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549년 출생]][[분류:1603년 사망]]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hmed_al_Mansur.jpg|width=300]] Ahmad al-Mansur(أحمد المنصور السعدي) (1549 ~ 1603) [목차] == 소개 == [[파일:모로코 중세사.png|width=400]] 아흐마드 알 만수르의 영토 [[모로코]]의 베르베르 계 왕조인 [[사드 왕조]] (샤리프 왕조)의 제 7대 [[술탄]]. 무함마드 앗 셰이크의 다섯째 아들. 재위 기간은 1578년부터 1603년까지이며, 별명은 승리왕과 황금왕 등이 있다. 전자는 포르투갈에 대한 승리에서, 후자는 말리 정복으로 얻은 금으로 순금 주화를 발행하며 얻은 별명이다. 어린 시절에는 [[오스만 제국]]에서 볼모 생활을 했으며, 형 아부 마르완 압둘 알 말리크 1세를 도와 모로코의 왕이었던 아브 압둘라 무하마드 2세를 폐위하고 형을 즉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1578년 8월 4일에 아브 압둘라 무하마드 2세가 복수하기 위해 포르투갈 아비스 왕조의 국왕 돈 세바스티앙과 연합하여 공격하자 알카세르키비르 근처의 와디알마크하진에서 형인 아부 마르완 압둘 알 말리크 1세와 함께 5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비스 왕조의 군사 2만 3천명을 격파해 [[세바스티앙 1세|돈 세바스티앙]]과 아브 압둘라 무하마드 2세를 전사시켰다.[* 이 전투에서 포르투갈군은 8천이 전사하고 1만 5천이 포로가 되었다. 돈 세바스티앙은 전사했고 아부 압둘라 무하마드 2세는 도주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한다.세바스티앙 1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아 후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로코와 전쟁을 벌이기 전에 유럽의 여러 가톨릭 왕실과 혼담은 몇 번 오갔지만, 전쟁 준비 등으로 세바스티앙의 확답이 늦어서 성사되지 못했다.] 평생 수도사로 살았던 삼촌 [[엔히크 1세]]가 환속 후 포르투갈 국왕에 올랐지만 2년만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주앙 3세의 딸 마리아 마누엘라의 남편인 점을 근거로 삼아 포르투갈 왕위를 겸임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동군연합]]인 [[이베리아 연합]]이 결성되었다.] 전쟁의 승리로 승리의 [[아흐마드]]라 불리게 되었으며, 형인 아부 마르완 압둘 알 말리크 1세가 전쟁 직후에 중병으로 사망하면서 술탄이 되었다. 포르투갈과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엘 바디 궁전을 건설했다. 1590년에 [[송가이 제국]]을 공격했고 원정 도중에 전염병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1591년에 톤디비 전투에서 승리해 송가이 제국의 가오, [[팀북투]], 젠네 등을 점령할 수 있었다. 당시 에스파냐와 영국은 미묘한 관계에 있었는데 이 양국간의 감정을 잘 이용하여 스페인의 땅을 얻기도 했고, 오스만과의 경계부근에 성곽을 쌓으며 침략을 대비하는 동시에 궁정이나 군대로 하여금 튀르키예식 복색을 하게 하고 터키어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전쟁을 피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외교의 달인. 각국의 언어도 능숙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 엘 바디 궁전 == [[파일:external/www.ayda.ru/o_8561.jpg]] 이분의 업적은 단순히 여기서 끝나지 않고 [[중동]] 건축의 역사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길이 130 미터에 [[아라베스크]] 양식으로 호화롭게 지어진 이 궁전은 당대 [[아랍]]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사디 왕조의 몰락과 수없는 전란 등의 이유가 겹쳐 지금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유적일 뿐이다. [[마라케시]]를 찾는 역사 덕후라면 둘러볼만하다. 하지만 [[폐허 덕후]]라면 이쪽이 더 좋을지도? == 창작물에서의 등장 == [[파일:external/well-of-souls.com/bnw_ahmad_almansur.jpg]] [[시드 마이어]]의 [[문명 5]]에서 [[문명 5/등장 문명/모로코|모로코]]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실제 역사처럼 호구인 [[문명 5/등장 문명/송가이|송가이]] 따윈 손쉽게 털어버릴 수 있다. 가라 베르베르 기병대!~~ [[분류:모로코 술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