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1239072142__398227c_960.jpg]] عبد القدیر خان(압둘 카디르 한) abdul qadeer khan [[1936년]] [[4월 1일]] ~ [[2021년]] [[10월 10일]] [목차] == 개요 == [[파키스탄]]의 [[공학자]]. [[파키스탄의 핵개발]]의 아버지로 불렸던 인물. == 생애 == [[1936년]] [[4월 1일]] 지금의 [[인도]] [[보팔]]에서 교사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파슈툰인|파슈툰족]] 집안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던 [[1947년]] 경 가족들은 파키스탄으로 이주했고 학업 때문에 보팔에 남았던 칸 역시 [[1952년]] 가족들을 따라 인도를 떠난다. 이 후 카라치 대학에 입학해 물리학을 전공했고 [[1956년]] 졸업했다. [[1961년]] 카라치 시 장학생으로 선정돼 서베를린 공과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재료과학을 공부하다 [[1965년]]부터는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에서 공부했다. 그 이전인 [[1962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휴가를 보내다 만난 여인과 결혼했고 부부는 두 딸을 낳았다. [[1967년]]부터 [[벨기에]] 최고 명문대학인 뢰번 가톨릭 대학에서 야금공학을 공부했고 [[1972년]] 박사학위를 땄다. 이렇듯 원래 칸 박사는 루뱅 대학에서 금속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그의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네덜란드]]에서 원자력 발전소에서 우라늄 농축에 사용하는 원심분리기를 생산하는 회사인 유렌코에 취직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1971년]] 조국 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인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며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큰 충격과 치욕에 빠진다. 파키스탄에 비해 국력이 압도적인 [[인도]]를 견제하려면 핵을 반드시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한 칸 박사는 유렌코의 핵심기술인 원심분리기 설계도를 빼돌려 파키스탄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칸은 핵발전소 부지를 알아보는 동시에, 돈에 환장하는 [[일본]]과 서방의 회사들을 이용해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부품과 재료를 사들인다. 1974년부터 인도는 [[핵보유국]]이 되었기 때문에 칸은 더욱 열심히 움직였다. 칸은 핵탄두를 실어나를 미사일 기술을 얻기 위해 [[중국]]을 자주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북한]]에도 [[노동 미사일]] 기술을 제공받는 대가로 [[우라늄]] 농축 기술을 제공하여 [[북한의 핵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우라늄 농축 기술 커넥션은 기존에는 [[1994년]] 제네바 합의에 의해 동결된 플루토늄 재처리 능력만을 가지고 있던 북한이 비밀리에 우라늄을 통한 핵개발을 가능케함으로써 제2차 북핵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다. 특히나 핵개발 건설을 위한 완성품 제조를 치밀하게 분산-위장시키고 위장회사로 거래하는 수법을 처음 쓴 장본인이다. 파키스탄은 칸 박사의 지도하에 [[1998년]] 5월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해 이슬람권 최초의 [[핵보유국]]이 되었으며 파키스탄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칸 박사는 [[북한]], 이란, 리비아 등 다수의 국가에 [[핵확산]]을 지원한 혐의가 드러나면서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하였다. [[2021년]] [[10월 10일]]에 코로나19로 인한 폐 질환으로 병원에 이송된 후 사망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hm&sid1=104&oid=052&aid=0001650648|#]] [[분류:파키스탄의 공학자]][[분류:파키스탄의 무슬림]][[분류:1936년 출생]][[분류:2021년 사망]][[분류:마디아프라데시 주 출신 인물]][[분류: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죽은 인물]][[분류:외국의 실향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