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프랑스 국왕]][[분류:발루아앙굴렘 가문]][[분류:1519년 출생]][[분류:1559년 사망]][[분류:사고사한 인물]][[분류:생 드니 대성당 안장자]][[분류:생제르맹앙레 출신 인물]][[분류:가터 훈장]]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아이티 왕국의 국왕, rd1=자크 빅토르 앙리 크리스토프)] [include(틀:역대 프랑스 국왕(발루아 왕조))] ---- ||<#FFF0BF> '''앙리 2세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캐나다 국왕)] ---- [include(틀:역대 프랑스 도팽)] ---- [include(틀:역대 브르타뉴 공작)] ---- [include(틀:역대 오를레앙 공작)] }}} || ---- ||<-2> '''프랑스 왕국 발루아앙굴렘 왕조 제2대 국왕[br]{{{+1 앙리 2세}}}[br]Henri II'''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Henry_II_of_France-François_Clouet_(altered).jpg|width=100%]]}}} || || '''왕호''' ||앙리 2세 (Henri II)|||| || '''출생''' ||[[1519년]] [[3월 31일]][br][[프랑스 왕국]] 생제르맹앙레 성|| || '''사망''' ||[[1559년]] [[7월 10일]] (향년 40세)[br][[프랑스 왕국]] 투르넬 저택|| ||<|2> '''재위''' ||<#E7E7E7>[[프랑스 왕국]]의 국왕|| ||[[1547년]] [[3월 31일]] ~ [[1559년]] [[7월 10일]]|| || '''배우자''' ||[[카트린 드 메디시스|카테리나 데 메디치]] ,,(1533년 결혼),,|| || '''자녀''' ||디안{{{-2 (사생아)}}}, [[프랑수아 2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엘리자베트]], 클로드, 루이, [[샤를 9세]], [[앙리 3세]], 앙리{{{-2 (사생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마르그리트]], 프랑수아, 앙리{{{-2 (사생아)}}}|| || '''아버지''' ||[[프랑수아 1세]]|| || '''어머니''' ||[[프랑스 왕국|프랑스]]의 클로드|| || '''형제''' ||루이즈, 샤를로트, 프랑수아 3세, 마들렌, 샤를, 마르그리트|| || '''종교''' ||[[가톨릭]]|| || '''서명''' ||[[파일:앙리 2세 서명.svg|width=80]]||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s-3.3|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제2대 왕. [[프랑수아 1세]]와 [[루이 12세]]의 딸 클로드 드 프랑스의 [[차남]]으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 가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카테리나 데 메디치]]와 [[결혼]]하며 [[오를레앙]] 공작이 되었고, [[형]]인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가 급사하는 바람에 [[왕세자]]가 되어 왕위에 올랐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당시 [[유럽]]을 휩쓸던 [[종교개혁]]을 반대했다. 그는 <샤토브리앙 칙령>을 내려 [[개신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며 종교개혁가들을 [[화형]]에 처했는데 이때 그들이 비명을 못지르도록 혀를 자르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그노|프랑스내의 개신교 신도]]들은 늘어났다. 강인한 성격에 [[스포츠]]를 즐겨서 '[[기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 생애 == === 제8차 [[이탈리아 전쟁]](1551~1559)의 종결 === 155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하는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모리츠(작센)|모리츠]]를 지원하여 [[메스(프랑스)|메츠]], [[툴(프랑스)|툴]], [[베르됭|비르텐]]의 3개 주교구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와의 전쟁이 이어져 1557년 생캉탱 전투에서 프랑스에게 조국을 빼앗긴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이끄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주둔군에게 패전하였고 결국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Peace of Cateau-Cambrésis)을 맺었다. 프랑스가 이전부터 끌고 있었던 [[이탈리아 전쟁#s-2.1.8|제8차 이탈리아 전쟁]]을 종결하고,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며 사보이아 공국을 반환하는 조건의 조약이었다. 실질적으로 선대의 [[샤를 8세]] 시절부터 60년 넘게 지속되었던 합스부르크 세력과의 [[패권]] 다툼인 [[이탈리아 전쟁]]에서의 굴욕적인 패전조약으로, 이는 전통적인 유럽 대륙 지상의 패자로서의 프랑스의 위치를 상실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90년 뒤 [[베스트팔렌 조약]]때까지 이 조약은 유럽 정치 외교판의 큰 구도를 마련했다. 즉,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의 약 100년 기간은 프랑스가 전통적인 유럽 대륙의 지배자의 자리에서 쫓겨나 있었던 시기로, 이는 반대로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를 꺾은 [[스페인]]의 패권 시기와도 일치한다. 이 조약에 따라 앙리 2세의 [[장녀]]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와 펠리페 2세의 결혼, 그리고 여동생인 프랑스의 마르그리트(Margaret de France)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결혼이 확정되었다. === 어이없는 [[죽음]]과 사후 혼란 === [[1559년]] [[6월 30일]], 이 [[결혼]]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토너먼트 [[마상창시합]]이 있었는데 [[스코틀랜드]] 근위군 대장이었던 콩테 드 가브리엘 몽고메리[* 스코틀랜드 근위군 대장이라고는 해도 가브리엘 자신은 [[프랑스인]]이었다. [[백년전쟁]] 후기 [[잔 다르크]]가 출현하기 직전 위기에 몰려 있었던 도팽 [[샤를 7세|샤를]]을 구원하기 위해 당시 프랑스의 동맹이었던 [[스코틀랜드군]]이 파병되었는데, 스코틀랜드군 [[지휘관]]들의 말을 받아들여 샤를 7세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을 국왕 [[친위대]]로 삼았다. 이것이 스코틀랜드 근위군의 시초였다.]와의 창 시합에 직접 참가했다가[* 심지어 이 때 앙리 2세는 "내가 왕이라고 봐 줄 생각 말고, 제대로 해라"라고 했다.], 몽고메리 경의 창날이 부러져 [[투구]] 틈새로 파고 드는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오른쪽 눈 바로 위에 [[랜스(무기)|랜스]]의 파편이 박히고 말았다. 앙리 2세를 치료하기 위해 당대의 명의인 앙브루아즈 파레를 불러 사형수 6명으로 사전 시험을 벌이며 [[수술]]을 하기도 했고, 해부학의 선구자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까지 불러서 베살리우스가 파편을 제거하는데는 성공했지만, [[7월 10일]] 앙리 2세는 부상에 일어난 감염으로 두통에 시달리다 결국 고통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40세였다. 여담으로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앙리 2세가 죽기 전날 결혼했다. 앙리 2세는 만약 여동생의 결혼 전에 자신이 죽어버리면 사보이아 공국이 [[조약]]을 위반할지도 모른다고 여겨 죽어가는 와중에도 결혼식을 재촉했고, 결국 마르그리트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성대한 [[결혼식]] 대신 눈물바다가 된 생폴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러야만 했다. 이렇게 앙리 2세가 사고사한다는 것을 예언해 유명해진 사람이 바로 [[노스트라다무스]]였다. 물론, 그가 예언한 앙리 2세의 [[죽음]] 자체는 맞아떨어졌을지 몰라도 그의 예언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다. 참고로 몽고메리 [[백작]]은 왕을 죽였지만 고의가 아니었기에, 앙리 2세가 특별히 사면령을 내리고 죽어 마창시합 자체로는 추궁을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왕을 죽였다는 전적으로 인해 전통적인 [[귀족]] 생활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프랑스 왕실로부터 푸대접을 받았으며 그래서 불만은 품은 몽고메리는 [[개신교]]로 개종한 이후, [[플랑드르]]로 도망갔다가 [[위그노 전쟁]] 중에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고향]]인 [[노르망디]]의 개신교 [[반란]]을 획책하기 위해 돌아왔다가 [[프랑스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후, 다시 프랑스에 돌아오게 되는 그의 먼 후손이 [[버나드 로 몽고메리]]였다. == 자녀 ==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의 세 아들들은 차례차례 프랑스 왕위에 올랐으나 모두 후사를 두지 못하고 사망했다. 결국 발루아-앙굴렘 왕조는 앙리 2세의 [[아들]] 대에서 끝났고, 막내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마르그리트]]의 남편이자 나바라의 왕 [[앙리 4세]]가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 '''1남''' || [[프랑수아 2세]][br]{{{-2 (François II)}}} || [[1544년]] [[1월 19일]] || [[1560년]] [[12월 5일]] || [[메리 여왕(스코틀랜드)|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 || '''1녀''' ||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스페인의 왕비 이사벨]][br]{{{-2 (Isabel, Queen of Spain)}}} || [[1545년]] [[4월 2일]] || [[1568년]] [[10월 3일]] || [[펠리페 2세]][br]슬하 2녀[*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카탈리나 미카엘라|사보이아 공작부인 카탈리나 미카엘라]]] || || '''2녀''' || 로렌 공작부인 클로드[br]{{{-2 (Claude, Duchess of Lorraine)}}} || [[1547년]] [[11월 12일]] || [[1575년]] [[2월 21일]] || 로렌 공작 샤를 3세[br]슬하 3남 6녀 || || '''2남''' || 오를레앙 공작 루이[br]{{{-2 (Louis, Duke of Orléans)}}} || [[1549년]] [[2월 3일]] || [[1550년]] [[10월 24일]] || || || '''3남''' || [[샤를 9세]][br]{{{-2 (Charles IX)}}} || [[1550년]] [[6월 27일]] || [[1574년]] [[5월 30일]] ||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br]슬하 1녀[* 요절한 적녀 마리 엘리자베트 외에도 정부 [[마리 투셰]]에게서 사생아 아들인 앙굴렘 공작 샤를을 낳았는데, 그는 [[루이 14세]] 초기까지 장수했으며 슬하의 2남 1녀 중 차남인 루이 에마뉘엘이 딸 마리 프랑수아즈를 낳아 계속 가계를 이어갔다.] || || '''4남''' || [[앙리 3세]][br]{{{-2 (Henri III)}}} || [[1551년]] [[9월 19일]] || [[1589년]] [[8월 2일]] || 로렌의 루이즈 || || '''3녀''' ||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프랑스의 왕비 마르그리트]][br]{{{-2 (Marguerite, Queen of France)}}} || [[1553년]] [[5월 14일]] || [[1615년]] [[3월 27일]] || --[[앙리 4세]]--[* [[1572년]] 결혼 / [[1599년]] 무효화] || || '''5남''' || 앙주와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br]{{{-2 (François, Duke of Anjou and Alençon)}}} || [[1555년]] [[3월 18일]] || [[1584년]] [[6월 10일]] || || || '''4녀''' || 발루아의 빅투아르[* 아래의 잔과 쌍둥이다.][br]{{{-2 (Victoire of Valois)}}} || [[1556년]] [[6월 24일]] || [[1556년]] [[8월 17일]] || || || '''5녀''' || 발루아의 잔[* 빅투아르의 쌍둥이 동생.][br]{{{-2 (Jeanne of Valois)}}} || [[1556년]] [[6월 24일]] || [[1556년]] [[6월 24일]] || || == 여담 == *19세 연상의 정부인 [[디안 드 푸아티에]]를 죽을 때까지 사랑했다.[* 참고로 디안이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가 앙리 2세보다 나이가 많았다.] 자신의 가정교사였던 디안 드 푸아티에를 어릴 때부터 사랑해, 왕이 된 후에도 여러 작위를 수여하며 곁에 두었다. 덕분에 디안은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넘어서는 권세를 누렸으나 앙리 2세가 사망하자마자 모든 입지를 상실하고, 카트린의 명으로 왕에게 선물받은 슈농소 성과 왕가의 보석들도 반환하고 앙리 2세의 장례식 참석마저 거부당한 뒤 조용히 살았다.[* 애초에 총애해주던 왕의 죽음으로 뒷배가 사라진 정부들의 말로는 대부분 이렇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 처음 나오는 《잊을 수 없는 판결》이라는 책을 발간해 마르탱 게르 사건을 세상에 알린 장 드 코라스(Jean De Coras)와도 인연이 깊었다. 추기경과의 협상에서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그 공으로 [[툴루즈]]의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했으며, 나중에는 앙리 2세가 <비밀혼인에 관한 칙령>을 발표할 때 이를 지지하는 책을 올려 9년간 코라스가 발간한 책을 재인쇄하여 독점적으로 판매할 권한을 하사하는 등, 코라스를 크게 신임했다. *[[잉글랜드]]의 [[헨리 6세]]가 트루아 조약에 따라 백년전쟁 말기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했으나, 트루아 조약의 위법성과 본인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주장한 [[샤를 7세]]에게 백년전쟁에서 패배하여 프랑스 왕위를 포기했기에 오늘날 헨리 6세는 '앙리 2세'로 인정받지 못한다. *[[프랑스어]]에서 비겁한 술수를 의미하는 관용구인 coup de jarnac, 자낙의 일격이라는 말의 어원이 된 인물이다. 자낙은 앙리 2세와 동시대를 살았던 가이 샤보트 자낙 남작이었는데, 본인과 본인의 계모가 간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누군가가 퍼트리자 격분해 증인들을 세워 가면서 본인의 무죄를 증명했는데, 문제는 그 소문을 퍼트린 게 왕자 시절의 앙리 2세였다(...), 그리고 앙리 2세는 [[결투 재판]]을 요구했는데, 이유가 가관인 것이 가이가 계모와 간통을 안 했다는 것은 앙리 2세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므로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앙리 2세의 명예를 모욕했다는 것]], 거기에 당대 프랑스 최강의 검객으로 유명한 상테누리의 영주 프랑수아 드 비본느를 결투 재판의 대리인으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거기에 가이는 대리인을 세울 수도 없었기에 필패가 예측되었는데, 앙리 2세는 [[사문화]]되던 결투 재판을 이용해 가이 샤보트가 제풀에 물러나기를 원했던 모양이지만 가이 샤보트는 끝까지 밀어붙였고, [[1547년]] [[7월 10일]]에 벌어진 결투에서 본인의 대리인으로 나갔던 프랑수아 드 비본느가 가이 샤보트를 만만히 보고 방심하고 있다가 무릎에 칼을 맞고 패배, 완전히 방심하고 있다가 찔렸다는 게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치료도 거부하고 상처 감염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결투 재판에서 패배한다. 이 시점에는 앙리 2세가 이미 즉위한 후였는데 이 패배 직후 앙리 2세는 결투재판을 폐지해버린다(...). 그리고 그 찌르기에서 유래된 coup de jarnac은 기상천외하고 교묘한 술수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시대]]를 거치다가 비열한 짓으로 변해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