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명사)] ---- [목차] [clearfix] == 개요 == 楊鎬 (1555 ~ 1629년) [[명나라]]의 관료이자 무장이다. 자는 경보(京甫), 호는 풍균(風筠) [[임진왜란]], [[명청교체기]]에 활약했다. 정유재란 때 명에서 파견된 무장의 최고 지휘관으로 파병 당시 직위는 '''흠차경리조선군무도찰원우첨도어사(欽差經理朝鮮軍務都察院右僉都御史).''' == 생애 == === 초기이력 === [[하남성]] [[상추시|상구]] 출신이다. 1576년 향시에 급제해 거인이 되어 [[국자감]]에서 공부하다가 1580년 전시에 급제해 진사가 되었다. 즉, 무관이 아니라 문관출신이다. 과거 급제후 지방으로 내려가 [[난창시|남창]]과 [[바오딩시|리현]]의 지방수령을 하다가 이어 중앙 조정으로 복귀하여 어사, 대리평사 등을 지냈다. 이어 다시 지방관으로 옮겨가서 요해도로 옮겨 산동 참의가 되었다. 이때 토만(몽골)의 초화의 장막을 기습해 공을 세워 부사가 되어 간황전 130여경, 미곡 1만 8천여 석을 받았다가 참정이 되었다. 이때부터 행정관이 아니라 군사 관련 직책을 맡게 된다. === [[정유재란]] === 1597년에 우첨도어사에서 병부상서로 임명되어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해 압록강을 건넜으며, 9월 1일에 해생을 시켜 직산에서 왜군을 격파하게 했다. 이것이 [[직산 전투]]이다. 12월 1일에 [[마귀(명나라)|마귀]] 등과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점령한 울산성을 공격해 [[울산성 전투]]를 벌였지만 1천 명이 전사하고 3천 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고 함락하지 못하자 철수했으며, 1598년에 죄를 청하고 돌아가기를 구해 명나라로 귀국했다. 양호는 100여 명이 전사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가 정응태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때 조선 조정이 양호를 변호하다가 정응태가 조선을 모함하는 글을 명 정부에 올리는 이른바 [[정응태 무고사건]]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만력제는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이 철수를 하자 양호를 사면했고, 양호는 거짓보고에 대한 처벌은 받지 않았다. === 왜란 이후 === 1610년 요동태수로 복직되었다. 이 당시는 이 지역에서 절대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성량]](李成樑)이 사라진 이후 누르하치 세력이 불같은 기세로 성장하자 그나마 문무겸비한 양호를 이 지역을 평정할 수 있는 인물로 보고 명나라 조정에서 그를 앉힌 것이다. 당시 요동의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양호의 능력은 조정에서 여러모로 인정받고 있었던 듯 하다. === [[사르후 전투]] === 1618년 4월에 후금이 명나라를 공격하고 [[푸순시|무순]](撫順)을 함락시키면서 북방의 위험으로 대두하자, 명나라는 누르하치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정벌군을 구성한다. 양호는 병부시랑으로 임명되고 요동 순무가 되었으며, 누르하치 정벌군의 총사령관격인 경락이 되었다. 만력제는 양호에게 상방검을 내려 군율을 어기는 자를 황제 재가 없이 참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1619년 정월에 출진하여 조선의 1만 1천 등을 포함한 10만에서 16만 정도로 추정되는 군사를 통솔해 네 갈래로 나누어 누르하치의 본거지 앞에서 합류해 포위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 행위는 군사들이 가는 길의 험준함의 차이가 있었고 보병 특성상 기병 위주의 후금 군대의 기동력을 가지지 못한데다가 병력들은 각개격파 당하기 좋게 분산되다 보니 후금의 군대에게 병력이 압도되는 일이 많았다. 양호는 20년전 임진왜란 시절 전우이기도 했던 [[유정(명나라)|유정]](劉綎)과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이번에는 양호의 부하로 참전한 유정은 원병으로 온 조선군 [[강홍립]](姜弘立)에게 양호의 험담을 했는데, 그것이 강홍립의 장계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 일기에 실려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유정에 의하면 양호가 터무니없이 서둘러 병력의 합류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참패가 불보듯 뻔하며, 그 책임은 양호에게 있다는 것이다. 유정의 말처럼, 양호의 4갈래의 부대들은 모두 후금의 철기병에 각개격파되어 전체적으로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도 참패를 했다. 결국 [[사르후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조정의 탄핵을 받아 금부에 체포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즉시 집행되지 않고 무려 10년 동안 갇혀 지냈다. [[숭정제]]가 즉위한 이후에야 참형이 집행되었다. == 조선과의 관계 == 당대 조선인들은 양호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문관 출신인 만큼 문치를 내건 조선 조정과 코드가 잘 맞았고 본인이 조선에도 예의를 갖췄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한 듯 하다. 양호가 명나라 조정에서 허위보고 혐의로 탄핵을 받자 [[선조(조선)|선조]]는 [[이원익]](李元翼)을 명나라로 보내 그를 옹호해 줄 정도였다. 조선에서는 그가 명나라로 귀국할 때, 선조를 비롯한 문무백관들이 모두 나와 전송했다. 이후에도 그를 기리는 양호거사비를 세웠으며, 1610년에는 그의 초상을 구해 살아있는 사람을 모시는 생사에 봉안되었다.[* 이후 양호거사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의 제 91호로 지정되었고, 소재지는 명지대학교 내부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50-3 (거북골로 34)에 위치하고 있다. 또 선조 31년 (1598), 광해군 2년 (1610), 영조 40년 (1764), 헌종 1년 (1835)까지 무려 4차례에 걸쳐 건립되었다.] [[명량 해전]] 후 [[선조(조선)|선조]]가 명나라에 해전의 결과를 알리면서 성과를 일부러 과소 평가하자, 선조를 설득해서 [[이순신]](李舜臣)의 전과를 높이 평가하고 품계를 올리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 조정은 물론이고 선조에게도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나, 원래의 임무인 일본군과의 전투에만 집중했지 조선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고 정도를 지켰다. 그런 사람들이 단 한 번 조선의 인사권에 개입한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의 품계를 올리라고 선조를 압박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선조가 이순신의 품계를 정3품 절충장군에서 정2품 정헌대부로 올려주긴 했으나, 사실 이는 정유년 파직 직전의 품계로 돌려준 것에 불과했다.] 사실 이때 선조는 이순신을 싫어하고 불신했기에 양호를 비롯한 명나라 장수들이 보기에도 과도할 정도로,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폄하가 심각하긴 했다. 명량대첩의 승전이 전해지자 양호는 크게 기뻐하며 이순신에게 붉은 비단 두필을 보내면서 본인이 직접 괘홍[* 붉은 비단을 승리의 상징으로 배에 걸어주는 축하 의식]하고 싶으나 멀리 떨어져 있어 마음만 보낸다는 [[편지]]를 보내 이순신을 치하했다. 하지만 선조는 이 소식을 듣고 양호를 찾아가 "이순신이 작은 승리를 거둔 것에 불과한데 대인이 비단을 내리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오히려 민망합니다"라며 이순신을 폄하했다. 한편 1610년 이후 양호는 요동 순무 및 경략으로 부임해서는 [[광해군]] 조정을 매우 압박했다. [[재조지은]]을 갚아야한다는 서신을 여러차례 조선조정에 보내서 광해군을 당혹하게 만드는가 하면, 조선 조정이 명나라 조정에 보내는 문서도 가로채 읽고서 멋대로 검열해서 조선에 다시 보내라고 반려하기도 했다. 본인은 명나라의 안보를 책임진 처지이니, 조선에 대한 무례를 감수하고서라도 파병에 소극적인 광해군을 압박하는 것이 더 본인의 직분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사르후 전투]]에서 패한 뒤 [[광해군]]에게 전사한 수많은 조선 장병들을 위문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거 보면 조선에 나름 정은 있었던 모양. 하지만 결국 이 전투의 패배로 10년간 감방살이를 하다가 끝내 숭정제의 명으로 형이 집행된다. 처형시 74살이었으니 당시로서는 꽤 장수했지만, 어쨌든 제명에 못살고 비극적 최후를 마쳤다. == 평가 == [[류성룡]](柳成龍)은 [[징비록]]에서 양호가 적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평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명 자체의 준비가 철저했고 조선수군이 명량 등에서 일본군을 막아준 덕택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르후 전투]]에서 참패함으로서 명나라 멸망의 길을 열었기 때문에, 장수로서의 자질에 의문을 받기는 하지만, 당시 명나라군의 사정 또한 양호의 작전만큼이나 엉망 진창이었기 때문에 이 참패를 양호만의 책임으로 볼 수는 없다. == 양호거사비 == ||<-5>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90호 ||<|2> ← || '''91호''' ||<|2> → || 92호 || || [[이극배#s-5|광주 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 || '''양호거사비''' || [[대성사 목불좌상]] || ---- ||<-2>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28]]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1호}}}]]''' || ||<-2> {{{#fff {{{+1 '''양호거사비'''}}}[br]{{{-1 楊鎬去思碑}}}}}}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로 57,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거북골로 34[br](남가좌동 50-3, [[명지대학교]]) || || '''{{{#fff 시대}}}''' || [[조선시대]] || || '''{{{#fff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 '''{{{#fff 수량 / 면적}}}''' || 석비 1基, 토지 0.9㎡ || || '''{{{#fff 지정연도}}}''' || [[1993년]] [[4월 10일]] || || '''{{{#fff 관리자[br](관리단체)}}}''' || 학교법인 [[명지학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양호거사비.jpg|width=100%]]}}} || || {{{#fdf6da ''' 양호거사비[* [[https://museum.seoul.go.kr/archive/archiveView.do?currentPage=12&type=A&type2=area&arcvGroupNo=352&lowerArcvGroupNo=&arcvMetaSeq=7143&arcvNo=8093&realArcvGroupNo=2774&searchVal=#layer_exhibit|사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 || [clearfix] ----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뒤뜰에 양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정식 명칭은 '흠차경리조선도어사양공거사비(欽差經理朝鮮都御史楊公去思碑)'이다. 원래는 서소문동에 있던 양호의 [[사당]]인 선무사 경내에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명지대학교가 그 자리에서 개교했고, 1969년에 지금의 남가좌동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양호의 공비도 같이 이전한 것이다. 1993년 4월 10일에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받았다. 너비 98cm, 두께 32.5cm로, 총 높이는 266cm이고 그 중 비신 높이는 243cm이다. 연꽃 모양으로 조각한 받침돌 위에 비신을 올리고 그 위에 쌍룡 2마리와 구름을 화려하게 조각한 머릿돌을 올렸다. == 대중매체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97화에서 등장하였으며, 담당 배우는 박승규. 선조와 술자리에서 이순신을 극찬하며 나오는데 놀랍게도 실제 선조실록에서 선조와의 대화를 토대로 연출한 장면이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010020_001|참조자료]] 드라마 [[징비록(드라마)|징비록]]에서는 배우 [[김하균]]이 맡았다. 조선에 원군으로 참전했으며, 49회에선 사서의 기록대로 도산성에서 조선군과 싸우다가 일본군의 식량이 떨어진 상황에서 군사들을 쉬게 한다는 핑계로 싸우지 않다가 일본군에서 지원군이 나타나자 경주로 후퇴한다. 이후 명나라 조정에 자신이 승리했다는 허위 보고를 했으며, 술자리를 열면서 자신이 이겼다고 허세를 부리다가 명나라에서 내려온 칙사를 통해 황상을 기만한 죄로 조정에 소환한다는 명을 받고 명나라로 돌아간다. [각주] [[분류:1629년 사망]][[분류:명나라의 인물]][[분류:임진왜란/군인]][[분류: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분류:상추시 출신 인물]][[분류:참수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