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사건사고)] [목차] == 개요 ==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면]][* 당시에는 [[신안군]]이 없었고 [[무안군]]의 일부였다. 신안군이 설치된 건 45년 뒤인 [[1969년]]이었다.]에 위치한 [[신안군/행정#s-2.5|암태도]][* [[압해도]]와는 [[천사대교]]로 연결되어 있다.]에서 농민들이 지주에 대항하여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며 [[파업]] 및 농성한 사건. == 전개 과정 ==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우리들의 부르짖음 하늘이 안다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마음껏 굳세게 뭉치어라 >'''이 뼈가 닳게 일하여도 살 수 없거늘 놀고먹는 지주들은 누구의 덕인가''' >그들의 몸에 빛난 옷은 우리의 땀이요 그들이 입에 맞는 음식은 우리의 피로다 >봄 동산에 좋은 꽃 지주의 물건 가을밤에 밝은 달도 우리는 싫다 >---- >소작쟁의 당시 농민들이 부른 <소작인의 노래> 192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농민]]과 [[노동자]]들의 소작쟁의, 노동쟁의가 불붙었는데 암태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암태도에는 [[문재철]][* 문재철은 암태도 출신으로 해양 사업에 나서서 많은 돈을 벌었고 [[중추원(일제강점기)|중추원]]에서 직책을 맡으며 토지를 불려나갔다. 그래서 1920년대 후반에는 300만 평, 1940년대에는 500만 평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이후 여러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1941년에는 자신의 자금으로 학교를 세우기도 하는데 그것이 지금의 [[문태고등학교]]다. 헌데 그는 암태도 소작쟁의 이후 농민활동가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일 때문인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다가 나중에 빠졌다.], 나카시마 세이타로(中島淸太郞), 천후빈(千后彬, 1870. 5. 9 ~ ?. 5. 15)[* 영양천씨대동보 현감공편 1권 60쪽에는 천두학(千斗學)으로 등재되어 있다. [[천정배]] 전 [[법무부장관]]의 7촌 재종증조부(再從曾祖父)다.] 3명의 지주가 있었는데 이 중 문재철은 대지주로서 논 29만 평과 밭 11만 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재철은 가혹하게 소작료를 징수했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소작료는 높아 봐야 추수한 곡식의 절반인 것에 비해 그는 무려 '''6할~8할'''이나 가져갔다. 이것 때문에 소작인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나중에는 분노하여 [[서태석]][* 그는 1885년에 태어나 [[3.1 운동]]에 참여하여 [[태극기]]와 격문을 붙이다가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8년 동안 암태면장으로 활동하며 암태도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이후 농민운동에 참여하고 [[조선공산당]]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여러 번 감옥살이를 했다. 결국 계속된 투옥으로 인해 건강이 약해졌고 투옥된 후유증으로 인해 [[정신분열증]]에 걸려 고생하다가 1943년에 쓰러져 사망했다. 공산당에 참여한 것 때문에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사후 60년이 지난 2003년에야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었다.], 서창석 등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1923년 8월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했다. 암태소작인회는 그 해 9월 문재철을 비롯한 암태도의 지주들에게 "소작료는 논 40%, 밭 30%로 하고 소작료로 내는 농작물 운반도 1리 이내로 해달라"고 요구하며 이에 불응하면 소작료를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요구조건에 [[일본인]] 지주 나카시마와 천후빈은 농민들과 충돌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괜히 충돌을 일으키면 소작료를 거두기가 어려워서 손해이기 때문이다.] 다들 수긍하고 암태소작인회와 합의했으나 문재철만은 격분하여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암태소작인회도 반발하며 문재철한테 소작료를 납부하지 않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그러자 분노한 문재철은 [[깡패]]들을 고용하여 소작인들을 마구 폭행하며 체납한 소작료를 낼 것을 강요했다. 소작인들은 크게 분개했고 소작료 납부를 계속 거부하며 1924년 3월 27일 암태면 동와촌리에서 '지주 규탄 면민대회'를 열어 문재철의 이런 만행을 성토했다. 4월 22일에는 '''분노한 소작인들이 문재철의 부친 문군옥(文君玉, 1848 ~ ?)[* 족보명은 문태현(文泰炫).]을 위해 세워진 송덕비를 무너뜨리고 문재철이 고용한 폭력배들과 충돌하였는데 폭력배들이 소작인들한테 역으로 두들겨맞았다.'''[* 왜냐면 폭력배들의 숫자가 농민들보다 적다 보니 농민들이 작정을 하고 덤비니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50여 명의 소작인이 문재철의 신고를 받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그 중 서태석을 포함한 13명이 [[목포]]로 이송되었다. 그러자 암태도에 있었던 농민들과 그 가족들은 경찰들의 행동에 분노를 금치 못했고 농민은 물론이고 암태도 주민 전체가 봉기했다. 1924년 6월 4일과 5일에는 400여 명의 암태도 주민들이 배 수십 척을 나눠타고 [[목포항]]에 모였다. 그들은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원]] 앞에서 6월 8일까지 농성을 벌였다. 그럼에도 [[일본 경찰]]은 구금한 13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그러자 농성은 더욱 격화되어 7월 8일 600여 명의 주민들이 법원 앞에서 ''''아사동맹(餓死同盟)'을 결성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식농성은 6박 7일 동안 이어졌다.] 11일에는 문재철의 집 앞에서도 시위가 발생해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수십 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그래도 암태도 주민들은 처절하게 투쟁했고 이런 투쟁 소식은 점차 신문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큰 반향을 낳았다. 여기저기에서 암태도 주민들을 위한 지원이 이어졌고 한국인 변호사들도 13명의 구금자들을 위한 무료 변호에 나섰다. 사건의 파장이 커지면서 일본 경찰과 문재철은 당황했다. 이것 때문에 사태가 커지기를 원하지 않던 [[일본 경찰]]은 8월 30일 목포경찰서장실에서 [[전라남도]]경찰국 고등과장 고가(古賀)가 지주 문재철과 농민대표 박복영을 불러서 중재를 진행했다. 마침내 문재철은 일본 경찰의 권고에 따라 암태도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수용했고 이로써 소작쟁의는 '''농민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날 합의된 타협안은 ① 소작료는 4할로 지정, ② 지주는 암태소작인회에 2,000원 기부, ③ 체납된 소작료는 향후 3년 간 분할상환, ④ 구금 중인 쌍방 인사들은 서로가 고소를 취하, ⑤ 부서진 비석은 암태소작인회 부담으로 복구 등이었다. 이후 잡혀간 13명의 사람들은 집행유예와 벌금형만 받고 풀려났다. == 의의 == 1920년대 일어난 소작쟁의 중 가장 큰 승리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전라남도]] [[신안군]]의 다른 섬들도 소작쟁의를 벌였고 이후 전국적으로도 소작쟁의가 퍼져나갔다.[* 사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한참 전인 [[조선]] 시대인 1600년대부터 현재 신안군에 해당하는 하의3도에서는 농민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노동투쟁 중 [[원산 총파업]]과 더불어 양대 투쟁으로 손꼽힌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노동 사건사고/한국)] [[분류:1923년/사건사고]][[분류:1924년/사건사고]][[분류:문화 통치기/사건사고]] [[분류:파업]][[분류:신안군의 사건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