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파르네세 가문]][[분류:파르마 공작]][[분류:이탈리아의 추기경]][[분류:1520년 출생]][[분류:1589년 사망]][[분류:1545년 출생]][[분류:1592년 사망]][[분류:1635년 출생]][[분류:1689년 사망]][[분류:네덜란드 총독]] [목차] == 개요 == Alessandro Farnese 이 이름을 가진 인물들로서 역사상 유명한 인물들은 교황 바오로 3세 본인과 그 후손들이다. == [[교황]] [[바오로 3세]]의 속명 == 1468년 ~ 1549년 알레산드로 파르네제(Alessandro Farnese).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애인 '''[[그리스도]]의 신부''' 줄리아 파르네제의 동생으로, 알렉산데르 교황 재위기에 추기경으로 발탁되었으며, 메디치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었다. 최후의 르네상스 교황으로도 불리며 [[예수회]]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 로마 가톨릭 교회 [[추기경]] == Cardinal Alessandro Farnese (1520년 ~ 1589년) 바오로 3세의 장손. 바오로 3세의 아들인 파르마 공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제의 장남이다. == 파르마-피아첸차 공작 == [include(틀:역대 파르마 공작)] [include(틀:역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총독)]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8b003 0%, #fcd116 20%, #fcd116 80%, #d8b003)" '''파르마 공작[br]{{{+1 알레산드로 파르네세}}}[br]Alessandro Farnese, Duca di Parma'''}}}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Vaenius_-_Alexander_Farnese.png|width=100%]]}}} || || '''이름''' ||알레산드로 파르네세[br](Alessandro Farnese)|| || '''출생''' ||[[1545년]] [[8월 27일]][br][[교황령]] [[로마]]|| || '''사망''' ||[[1592년]] [[12월 3일]] (향년 47세)[br][[프랑스 왕국]] [[아라스]]|| ||<|4> '''재위''' ||<#E7E7E7>[[파르마 공국|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의 공작|| ||[[1586년]] [[9월 15일]] ~ [[1592년]] [[12월 3일]]|| ||<#E7E7E7>[[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 ||[[1578년]] [[10월 1일]] ~ [[1592년]] [[12월 3일]]|| || '''배우자'''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의 마리아 공주 ,,(1565년 결혼 / 1577년 사망),,|| || '''자녀''' ||라누초 1세, 마르게리타, 오도아르도|| || '''아버지''' ||오타비오 파르네세|| || '''어머니''' ||[[파르마]]의 마르게리타|| || '''종교''' ||[[가톨릭]]|| [clearfix] [[스페인 제국]]의 장군, 귀족. [[저지대 국가|북해 연안의 네덜란드, 벨기에 같은 연안 저지대]]의 행정을 담당하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이자 [[펠리페 2세]]의 이복누이(서녀)인 마르가레테와 교황 바오로 3세의 둘째 손자 파르마 공작 오타비오 파르네제[* 추기경 알레산드로 파르네제의 동생. 당대 일류의 화가 티치아노가 그린 교황 바오로 3세와 이들 형제의 초상이 남아있다.]의 아들이다. 보통 본명보다는 작위인 '''[[파르마 공국]] [[공작(작위)|공작]]'''으로 더 많이 불린다. [[레판토 해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또한, [[펠리페 2세]]가 저지대의 독립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파병을 했을 때 지휘관이자 저지대의 총독으로서 구교 신자의 수가 더 많고, 부유했던 남부의 벨기에 지역을 전투와 회유를 통해 다시 되찾았다.[* 하지만 그 전의 병사들에게 [[펠리페 2세]]가 임금체불을 했었고, 악이 받친 스페인 군대는 [[안트베르펜]]을 약탈했었는데 이 때부터 저지대의 경제 주도권이 북쪽의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넘어가고 [[암스테르담]]이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이런 연유로 인해서 17세기의 네덜란드를 황금의 17세기라고 부르지만 그 놈의 튤립 사재기 광풍이 불어닥쳤고 거품이 터지면서 네덜란드는 비실비실 거리다가 영국의 [[항해조례]] 이후의 영란 전쟁으로 결정적 크리를 먹게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랑스 혁명 당시 돈이 모자란 국민 공회가 네덜란드의 은행을 털자는 목적하에 불란 전쟁이 벌어졌고 이 때 어이없는 실책을 저지르면서 프랑스의 속국 정도로 몰락한다.] 그 후에 계속 벨기에에 주둔해 있다가 스페인의 잉글랜드 침공 작전 당시 브리트느 섬 본토에 상륙하기 위해 칼레에서 [[무적함대|아르마다]]가 도착하여 함대에 합류하길 기다렸지만 [[칼레 해전|아르마다가 칼레에 오기도 전에 개발살]]이 나는지라 그대로 손가락 빨고 벨기에에 주둔해야했다. 그 뒤에 [[프랑스 왕국|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화려한 공로를 세웠지만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에게 루앙 전투에서 패하면서 중상까지 입은 채로 쓸쓸하게 귀국해야 했고 그를 시기하던 궁정은 그의 직책이던 네덜란드령 총독에서 해임했다. 절망과 슬픔에 빠진 그는 그해 1592년 12월 2일 지방 수도원에서 한창 나이로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뒀다. == 파르마 공자 알레산드로 파르네제 == [include(틀:역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총독)] ||<-2> '''파르마 공국의 공자[br]{{{+1 알레산드로 파르네세}}}[br]Alessandro Farnese, Principe di Parma'''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lessandro_di_Odoardo_Farnese.jpg|width=100%]]}}} || || '''이름''' ||알레산드로 파르네세[br](Alessandro Farnese)|| || '''출생''' ||[[1635년]] [[1월 10일]]|| || '''사망''' ||[[1689년]] [[2월 18일]] (향년 54세)[br][[마드리드]]|| ||<|2> '''재임''' ||<#E7E7E7>[[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 ||[[1678년]] ~ [[1682년]]|| || '''아버지''' ||[[파르마 공국]] 공작 오도아르도 파르네세|| || '''어머니''' ||마르게리타 데 메디치|| || '''형제''' ||라누초 2세|| [clearfix]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s-4|파르마-피아첸차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제]]의 증손자로 파르마-피아첸차 공작 오도아르도 파르네제의 차남. 베네치아의 장군으로 오스만 제국과 싸웠으며 스페인 해군의 제독과 네덜란드 총독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