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1 楊承信[br]양승신}}}''' || || '''작호''' ||조국공(趙國公) || || '''성씨''' ||양(楊) || || '''이름''' ||승신(承信) || || '''자''' ||수진(守眞) || || '''생몰''' ||921년 ~ 964년 || || '''부친''' ||[[양광원]](楊光遠)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오대십국시대]] [[후진]],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 [[후주]], [[북송]]의 인물. 자는 수진(守眞). == 일생 == === 초기 생애 === 양승신은 조상이 [[사타족]]으로 아버지는 후진에서 태사를 지냈던 수왕(壽王) [[양광원]]이며, 양승신은 921년 양광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승신은 후진에서 의무군절도사(義武軍節院使)가 되었고 난주자사(蘭州刺史)를 겸임하였으며, 선무군과 평로군의 아교를 역임하였다. === 반신의 아들 === 후진 천복 8년(943년) 겨울, 양광원이 청주(靑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석중귀]]는 이수정(李守貞) 등을 보내 양광원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명하였다. 식량이 다 떨어지고 형세가 꺾이자, 양승신의 큰형인 양승훈(楊承勳)은 아버지를 위협하여 항복하였고, 결국 양광원은 반란이 평정되면서 처형되었다. 양승신은 아버지의 반란이 평정되자 아우인 양승조(楊承祚)와 더불어 대궐로 들어가 죽음을 청했다. 하지만 석중귀는 오히려 이들을 용서하며 양승신을 우우림장군(右羽林將軍)으로 삼고 양승조를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으로 삼았으며,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도록 허락했다. 양승신은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뒤에 정주(鄭州)로 유배되었다. === 후진의 멸망과 후한 시기 === 946년, 거란이 후진을 침공하였고 이때 양승신은 아버지에 이어 큰형인 양승훈을 잃었다.[* 양광원은 반란을 일으킬 당시 거란에 구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거란의 군대가 오기 전에 양광원은 양승훈의 협박을 받아 항복하고 처형되었다. 뒤에 946년 거란이 후진을 침공할 때 양승신의 형인 양승훈은 정주 방어사를 맡고 있었는데, 거란군은 양승훈을 불러 양숭훈의 죄상을 나열하고 그를 죽였다.] 양승신은 후진이 멸망할 때 평로군 절도사가 되어 아버지의 직위를 이었다. 양승신은 [[후한(오대십국시대)|후한]]에서 안주(安州)와 부주(鄜州) 절도사를 역임하고 검교태사가 더해졌다. === 후주 시기 === 양승신은 [[후주]] 광순 연간 초에 동평장사가 더해졌다. [[곽위]]가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 정벌을 준비할 때, 양승신은 곽위에게 표문을 올려 자신의 참전을 주청하였으며, 곽위에 의해 기국공(杞國公)으로 책봉되었다. 곽위 사후 [[시영]]이 즉위하면서, 양승신은 한국공(韓國公)으로 진봉되었다. 양승신은 시영 휘하에서 회남 정벌에 참여하였고, 호주공성부도부서(濠州攻城副都部署), 수주북암도부서(壽州北砦都部署) 겸 지행부사를 지냈다. 이후 누차 전공을 쌓아 충정군절도사(忠正軍節度使), 동평장사로 발탁되었다. 959년, 노국공(魯國公)으로 진봉되었다. === 북송 시기와 사망 === 960년 [[북송]]이 건국되면서 양승신은 시중을 겸임하였다. 양승신이 입조하려고 할 때 후주의 옛 신하인 [[이균]]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승신은 택주서면도부서(澤州西面都部署)로 임명되어 이균의 반란을 토벌했고, 이균이 평정된 뒤 하중에 진수하였다. 양승신은 건덕 원년(963년) 조국공(趙國公)으로 진봉되었고, 건덕 2년(964년)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중서령(中書令)으로 추증되었다. == 여담 == 양승신은 신장이 8척이었고, 몸가짐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비록 양승신은 반신의 아들이었지만 번진의 절도사를 역임하였고 위정에 힘쓰면서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송사]]에 따르면 964년 양승신이 죽자, 포주의 백성들이 표문을 올려 양승신의 제사를 지내길 청했다는 기록을 보면 양승신에 대한 백성들의 인심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이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921년 출생]][[분류:96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