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양주시)] ||<-2> [[파일:양주시 CI.svg|height=25]] '''{{{#fff 양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 ||<-2> {{{#fff 양주부[br](楊州府, 1397)}}} || ||<-2> ▼ || ||<-2> {{{#fff 양주목[br](楊州牧, 1466)}}} || ||<-2> ▼ || ||<-2> {{{#fff 양주군[br](楊州郡, 1895)}}} || ||<-2> ▼ || ||<-2> {{{+1 {{{#fff '''양주시'''[br]'''(楊州市, 2003)'''}}}}}} || [목차] == 고대 == 본디 한강 북쪽 땅 일대는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하면서 한성을 [[백제]]로부터 빼앗은 후 한산군을 두었는데, 이때 지금의 양주, 의정부 지역에는 매성군(買省郡), 혹은 창화군(昌化郡)을 두었다. 이후 [[통일신라]] [[경덕왕]] 때 매성군을 내소군(來蘇郡)으로 개편했다. 지금의 동두천 지역은 [[삼국시대]] 내을매현, 사천현이었다. 지금의 남양주 진접, 진건, 오남은 골의노현(骨衣奴縣), 지금의 고양시 일대는 달을성현, 개백현(皆伯縣)이었다. 한편 지금의 [[서울]] 강북 일대와 구리, 남양주 상당지역은 북한산군이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대에 한양군으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골의노현(남양주 진접, 진건, 오남)은 같은 시기에 황양현으로 개편되었다. == [[고려]] == [[왕건|태조]] 때 내소군은 견주군(見州郡)으로, 한양군은 양주로 바뀌었다. 양주와 견주는 [[경주시|경주]]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983년]]([[성종(고려)]] 2년)에 처음으로 12목을 두었는데, 이 때 양주목(楊州牧)을 두었다. 지금의 양주, 남양주, 고양 일대가 한양군을 중심으로 한 행정구역인 양주목이란 이름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경기 북부권(지금의 서울 강북지역 포함) 고을들이 이렇게 개편되면서 '''양주'''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양주라는 지명은 [[1018년]] 경기도가 경기라는 지명이 부여되었을 때부터 고려시대의 임금 [[현종(고려)|현종]]이 '''"이 지역은 [[버드나무]]가 무성히 자랐다"''' 라는 의미로 '버들고을' 이라고 부르면서 '양주(楊州)' 라고 지명을 정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양주' 라는 지명을 사용한 역사를 보면 1000년은 훨씬 넘어간 셈이다.'''[[http://www.yangsa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5009|#]] 이렇게 [[1018년]]([[현종(고려)]] 9년) 12목이 8목으로 개편되고 [[도(행정구역)|도]](道)제가 실시되었다. 교통로가 개경 중심으로 바뀌면서 점차 쇠퇴하게 된 탓에 견주는 견주현으로 격하되었고 [[양광도]]에 소속되었다. 양광도의 ''''양''''이 바로 양주목이다. ''''광''''은 [[광주시|광주목]]. [[1067년]]([[문종(고려)]] 21년) 양주의 중심지에 부수도인 남경이 설치되었다. [[고려 시대]]까지 양주의 중심지는 쭉 현 [[서울특별시]] [[광진구]] 일대였다.[*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세운 [[아차산성]]이 내소군의 중심지였고, [[한강]]을 마주보며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과 마주보며 대치하는 구도였다. 이것이 고려 때 양주 소속이었던 현재 서울 구도심 일대에 남경을 세웠고, 남경이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 떨어져 나간 이후에도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에 양주의 치소가 지금의 양주시 쪽으로 이동한 뒤부터 광진구 일대(+[[중랑구]] 면목동), [[성동구]] 일부([[중랑천]] 동부), 당시에는 섬이었던 [[잠실]] 일대를 '고양주면(古楊州面)'이란 행정구역으로 불러왔다.] 고려 초기만 해도 현 '''[[서울특별시]] [[서울/강북|강북]] 전역'''('''[[사대문안]]'''과 옛 [[성저십리]] 지역 포함)과 '''[[고양시]] 일대'''까지도 '''양주''' 영토였다. 단, 이때의 양주는 [[서울/강북|한양군]], [[양주시|견주군]], [[남양주시|풍양현]], [[덕양구|행주현]] 등과 같은 경기 북부권 고을들이 '양주목'이라는 이름으로 '''느슨하게 통합'''된 것으로 봐야 한다. 다만 지금의 [[용산구]] 일대는 당시에는 과주(지금의 [[과천시]]) 소속인 용산처였다가 부원현으로 승격되어 남경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현 [[고양시]] 일대였던 고봉현과 행주현(별명 덕양현)은 양주군의 속현이었고, 지금의 서울 강북 일부(사대문안과 용산, [[신촌]] 일대)[* 남경의 관할구역이 지금의 [[구리시]], [[남양주시]] 삼패동까지였다는 설도 있다.]가 [[남경(고려)|남경]]으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남경이 양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까지는 아니고, 남경을 제외한 양주 지역의 현에 별도로 '감무'[* 후에 [[조선]]의 지방관인 현감으로 이어지는데 똑같이 현에 파견되던 수령인 현령보다 격이 낮았다.]란 관리를 파견하는 형식으로 구분하는 형태가 된 수준이었다. 하지만 숙종 시기에는 남경 근처의 풍양현(남양주 진접), 견주(양주, 의정부), 사천현(동두천)까지 직할로 두어 남경의 범위가 더 넓혀지기도 했다. == [[조선]] == [[조선]]이 건국하여 [[1395년]]에 [[한성부]]의 경계가 획정되자 오늘날의 서울 강북 나머지 지역(노원, 도봉, 광진, 중랑 제외)[* 광진구 서부와 중랑구 면목동이 한성부 두모방에 편입된 것은 [[구한말]]의 일이다.]이 한성부 [[성저십리]]로 편입되어 양주군에서 분리되었고, [[1397년]] 읍치 이전과 함께 양주를 군에서 부로 승격시켰다. 본디 지금의 서울 [[광장동]] 지역에 있던 양주 읍치가 옛 견주 자리로 이전되면서 이웃 행정구역이 분리되기 전까지 존재하던 옛 양주목의 면모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태종(조선)|태종]]시기인 1413년(태종 13년)에 양주도호부가 되었으며, [[세조(조선)|세조]] 시기인 [[1466년]](세조 12년) 진(鎭)을 설치하고 양주부를 다시 목으로 승격시킴에 따라 이후 4백여 년간 양주는 정3품 목사가 다스리는 큰 고을이 되었다. 양주 읍치의 이동 과정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통설은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따라 한양부(고려) → 아차산성([[태조(조선)|태조]] 3년) → 양주시 [[고읍동]](태조 6년) → 옛 견주 자리 = 현재 양주관아지([[중종(조선)|중종]])로 보고 있으나, 문제는 중종 대에 증보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양주 읍치를 옮겼다는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중종 대에 읍치를 옮겼다는 기록은 김정호 이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즉 이것은 김정호의 독자적인 해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디 아차산성에 양주의 읍치가 있었으나 남경이 생기면서 지금의 서울 광장동 지역으로 읍치가 이동했고, 태조 3년에 [[한양]] 천도로 인해 양주시 고읍동으로 읍치가 이전되었다가 태조 6년에 옮긴 것이 현재의 양주관아(양주시 [[유양동]] 소재)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의 양주목은 지금의 양주시 지역 대부분을 비롯하여 서울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광진구]][* 당시 양주군 고양주면 지역으로, 놀랍게도 지금의 '''[[송파구]] [[잠실|잠실동, 신천동]]'''도 포함하고 있었다. 사실 잠실지역은 [[여의도]]처럼 한강 한가운데 섬이였고 과거에는 섬의 북쪽을 흐르는 강보다 남쪽을 흐르는 강이 더 넓었기 때문에 잠실이 양주군에 속하는 것이 지리적으로도 맞다. 잠실이 지금처럼 된 것은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로 물줄기가 바뀌어 섬의 북쪽이 더 넓은 강으로 되었고, 결정적으로 [[1970년대]] 잠실개발 당시 남쪽의 지류는 매립해서 탄천, 성내천, [[석촌호수]]라는 흔적만 남기고 없어졌기 때문. [[1895년]] 고양주면 일부가 한성부 두모방에 편입되었다.]와 [[구리시]]와 [[남양주시]], [[의정부시]], [[동두천시]]를 모두 관할하는 거대한 행정구역이었다. 게다가 현재 연천군 전곡읍도 이 때는 양주목 영근면으로서 양주 관할인지라, 남쪽으론 서울 [[잠실동]] 일대 부터 북쪽으론 연천군 [[전곡읍]] 까지 모두 한 행정구역 이었다. 이후 [[1895년]] [[갑오개혁]]에서 부, 목, 군, 현을 [[23부제|부, 군으로 간략화하는 행정개편]]이 이루어짐에 따라 양주목 역시 양주군으로 재편되었다. 또한 현재의 중곡동 등 고양주면 일부가 한성부 두모방에 편입되었다. [[1906년]] 현재의 [[조안면]] 지역에 해당되는 초부면(다산 [[정약용]]의 고향)을 [[광주군]]으로부터 편입하였고 대신 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과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해당되는 신혈면이 고양군에 편입되었다. 동시기에 청송면, 산내면(현재 [[청산면(연천)|연천군 청산면]] 및 [[포천시]] [[신북면(포천)|신북면]] 남청산 지역)도 포천군에 편입되었다. === 구한말 행정구역 === * 건천면(乾川面) 1914년에 진건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남양주시 [[진건읍]]. * 고주내면(古州內面) 옛 [[양주시/역사|견주현]]의 중심지. 1914년에 주내면으로 통합되었고, 2001년에 양주시 승격과 동시에 분동되어 폐지되었다. 양주2동 문단 참고. * 고양주면(古楊州面) 고려시대까지 양주 관아가 있었던 곳이며, 1914년에 둑도면으로 통합하여 고양군에 편입되어 나간 곳이다. [[성저십리|조선후기 기준]] 현재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구의동·군자동·능동·자양동·중곡동·화양동, [[중랑구]] 면목동, [[성동구]] 성수동·송정동, [[송파구]] 잠실동·신천동 일대에 해당한다. * 구지면(九旨面) 1914년에 구리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갈매동]] 제외) 일대에 해당한다. * 금촌면(金村面) 1914년에 미금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의 남양주시 일부. * 노원면(蘆原面) 1914년에 해등촌면과 노해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상계동([[행정동]] 상계1동, 사인말 /조암동(鳥岩洞) 및 상계3·4동, 덕릉리 제외)·월계동·중계동·하계동과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 일대 및 [[남양주시]] [[별내동]] 불암동([[불암산]] 자락)에 해당한다. * 노해면(蘆海面) 1914년에 노원면(갈매, 장기리-담텃골-, 불암동 제외)과 해등촌면, 둔야면 조암동(사인말, 현재의 서울 노원구 상계동 북부)·상루원리(웃다락원, 현재의 서울 도봉구 도봉동 도봉역 인근), 별비곡면 덕릉리(현 서울 노원구 상계동 [[행정동]] 상계4동)의 통합으로 성립되었으며, 1962년 12월에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되어 나간 곳이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상계동·월계동·중계동·하계동과 도봉구 도봉동·방학동·쌍문동·창동 일대에 해당한다. * 내동면(內東面) 1914년에 별내면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1980년 남양주가 양주에서 분리되면서 옛 내동면 지역이 의정부시에 이관되었기에 현재의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산곡동에 해당한다. * 이담면(伊淡面) 현재 경기도 동두천시 걸산동·광암동·동두천동·보산동·상봉암동·생연동·송내동·안흥동·지행동·하봉암동 일대에 해당한다. 1963년에 동두천읍(東斗川邑)으로 승격되었으며, 1973년에 [[포천시|포천군]] 포천면 탑동리가 동두천읍에 편입되었으며, 1981년에 동두천시로 승격, 분리되었다. * 둔야면(屯野面) 1914년에 사잇말, 조암동(鳥岩洞)을 제외하고 시둔면으로 통폐합되었다. 현재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의정부동·장암동·호원동과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북부 일대에 해당한다. * 망우리면(忘憂里面) 현재 서울특별시 중랑구(면목동 제외, 묵동, 중화동, 신내동, 망우동, 상봉동) 지역이다. * 묵은면(墨隱面) 1914년에 은현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양주시 은현면 하패리를 제외한 지역이다. * 미음면(渼陰面) 1914년에 미금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 별비곡면/별비면(別非谷面/別非面) 1914년에 별내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자연마을 불암동 제외), 별내면, 퇴계원읍 및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행정동]] 상계3·4동 일대에 해당한다. * 산내면(山內面)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과 포천시 (남청산 지역)에 해당한다. 1906년 포천군에 편입되어 나간 곳이며 1914년에 산내면으로 통합되었다. * 상도면(上道面) 1914년에 화도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시북면(柴北面) 1914년에 시둔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의정부시 일부.(녹양동, 가능동, 자일동, 금오동 등) * 영근면(永斤面) 현재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으로, 1914년에 연천군에 편입되었다. * 접동면 1914년에 진접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남양주시 진접읍 일대. * 진벌면 1914년에 접동면과 진접면으로 통합되었다. * 청송면(靑松面) 1906년 포천군에 편입되어 나간 곳이며 1914년에 산내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과 포천시 (남청산 지역)에 해당한다. * 하도면(下道面) 1914년에 화도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 해등촌면(海登村面) 1914년에 노원면과 노해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및 [[강북구]] 우이동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 현내면(縣內面) 1914년에 은현면으로 통합되었다. 현재의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하패리, 동두천시 상패동 일대에 해당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양주시/행정, version=171, paragraph=4)] == [[일제강점기]] == [[1914년]]에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부군면 통폐합]] 과정에서 고양주면이 고양군 뚝도면으로 편입되었고, 영근면(현 [[전곡읍]])이 [[연천군]]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시북면과 둔야면이 [[의정부시|시둔면]]으로, [[서울특별시]] [[도봉구]]의 전신인 해등촌면과 [[노원구]]의 전신인 노원면(갈매리 제외)이 노해면으로, 구지면(현 [[구리시]])과 노원면 [[갈매동|갈매리]]와 망우리면(현 [[중랑구]])이 구리면으로, 미음면과 금촌면이 미금면으로, 와공면과 초부면이 와부면으로 통합되었다. 이와 함께 '''고주내면'''(고읍동, 광사동, 만송동, 삼숭동)과 '''읍내면'''(남방동, 마전동, 산북동, 어둔동, 유양동)을 합쳐 '''주내면'''으로 바뀐 것 역시 [[1914년]]의 일이다. 1914년 4월 1일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인해 회암면, 천천면, 어등산면을 합쳐 회천면이 만들어졌다. [[1922년]] 주내면 유양리(현재의 [[유양동]])에 있던 군청사가 시둔면(현 [[의정부시]])으로 이전하였다.[* 舊 양주군청은 [[의정부시]] [[의정부동|의정부1동]] 부대찌개거리 근처에 있었으며, 현재 그 위치에 [[한라비발디]]루트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섰다.] [[1938년]] 시둔면이 양주면으로 개칭되고[* 양주목의 역사적 중심지였던 주내면(훗날의 양주읍→양주동) 대신, 의정부 지역에 '양주'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이다. 양주군청을 의정부로 이전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2년]] 양주면이 의정부읍으로 승격되었다. == [[대한민국]] == [[1946년]] 2월 파주군 [[남면(양주)|남면]][* 원래 [[적성군]] 소속이었다가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연천군]]에 합쳐졌고 [[1945년]] 해방 직후 파주군으로 편입되었다가 1년만에 다시 양주군으로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면명을 바꾸지 않아 양주 '''최북단'''임에도 '''남면'''이라는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지명|요상한 상황이 된 것]]이다.]을 편입하여 1읍 16개 면이 되어 관할 구역이 더 넓어졌다. 1962년 6월 18일, 회천면 면사무소가 고암리에서 덕정리로 옮겨졌다. [[1963년]] [[1월 1일]] 노해면과 구리면(舊 망우리면 지역)의 5개 리를 [[서울특별시]]에 넘겨주었다. 같은 시기에 이담면이 동두천읍으로 승격되고 화도면의 3개 리, 진접면의 1개 리와 [[가평군]] 외서면의 3개 리를 합쳐 [[수동면(남양주)|수동면]]이 신설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의 중심부였던 의정부읍이 [[의정부시]]로 승격하여 분리되면서 양주군은 의정부시를 사이에 두고 북부와 남부로 [[월경지|관할구역이 분리되었다.]][* 이 때문에 양주군청은 '''의정부시'''에 위치해야 했으며 [[남양주군]]이 분리되고도 20년을 더 양주군청이 의정부에 있는 상황을 거쳐 [[2000년]] 현 위치에 새 군청을 지어 이전했다.] [[1973년]] 구리면이 구리읍으로 승격되었고, [[포천군]] 포천면 탑동리가 동두천읍으로 편입되었다. [[1979년]] 미금면이 미금읍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980년]] 4월 남부에 해당되는 구리·[[미금시|미금읍]], 별내[* 숯돌고개 너머에 있던 [[고산동(의정부)|고산리]]와 [[산곡동(의정부)|산곡리]] 제외, 두 리는 [[의정부시]]에 편입되었다.]·진접·수동·화도·진건·와부면의 2읍 6면을 통째로 [[남양주군]]으로 신설하여 분리시켰다. [[1981년]] 7월에는 북쪽의 동두천읍이 [[동두천시]]로 승격, 분리되면서 현재의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그 후 [[1983년]] 2월 [[은현면]] 상패리가 [[동두천시]]로, 백석면 기산리와 영장리가 [[파주시|파주군]] [[광탄면]]으로 편입되었다. [[1985년]] 10월 1일 회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 1월 파주군 [[광탄면]] 기산리 일부(기산저수지 일대)가 다시 백석면으로 환원되었다. 1996년 2월 12일 덕계동과 회정동의 인구 증가로 덕계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이 자리는 현재 2014년 3월에 옮겨진 회천2동 주민센터(회천2동 복합 청사)가 되었다. [[2000년]] 10월 1일 [[양주시청|양주군청]]사가 의정부 시내[* 의정부시 [[의정부동]] 220-110번지(현 [[의정부경전철]] [[의정부중앙역]] 앞 [[한라비발디]]루트 아파트)에 있었다.]에서 주내면 남방리 1-1로 옮김에 따라, 주내면이 양주읍으로 승격하였다. [[2001년]] 10월에는 백석면이 [[백석읍]]으로 승격되었다. [[2003년]] [[10월 19일]] [[포천시]]와 함께 시로 승격, 양주읍과 회천읍은 폐지되어 [[행정동]]으로 분동되고, 그 아래의 리는 [[법정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2006년]] [[12월 15일]]에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주내역(현[[양주역]]), [[덕정역]]까지 개통되었으며 [[2007년]] [[12월 28일]]에 [[덕계역]]이 신설되었다. 그리고 [[2016년]] [[12월 15일]]에는 의정부-소요산 구간의 개통이 10주년을 맞는다. [[2013년]] [[10월 19일]]에 시 승격 10주년을 맞았다. 또한 [[서울 지하철 7호선]] [[도봉산포천선]] 양주 구간이 2016년 2월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여 7호선을 유치할 수 있게 되었다. == 관련 문서 == * [[서울특별시/역사]] * [[고양시/역사]] [각주][[분류:양주시]][[분류:향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