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부여군 출신 인물]][[분류:1884년 출생]][[분류:195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 성명 ||<(> 양재흥(梁在興) || || 생몰 ||<(> [[1884년]] [[5월 2일]] ~ [[1959년]] [[2월 5일]] || || [[출생지]] ||<(>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하화리 || || 사망지 ||<(> [[충청남도]] [[부여군]]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양재흥은 1884년 5월 2일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하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29일 [[송기면]]이 주도하여 일으킨 마산면 신장리 장터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2천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때 일본 경찰에 의해 주동자 송기면 등 6명이 경찰서로 강제 연행되자, 그는 [[고시상]], 김인두(金印斗), [[박재엽]] 등과 함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경찰출장소로 몰려가서 창문 유리를 깨고 기물을 파괴하면서 연행당한 동지를 구출하려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부여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9년 2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양재흥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3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