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어소운}}}'''[br]'''魚小雲'''}}}}}}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어소운.jpg|width=100%]]}}} || || '''본관''' ||[[어(성씨)|함종 어씨]][* 휘(諱) 한종(漢宗)공파-[[동래]] 문중 30세 운(雲) 항렬.] || ||<|2> '''출생''' ||[[1906년]] [[12월 30일]] || ||[[경상남도]] [[동래부]] 읍내면 옥미정동[br](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 ||<|2> '''사망''' ||[[1977년]] [[10월 28일]] (향년 70세)|| ||[[부산시]]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148호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06년 12월 30일 경상남도 동래부 읍내면 옥미정동(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에서 아버지 어달선(魚達善, 1878 ~ 1933. 6. 8)과 어머니 [[전주 이씨]](1881 ~ 1957. 4. 13)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평소 투철한 항일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개성고등학교|부산제2상업학교]]에 재학하던 1927년 봄, [[김규직]]·양정욱(梁正彧)·윤태윤(尹兌潤)·윤병수(尹炳洙) 등 같은 학교 학우 10여 명과 함께 민족정신의 함양 및 항일투쟁을 목표로 비밀독서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다 그는 학생 중심의 비밀독서회 활동으로는 항일투쟁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고, 이에 같은 해 가을 김규직의 집에서 독서회원들과 함께 독서회를 해산하는 대신에 비밀결사 흑조회(黑潮會)를 결성하였고, 조직 강화 및 동지 규합, 적극적인 항일투쟁 전개 등을 목표로 사회 인사와 학생들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또한 앞서 조직했던 비밀독서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매달 정기모임을 갖고 비밀리에 월간지 「흑조(黑潮)」를 발행하여 같은 학교 학우들에게 몰래 배포하는 등 동지 규합 및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그 뒤 그는 1928년 교내 일본인 교사의 반민족적인 교육 행태에 분노하고는 흑조회 간부들과 함께 일본인 교사의 배척과 한국어 잡지·신문의 구입 등을 조건으로 그해 6월 18일 부산제2상업학교와 [[동래고등학교|동래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28년 11월 29일 [[일본]]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을 오가던 흑조회 간부 양정욱이 [[연락선]]을 타고 귀국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때문에 일전에 결성했던 비밀독서회와 흑조회의 전모가 노출되었다. 이에 어소운을 비롯한 동지들이 모두 검거되었다. 검거된 어소운은 미결수로서 수개월간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29년 9월 24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형,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77년 10월 28일 부산시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어소운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5월 6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함종 어씨]][[분류:동래구 출신 인물]][[분류:1906년 출생]][[분류:1977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