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D439B 0%, #1A2842 20%, #1A2842 80%, #1D439B)" {{{#ffffff '''알렉상드르 빌라플란의 역임 직책'''}}}}}}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5> '''{{{#ffffff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 || 폴 니콜라[br](1925~1930) || {{{+1 →}}} || '''{{{#002c77 알렉상드르 빌라플란}}}'''[br]'''{{{#002c77 (1930)}}}''' || {{{+1 →}}} || 폴 니콜라[br](1930~1931) || }}} || ||<-2> {{{#!wiki style="margin: -4px -9px" [[파일:AlexVillaplane_(cropped).jpg|width=100%]]}}} || || 이름 ||알렉상드르 빌라플란[br](Alexandre Villaplane) || || 출생 ||[[1905년]] [[9월 12일]] || || 사망 ||[[1944년]] [[12월 26일]] (향년 39세)|| || 국적 ||[[파일:프랑스 국기.svg|width=28]] [[프랑스]] || || 출신지 ||[[프랑스령 알제리]] [[알제]] || || 포지션 ||하프 || || 신체조건 ||175cm / 73kg || || 등번호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소속팀 ||FC 세트 (1921-1924)[br]위니옹 스포르티브 데 베르제제 (1923-1924)[br]FC 세트 (1924-1927)[br][[님 올랭피크]] (1927-1929)[br][[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라싱 프랑스]] (1929-1932)[br]FC 앙티브 (1932-1933)[br][[OGC 니스]] (1933-1934)[br]히스파노-바스티디엔느 (1934-1935) || || 국가대표 ||25경기 0골(1926-1930) || || 계급 ||[[슈츠슈타펠]] [[소위]] (하급돌격지도자)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의 前 [[축구선수]]이자 [[나치 독일]] 부역자. == 생애 == === 선수 생활 === 빌라플란은 1905년 [[알제리]] [[알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수영]] 등 여러 운동에 재능을 보였던 빌라플란은 12살부터 축구를 해왔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때는 알제의 갈리아란 클럽에서 뛰었다고 전해진다. 14살 때 가족과 함께 알제를 떠나 세트 지방에 정착했다. 그리고 FC 세트에서 17살에 데뷔했다. 세트는 당시 프랑스 동남부 지역리그에서 손꼽히는 강팀이었고 어린 나이였지만 빌라플란은 팀의 핵심 수비수로 자리를 잡았다. 1926년에는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파란 유니폼]]을 입기도 하였다. 북아프리카 출신 축구선수로는 최초로 프랑스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것이다. 이 무렵 빌라플란은 세트의 라이벌이었던 님의 구애를 받는다. 당시 프랑스 축구계 역시 프로화는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님에서는 프로화 되지 않으면 받기 힘들 큰 연봉으로 그를 유혹했고 님에서 그는 계약대로 많은 돈을 받았다. 그렇게 받은 돈으로 그는 [[바(술집)|바]]나 카바레 클럽 등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경마]] 도박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식의 생활을 하다 보니 지하 세계에도 발을 들이게 되었고 기량의 저하도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빌라플란이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RC 프랑스]]에서 떠난 이후에 프랑스 축구계는 프로화가 되었고 그는 앙티브, 니스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각종 [[승부조작]] 의혹에도 휘말렸다. 1933년 시즌 당시 돈을 주고 당시 결승전 상대 팀에게 [[져주기 게임|져주기]]를 사주했다는 의혹을 받은 것. 그러다 아예 선수 시절 말엽에는 경마 도박의 [[승부조작]] 혐의로 정말 6개월간 감옥에 갔고 그의 커리어는 그렇게 끝났다.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경력]] === 1926년부터 1930년까지 대표팀에서 활약했다. 그 동안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올림픽]]과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월드컵]]에 참가하였고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빌라플란은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당대 최강 4천왕[* 그 당시의 세계 축구 사천왕은 최강 잉글랜드에 그 밑의 중간보스급으로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헝가리가 있었다.] 중 하나라는 아르헨티나와의 혈전끝에 패하였고 그 충격으로 칠레에게마저 털리며 4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상술했듯 저런 멘탈을 가진 선수를 프랑스 축구 협회에서 좋게 보질 않았기 때문에 월드컵을 끝으로 다시는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 은퇴 이후 === 그 이후 빌라플란은 완전히 [[흑화]]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작 무렵, 그는 파리의 [[암시장]]에서 [[유대인]]들을 등쳐먹으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 감옥에 2달 투옥되었는데 그 이후 앙리 라퐁트[* 나치 부역자로 프랑스 게슈타포를 이끄는 인물이었다.]와 피에르 보니 등과 어울리고 다녔다. 그리고 저 두 명과 어울리며 협잡질을 하고 다녔다. 1942년에는 [[파리(프랑스)|파리]]를 떠나 툴루즈에서 활동하면서 독일인들에게 사기를 치려 시도했다. 전 팀 동료 루이스 카살이 신분 증명서를 만들어주었고 파리로 다시 이동하였다. 거기에서 [[SS 친위대]]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앙리 라퐁트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그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BNA(Brigade Nord Africain)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강도, 방화, 강간, 살인 등 각종 범죄 행위를 일삼았다. > 강탈, 강간, 강도, 살인, 그리고 더 나쁜 행위는 독일인에 부역한 것이다. 가장 끔찍한 솜씨다. >---- >빌라플란의 사건 담당 검사[* 그는 빌라플란의 탐욕이 그를 망쳤다 생각했다.] 1944년 6월 11일, BNA는 프랑스의 무시당에서 52명의 레지스탕스 소년병들을 학살하였는데 빌라플란 역시 10여명의 소년을 살해하였다. 결국 그는 같은 해 8월 24일 파리에서 체포되었고 라퐁트, 보니와 함께 12월 26일에 [[총살형]]에 처해졌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다재다능한 하프백으로 헤딩과 발기술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르몽드]]는 이런 그를 가리켜 월드 클래스 플레이메이커라 칭했다. 이런 뛰어난 기량으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의 첫 월드컵 주장까지 맡았지만 그의 행실로 인해 전부 말아먹은 케이스다. == 뒷이야기 == * 그를 취조했던 담당검사는 그가 여느 [[갱스터|갱단 멤버]]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스스로를 계획을 꾸미는 자라 생각했으며 사기꾼이라 지칭했다고 한다. [각주] [[분류:1905년 출생]][[분류:1921년 데뷔]][[분류:1935년 은퇴]][[분류:1944년 사망]][[분류:알제 출신 인물]][[분류:프랑스의 축구선수]][[분류: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은퇴, 이적]][[분류:님 올랭피크/은퇴, 이적]][[분류:OGC 니스/은퇴, 이적]][[분류:프랑스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참가 선수]][[분류:프랑스의 올림픽 참가 선수]][[분류: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참가 선수]][[분류:프랑스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나치 부역자]][[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총살형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