이 시즈코, 재판 없이 8명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서부군사령관 요코야마 이사무 육군 중장, 인육을 먹은 호리우치 키요신 육군 소장 등 29명을 기소했다. [[1946년]] [[7월]] 이시야마 교수는 후쿠오카 도테쵸 형무소에서 "모든 것은 군부의 명령.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말을 남기고 제자와 간호사들의 석방을 요청하며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 이전부터 이시야마 교수는 [[731 부대]](일명 마루타부대)의 설립과 운영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다는 의혹이 있었고 [[731 부대]]의 [[군의관]]들로부터 생체실험 결과물들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1948년]] [[8월 27일]], [[요코하마]]의 점령군 제8군 군사법정은 미군 포로에 대해 생체해부 실험을 실시한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관계자, [[군부]] 관계자 등 14명 중 토리스, 히라오, 요코야마 [[장군]] 등 5명에게 [[교수형]][* 이마저도 [[1950년]] 재심으로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츠츠이 등 4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인육을 먹은 혐의를 받고 있던 호리우치 장군 등 5명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 상세 == === [[교수형]] 수형자([[1948년]] [[8월]] 요코하마군사재판) === * 육군 서부군사령부 소속자 * [[사토 요시나오]](佐藤 吉直) 육군 [[대좌]] * [[요코야마 이사무]](横山 勇) 육군 [[중장]] * [[규슈제국대학]] 관계자 * 토리스 타로(鳥巣 太郎) [[조교수]] * 히라오 켄이치(平尾 健一) [[조교수]] * 모리 요시오(森 好良雄) [[강사]] === 희생자 === * 윌리엄 F. 프리드릭 육군 항공소위 * 델 프랑벡 육군 항공소위 * 조지 M. 베리 육군 항공소위 * 빌리 J. 브라운 육군 항공중사 * 테디 덴그라 육군 항공중사 * 찰스 파머 육군 항공중사 * 로버트 B. 윌리엄 육군 항공중사 * 존 C. 콜하웰 육군 항공중사 === 실험내용 === ==== 기획 ==== 사토 요시나오 육군 대좌, 고모리 타쿠 육군 군의관, 이시야마 후쿠지로 [[교수]] ==== 장소 ====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해부학교실 실습실 ==== 기간 ==== [[1945년]] [[5월 17일]] ~ [[1945년]] [[6월 2일]] ==== 목적 ==== * 부족한 대용 [[혈액]] 개발 * [[결핵]] 치료법 확립 * [[인간]] 생존성의 탐구 * 새로운 [[수술]] 방법의 확립 ==== 방법 ==== * [[혈관]]에 묽힌 [[바닷물]] 주입 * [[폐]]의 절제 * [[심장]] 정지실험 * [[뇌]]와 [[간]]의 제거실험 * [[출혈]] [[치사량]] 측정 == 지탄받은 이유 == * [[전쟁]] [[포로]] 처리를 [[군사재판]]을 열지 않고 [[즉결처분]]한 것 * 피험자들을 고의로 살해하기 위해 [[생체실험]]을 자행한 것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례가 없는 [[포로]]들에 대한 생체실험을 자행한 것 * [[포로]]의 규정 [[제네바 협약]]에 따르지 않고 [[포로]]들을 살해하고 생체실험 도구로 사용한 뒤 그 시체를 유기한 것. == [[규슈제국대학]]의 조직적 관여 의혹 == [[연합국]] 측의 전후 수사 내용에 의거하면 본 사건에 대학이 조직적으로 관여한 정황은 없다. 그러나 현재의 규슈대학은 본 사건이 의학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의학윤리와 인간 존엄이 심하게 훼손된 사건으로 간주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에 의학부 내에서 08년 11월 29일 개최된 일본생명윤리학회 20회 학회에서 당 학부 출신 의학박사[* 50명의 학생들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당시 만 19세.]에 의해 본 사건과 관련된 강연을 열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끔 하였다. 공식적으로 규슈대학 의학부에서는 생체실험을 자행했다는 사실 등의 언급을 꺼리고 있었지만 [[2015년]]부터 병원캠퍼스의 의학역사관에 전쟁범죄에 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4/04/0200000000AKR20150404016751073.HTML?input=1195m|관련 링크]]) == 대중매체 == [[엔도 슈사쿠]]의 걸작 바다와 독약은 바로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만 정현웅의 [[마루타]] 같은 불쏘시개가 아니라 이러한 잔인한 사건에 대한 고발과 여기에 참가하면서도 아무런 제지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 [[피해자]]들이 불쌍은 하지만 전문적인 일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기술 관료, 생활고 때문에 심성이 파괴돼서 범죄에 참가하면서도 야릇한 즐거움을 느끼는 나약한 민중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을 배치해서 문학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걸작을 남겼다. 다만 사건이 사건인지라 실제 인물들의 이름[* 사토 요시나오(佐藤 吉直)를 극중에서는 가토 나오키치(加藤 直吉)로, 고모리 타쿠(小森 卓)를 오오모리 타쿠(大森 卓)로 바꾸는 등]과 상황은 작품에 맞게 개작했고[* 이를테면 거기 참가한 주인공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전후에 시골에 내려와 은둔하면서 산다든가.] [[후쿠오카시]] 대신 F시로 개명한 도시로 그렸다. 원작은 1950년대 말에 출판되었고 1986년엔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는데[* 각본은 이미 1969년에 완성되어 있었다.] 상당히 잔인한 장면의 생생한 묘사와 시대 상황에 대한 고증 및 배우들의 열연으로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다. 당연히 일본 우익들의 공격과 극장 난입으로 일본 내 흥행은 실패했다. 원작 소설은 해적판으로 돌다가 1990년대 말에 정식 출간되었다. 여담으로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인이 S 교수의 외손자라는 소문이 퍼졌지만 실체는 없다. 자세한 사실은 [[가문에 흐르는 악의 피]] 참조. [[분류:1945년 범죄]][[분류:태평양 전쟁/전쟁범죄]][[분류:일본의 학살]][[분류:일본의 전쟁 범죄]][[분류:의학 사건 사고]][[분류:쇼와 시대(전시)/사건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