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의 절터]] [include(틀:고려의 궁궐)] [include(틀:고려의 왕립 사찰)] [목차] 安和寺 == 개요 == [[고려]]의 왕립 사찰 중 하나. [[개성시]] [[송악산]] 자하동에 있다. [[고려 태조]] 신성대왕(왕건)이 지었고, 이후 [[고려 예종]] 문효대왕(왕우)가 증축했다. 특별한 점은 두 왕족의 원찰이었다는 것과 고려 - [[북송]] 간의 친선외교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 역사 == === 태조 대: 안화선원 === 안화선원(安和禪院)은 태조 재위 13년 차인 930년 8월에 지은 선종 계열 사원으로 태조의 사촌인 [[왕신]](王信)을 위한 원당이다. 왕신은 후백제에 인질로써 가 있었는데, 고려에 있던 후백제 인질 진호(眞虎)가 병으로 죽자 후백제는 고려가 고의로 진호를 죽인 것으로 간주, 926년 4월에 왕신을 죽인다. 927년 1월, 왕신의 시체를 담은 관이 고려로 전달 됐고 3년 뒤 태조는 안화선원을 지어 왕신을 추모한다. 이후 안화선원은 기록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 예종 대: 정국안화사 === 한참 뒤인 예종 재위 13년 차인 1118년 4월에 안화선원은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로 이름이 바뀌고 크게 증축된다. 예종은 숙종과 명의태후의 원찰인 [[천수사]]를 지은 뒤, 자신 소유의 사찰도 지었다. 1117년부터 공사가 시작됐고, 고려사에서 비난할 정도로 증축을 크게 했다고 한다. 중간에 농사철을 맞아 공사를 중단하기도 하는 등 시간을 들였다가 1118년에 드디어 완공한다. 예종은 안화사 건설을 북송과의 외교에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던 듯 하다. 당시 재위 중이었던 북송 황제 [[휘종(송)|휘종]]은 예종에게 '''직접 쓴''' 국서와 안화사의 본전 '능인지전(能仁之殿)' 액호를 써 주었다. 또 북송의 최고 권력자였던 [[채경]]은 안화사 정문 편액 ‘정국안화지사(靖國安和之寺)’을 써 고려로 보냈다고 한다. 거기다 북송에서 제작된 십육나한(十六羅漢)의 소상(塑像)까지 전달했다. 이에 예종도 '''직접 쓴''' 국서를 북송에 전달했다. 예종의 두번째 왕후 [[문경태후]]는 1118년 9월에 죽었다. 2년 뒤인 1120년에 태후의 원당을 안화사로 옮겨 안화사는 문경태후의 원찰이 된다. === 이후 === 고려가 멸망한 후 폐사찰이 되었다. 1930년 옛터에 승려 김만영이 시주를 얻어 다시 중창한 뒤 31본산(本山) 중 전등사(傳燈寺)의 말사가 되었다. 1945년 [[38선]]이 그어지고는 38선 바로 이북에 위치하였으나, 송악산 남록에 위치한 절의 특성상 정작 출입구는 38선으로 막혀있었다. 1989년에는 북한의 문화보존총국에 의해 오백성전·칠성전 등이 복원되었다. 2015년에 북한이 독일의 지원을 얻어 다시 보수하였다.[[https://www.yna.co.kr/view/AKR20150413111000014|#]] == 주요 건축 == 안화사는 고려도경에도 상세히 등장하는데, 이는 북송의 승려인 서긍이 자기 황제가 편액을 써준 사찰을 빼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사엔 안화사 건축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며 이하 기록은 모두 고려도경에 남아있다. 파한집 권중에도 안화사에 관한 기록이 있다. 봉성(鳳城)[* [[만월대]]의 별칭.] 북쪽에 있었으며 세간에선 '연하동 선인(烟霞洞 仙)이 실제로 거주하는 곳'이라 찬양했다고 한다. 또한 영평현 백작 [[윤관]]의 아들인 상국 [[윤언이]]가 이 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 들어가는 길 ==== * 다리 안화사 앞엔 강이 있어 이를 지나갈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올라갈 큰길을 중심으로 양옆에 청헌정(淸軒亭)과 연의정(漣漪亭) 두 정자가 있다. * '''산문각(山門閣)''' 양옆에 소나무 숲이 조성된 산길을 오르면 산문각이 있다. 산문각을 지나면 안화문이 있다. * '''안화지문(安和之門) / 정국안화지사(靖國安和之寺)''' 안화사의 대문. 이 문의 편액은 [[채경(북송)]]이 썼다. 서쪽엔 냉천정(冷泉亭)이 있다. 고려도경은 대문 편액에 '안화지문'이라 쓰여져 있다했지만 고려사엔 채경이 보내준 대문 편액은 '정국안화지사'라 쓰여져있다고 기록되있다. * '''자취문(紫翠門)''' 안화사의 두번째 문. 안화사에서 자고 있던 윤언이가 꿈 속에서 [[호종단]][* 胡宗旦. 북송 출신 귀화인. 고려사에 본인 열전이 있다.]을 만났는데, 그가 자취문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읽었다고 한다. >다섯 구름 깊은 곳이 내 고향이니, >연기가 올라오는 누대는 오랬동안 있었다. >되돌아보니 왕년의 오랜 친구는, >지금도 꿈 속에서 힘들어 하는구나. >---- > - 파한집 권중 中. * '''신호문(神護門)''' 안화사 세번째 문. 문 동쪽엔 제석상(帝釋像)이 세워져 있었고 서쪽엔 '''향적당(香積堂)'''이 있었다. 신호문을 지나 서쪽으로 가면 재궁이, 북쪽엔 무량수전이 있다. ==== 재궁(齋宮) ==== 재궁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임금이 타지에서 거주할 임시 궁궐'을 한자어로 재궁이라 한다. 안화사 서쪽에 있는 궁궐로 국왕이 오면 머무는 곳이다. 안화사 재궁엔 임금이 있을 전 하나, 각 하나, 정자 하나가 있었다. 극도로 화려해 서긍은 마치 병풍 안에 있는 듯 하다며 질투했다. * '''심방문(尋芳門)''' 안화사 재궁으로 가는 문. * '''응상문(凝祥門)''' 안화사 재궁으로 가는 마지막 문. 인수전의 전문이다. * '''인수전(仁壽殿)''' 안화사 재궁의 정전. * '''향복문(嚮福門)''' 인수전의 북문. [[만월대]]에 같은 이름의 문이 있었다. * '''제운각(齊雲閣)''' 향복문 뒤에 있는 각. * '''안화천정(安和泉亭)''' 제운각 뒤에 있는 정자. * '''어화원(御花園)''' 파한집에 등장하는 장소. 아마 제운각과 안화천정이 있는 장소를 말하는 듯 하다. ==== [[무량수전]] ==== 無量壽殿 신호문을 지나면 있는 전각. 전각명을 보면 아미타불을 모신 것으로 보인다.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양옆에 누각이 있다. 동쪽엔 양화루(陽和樓), 서쪽은 중화(重華樓)이다. 이 전각을 기준으로 길이 갈린다. 동쪽엔 신한문, 북쪽엔 선법문, 서쪽엔 효사문이 있다. ==== 능인지전 ==== 能仁之殿 북송 황제 [[휘종]]이 직접 전각의 편액을 썼으며, 고려도경 기록엔 전문 편액까지도 휘종이 쓴 것이라고 한다. 휘종이 준 십육나한소상도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신한문(神翰門)''' 능인지전의 전문. ==== 선법당 ==== 善法堂 선법문을 지나면 나오는 당. * '''선법문(善法門)''' 선법당의 당문. ==== 미타전 ==== 彌陁殿 효사문을 지나면 나오는 전. * '''효사문(孝思門)''' 미타전의 전문. 이상이 서긍이 기록한 안화사 건축에 관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