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이순신)] [include(틀:임진왜란 전투 목록)] ||<-3><:> {{{+1 '''안골포 해전'''[br]安骨浦海戰}}} || ||<:> '''시기''' ||<-2>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 ||<:> '''장소''' ||<-2>조선 경상도 웅천현 안골포[* 現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 || ||<:> '''원인''' ||<-2>남해안 재해권 확보 및 장악을 위한 두 번째 결전[* 첫 번째 결전은 [[한산도 대첩]]이다.]|| ||<:> '''교전국''' ||{{{+1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width=50]] ||{{{+1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width=40]] || ||<:> '''지휘관''' ||[[충무공 이순신]][br][[원균]][br][[이억기]][br][[권준]][br][[어영담]][br][[무의공 이순신]][br][[김완]][br][[신호]][br][[정운]][br][[배흥립]][br][[김인영]][br][[이언량]][br][[송희립]][br][[나대용]][br][[황세득]][br][[우치적]][br][[이영남]][br][[이운룡]][br]기효근[br]황정록[br]윤사공[br]가안책[br]송응민[br]최천보[br]이응화[br]박이량[br]손윤문[br]최도전||<^|1>[[구키 요시타카]][br][[가토 요시아키]]|| ||<:> '''병력''' ||<^|1>[[판옥선]] 56척[br][[거북선]] 2척||[[아타케부네]] 21척[br][[세키부네]] 15척[br]고바야부네 6척|| ||<:> '''피해''' ||<^|1>전사자 19명[br]부상자 114명[br]함대 피해 없음||사망자 250명 이상[* 조선수군이 직접 확보한 [[수급]]을 기준으로 한 수치이다.][br] [[아타케부네]] 반파[br]([[대장군전]] [[피격]])[br]20척 [[침몰]] || ||<:> '''결과''' ||<-2>조선 수군의 승리|| ||<:> '''영향''' ||<-2>'''조선 수군의 부산 제외 남해안 제해권 완벽 장악''' || [목차] [clearfix] == 개요 == [[임진왜란]] 초기 1592년 임진년 ([[선조(조선)|선조]] 25년) 7월 10일 전라좌수사[br][[이순신]] (李舜臣)이 이끄는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진해]] 땅 [[안골포]]에서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일본수군 정예함대 42척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둔 [[해전]]이다. == 전투의 전개 및 경과 == 1592년 임진년 ([[선조(조선)|선조]] 25년) 7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한산도 앞 견내량 바다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한산도 대첩|주력 함대 73척을 격파한 뒤]] [[가덕도]]로 향하던 중 [[진해]] 땅 [[안골포]]에 일본수군의 전선 40여척이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7월 10일 새벽 작전 계획을 수립, 전라 우수사 [[이억기]]로 하여금 포구 바깥에 진을 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복병을 배치한 뒤에 달려와서 전투에 참가하여 협공을 하도록 지시한 뒤, 자신의 함대는 [[학익진]]을 펼쳐 선봉에 서고,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그 뒤를 따르게 하면서 일제히 [[안골포]]로 돌격해 들어갔다. 이 때 일본군의 전선들은 모두 42척으로 그 중 각각 3층과 2층으로 된 큰 배([[안택선]]) 2척은 포구에서 밖을 향해 떠 있었는데, 이는 지휘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함대였다.[* 본래 계획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함께 충무공에 대적하는 것이었으나, 와키자카는 한산도에서 먼저 박살이 났다.] 특히 이 중에는 일본 수군 최대의 함선 안택선이 있었다. 그러나 [[안골포]] 포구의 지세는 좁고 수심이 얕아서 조수가 빠지면 육지가 되므로 판옥선처럼 큰 배는 쉽게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왜선들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왜적들은 먼저 출동했던 73척의 왜선 중 59척을 한산도 앞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남김없이 깨부수고 불태우며 왜적들을 참살했던 탓에 형세가 불리해지면 육지로 올라갈 속셈으로 험한 곳을 차지하고 배를 매어 두고 겁을 먹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계획을 변경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교대로 포구 안으로 드나들면서 총통과 장편전 등으로 일본군을 공격토록 하자 마침내 일본군 병사들도 응전하기 시작하였다. 때를 맞춰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장수를 정하여 매복시킨 다음 급히 함대를 이끌고 달려와 합세하면서 전투는 절정에 달했다. 일본군의 대응 사격에 전사 19명, 부상 114명 이라는 이전까지 이어져 온 해전 중 조선 수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는 기록이 있다.[* 기본적으로 [[임진왜란]] 초기 해전 양상이었던 수성전이 아닌, [[안골포]]에 숨어있던 잔여병력을 공격하는 공성전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도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한산도]]에서 패배한 일본 수군의 뒤를 추격하여 궤멸시키기 위해 추격전을 벌이던 상황에서 발견한 것이라 충분한 휴식과 보급이 없이 밀어붙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피로도가 높은 상황이었다. 거기에 수성하는 일본군의 지휘를 맡은 [[구키 요시타카]]는 해적 출신으로 일본 최고의 해전 전문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 점이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물론 왜군의 피해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이다.[*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는 이순신의 전술을 감안하면 그 이순신조차 일정 부분 불리함을 떠안고 싸웠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본군은 사상자를 작은 배로 실어내고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큰 배로 옮겨 가면서 [[구키 요시타카]]가 자신의 기함이었던 안택선을 방어벽으로 삼아서까지 총력전을 펼쳤으나, 종일토록 계속된 전투에서 20척을 잃고 많은 전사자[* 250여 명의 수급 외에 헤아릴 수 없는 익사자라는 일본군의 피해 규모를 보고한 기록이 조선 왕조 실록에 있다.] 를 낸 채 뭍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순신은 버려진 적선을 모두 불태우면 고립된 적군이 백성을 해칠것을 우려하여,[*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1258&Lang=%ED%95%9C%EA%B8%80&Page=1|#]]난중일기 임진년 양력 8월 16일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적선 중 일부는 남겨둔 채 포구 밖으로 이동하였다. 후에 견내량파왜병장에서 밝히길, 남은 적선들을 모두 태워 버리면 일본군은 육로로 귀환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숨어있던 안골포 백성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한산도 대첩처럼 수색 섬멸이 불가능한 점도 있었다. 구키 요시타카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사히 복귀하는데 성공하는데, 마치 하늘이 도운줄 알았다고 한다. 이 날의 전투는 이틀 전에 있었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일본군의 주력을 격멸한 빛나는 전과로서 의의를 가지며, 연이어 패한 일본군은 부산으로 움츠려들어 호남 진출을 포기하였고, 이로 인해 보급에 문제가 생긴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 주저앉는 결과를 가져왔다. 항왜 [[준사]]가 이 때 투항해 왔다고 《[[난중일기]]》에 기록한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전사자 19명은 김봉수, 김두산, 강필인, 임필근, 장천봉, 배중지, 박응귀, 강막동, 최응손, 필동, 김말손, 정춘, 상좌, 귀세, 말련, 박무년, 이기동, 김헌, 맹수 등이다. == 아타케부네 (안택선) == * [[안골포 해전]] 당시 [[구키 요시타카]]가 기함으로 사용하던 [[아타케부네]] ([[안택선]])도 참전했었다. 이 배는 한국에서도 상당히 유명한데, 이 배로 날아와 정통으로 꽂힌 [[대장군전]]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인터넷 상으로 돌아 다니는 내용인데 [[안골포 해전]]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나 겨우 목숨을 건진 [[구키 요시타카]]는 자신의 [[아타케부네]] ([[안택선]])으로 날아와 꽂힌 [[대장군전]]을 패전하여 퇴각하는 가운데도 챙긴 뒤 종전 후 귀국했다.[* 혹은 상부에서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었을 때의 증거 자료로 쓰려 했다는 추측도 있다.] 끝부분 철혹이 유실되기는 했지만 구키 가문에서 보관했고 지금도 일본 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다. 이는 유일하게 남은 임진왜란 당시의 [[대장군전]] 유물이다.[* 2017년에는 구키 가문의 후손의 동의 하에 [[국립진주박물관]]에서 특별전시하기도 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70723033300005|##]].] ||
<:>[[파일:external/pacific.valka.cz/nihon_maru1592.jpg|width=100%]]|| ||[[안골포 해전]] 당시 [[구키 요시타카]]의 [[아타케부네]]([[안택선]])와 조선수군 [[거북선]]의 대치 상상도|| * 안택선의 경우 당시 일본에서도 위상이 상당히 높은 배였다. 원래 이름은 키슈우(鬼宿)[* [[3원 28수]] 중 하나로 현재의 [[게자리]]에 위치한 별을 말한다.]였으나 자신의 기함으로 선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안택선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다만 실제로 히데요시가 사용한 기록은 없고,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구키 요시타카]]에게 넘겨주었다. 구키 요시타카의 개인 행장록인 구키행공기(九鬼御伝記)에 따르면 안골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맹공에도 침몰하지 않고 버텼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침몰하지 않은 배라는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분석하고 재건조 하라는 명을 [[가토 요시아키]]를 통해서 일본 수군에게 전달한다. 임진왜란 종전 후 안택선은 일본으로 돌아갔고 이후 [[정유재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1856년]]까지 운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보통 목재 선박이 20년 정도 사용하면 폐기하고, 아무리 관리를 잘 한다고 해도 5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름만 같을 뿐 다른 배라고 봐도 무방하다. ==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한산도 대첩]]과 [[이치 전투]]가 방영된 제 74화 중반~후반부에 [[나레이션]]으로 간략하게 묘사 되었다. 여기에서 단역으로 나온 일본수군 병사 1명이 [[소변|실금]]하며 [[공포]]에 질린 장면과 조선 수군의 [[포격]]에 [[가토 요시아키]]와 일본수군 병사들이 나뒹굴었으며 [[구키 요시타카]]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고 황급히 [[후퇴]] 명령을 내리는것으로 묘사되었다. [[구키 요시타카]]가 타고있던 [[아타케부네]] ([[안택선]])가 전투 중 조선수군이 발사한 [[대장군전]]에 맞아 부서진 사실과 [[구키 요시타카]]가 그것을 직접 챙긴 뒤 퇴각하여 현재도 일본 [[박물관]]에 [[전시]] 및 [[보존]]되어 있다는 해설이 나오지 않은것은 아쉬운 부분이나, 워낙 짧게 다루어진 탓에 이런 자세한 내용까지 담아내기는 어려웠을것이다. * 영화 [[한산: 용의 출현]] (2022)에서도 마지막에 짧게 묘사된다.[br]항왜 [[준사]]는 [[한산도 대첩]] 전에 [[투항]]한 것으로 각색되었다. == 관련 문서 == * [[이순신]] * [[임진왜란]] * [[전투 목록/한국사]] [[분류:임진왜란/해전]][[분류:1592년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